[Opinion] 그 집 앞의 그네 [사람]

때로는 희망이었던
글 입력 2020.05.1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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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떠난 자리엔 퀴퀴한 먼지만이 남았다. 먼지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자 썰렁했던 집 안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이 쓸쓸함이 오히려 설렘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새집으로 이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먼지들마저 떠나 외로이 떨고 있는 집과 작별 인사를 끝냈다. ‘우리 어디서 살아?’, ‘우리 아파트 가는 거지?’라고 말하며 재잘거리는 나를 뒤로 한 채, 아버지는 부쩍 피곤한 표정으로 새집을 향해 운전했다. 차는 새집에 얼른 도착하고 싶은 내 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는지, 우리 네 가족을 빠른 속력으로 데려다주었다.

 

이윽고 우리는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이층집에 도착했다. 그 이층집 안으로 우리의 짐이 차곡차곡 들어갔다. 동화책에 등장하던, 그래서 남몰래 은근히 동경해왔던 빨간 벽돌 이층집을 드디어 갖게 된 것인가. 하지만 그런 나의 들뜬 마음이 무색하게,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이층에 올라가선 안 된다고 경고하셨다. 이층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고 일층을 둘러보았다.

 

가스레인지만 놓인 작은 부뚜막과 그 옆에 딸린, 1인용 냉장고의 크기도 감당하지 못할 방 하나. 딱 여기까지가 우리 네 가족에게 허용된 공간이었다. 사춘기가 막 시작된 언니는 집에 화장실이 없음을 깨닫곤, 큰 소리로 이사했다고 떠드는 내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래도 나는 시무룩해지지 않았다.


친구들의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방과 거실, 공주님 방은 없었지만 그 대신 가족들의 얼굴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들과 살을 부대끼며 잘 수 있었기에, 이 집은 혼자 잠을 못 자는 내게 최적화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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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집 앞에 큰 놀이터가 있어서 좋았다. 토요일이면 언니와 종종 그 놀이터에 가곤 했는데, 그곳에서 언니와 나는 그네를 즐겨 탔다. 그네는 색칠이 벗겨지고 녹이 슨 채로 낡아 있었지만 꽤 튼튼했다.


그네는 ‘끼익-’ 신호를 보낸 후 나를 하늘 속 세상으로 물들게 했다. 발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갈 때, 아파트들이 옹기종기 모인 먼 세상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저 넓은 세상이 전부 내 것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주는 흥분은 어떠한 꿈이든 꾸게 해줬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선사했다.

 

긍정의 힘으로 나아간 세상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면 그늘진 방이 아닌 햇빛이 환히 드리워진 거실에서, 그 햇빛을 양분 삼아 더 밝게 웃는 가족들이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상과 함께 느껴지는 흰 구름의 폭신함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한편 시간이 흘러 계절이 여러 번 바뀌자 우리 가족은 단칸방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하기 시작했다. 공중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는 점, 언니와 비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점과 같은 불편은 이제 사소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적응이 안 되는 게 딱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집이 어디냐는 친구의 질문에 쉽사리 답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었다.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게 일상다반사였지만, 꽤 집요한 친구에게는 이름만 들어본 어느 동네의 아파트에 산다고 거짓말했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고 했던가. 그 허술한 거짓말도 결국 들키는 날이 오고 말았다. 특별할 것 없던 무료한 주말, 아버지의 심부름에 슬리퍼를 신은 채 밖으로 나섰는데 같은 반 친구들이 집 근처에서 무리 지어 놀고 있었다. 친구들은 곧 나를 아는 채 했고, 나는 당황한 나머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쾅 닫아버렸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대문을 두드리며 내 이름을 불렀지만,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당당하게 이 집에서 산다고 말하면 될 것을,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워 피해 버린 것일까.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의 내 모습을 초라하게 느꼈던 것 같다. 친구들이 집에서 보내는 평화로운 일상이 사실 내겐 큰 희망임을, 그들에 비해 내가 가진 꿈의 크기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고작 일 분 남짓했던 이 사건은 흑역사로 남아 한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어엿한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우스운 추억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경제적 형편이 나아져 안방과 거실이 있는 집에서 살 게 돼서 창피한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아니다. 희망을 품음에 있어 그 크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어떤 희망이든 큰 가치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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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칸방이 있던 동네를 떠난 후에도 가끔 그 집 앞의 놀이터에 가곤 한다. 풍경도, 위치도 그대로인 놀이터에서 변화된 게 있다면 내 몸이 커져서 더 이상 놀이터의 그네를 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그네를 타려면, 아쉽지만 더 큰 놀이터로 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그네는 그 자체로 내 기억에 의미 있게 남아있다. 이 그네 덕분에 희망을 품을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또 다른 꿈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네가 되리라 다짐하며 어둑해진 저녁 놀이터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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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채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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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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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빛바다
    • 채현님의 글은 언제나 따스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채현님만의 일상이 담긴 이야기를 언제나 좋아한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스쳐지나갈 뿐인 놀이터의 그네에 채현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그 이야기가 참 각별하게 느껴져요. 채현님의 글을 읽으면 좋은 분이라는 게 물씬 느껴지기 때문에 분명 놀이터의 그네같은 분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항상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채현님의 목소리를 좋아하니, 앞으로도 이야기를 많이 많이 드려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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