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집 앞의 그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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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떠난 자리엔 퀴퀴한 먼지만이 남았다. 먼지들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자 썰렁했던 집 안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이 쓸쓸함이 오히려 설렘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새집으로 이사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먼지들마저 떠나 외로이 떨고 있는 집과 작별 인사를 끝냈다. ‘우리 어디서 살아?’, ‘우리 아파트 가는 거지?’라고 말하며 재잘거리는 나를 뒤로 한 채, 아버지는 부쩍 피곤한 표정으로 새집을 향해 운전했다. 차는 새집에 얼른 도착하고 싶은 내 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는지, 우리 네 가족을 빠른 속력으로 데려다주었다.
이윽고 우리는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이층집에 도착했다. 그 이층집 안으로 우리의 짐이 차곡차곡 들어갔다. 동화책에 등장하던, 그래서 남몰래 은근히 동경해왔던 빨간 벽돌 이층집을 드디어 갖게 된 것인가. 하지만 그런 나의 들뜬 마음이 무색하게,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이층에 올라가선 안 된다고 경고하셨다. 이층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고 일층을 둘러보았다.
가스레인지만 놓인 작은 부뚜막과 그 옆에 딸린, 1인용 냉장고의 크기도 감당하지 못할 방 하나. 딱 여기까지가 우리 네 가족에게 허용된 공간이었다. 사춘기가 막 시작된 언니는 집에 화장실이 없음을 깨닫곤, 큰 소리로 이사했다고 떠드는 내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래도 나는 시무룩해지지 않았다.
친구들의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방과 거실, 공주님 방은 없었지만 그 대신 가족들의 얼굴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들과 살을 부대끼며 잘 수 있었기에, 이 집은 혼자 잠을 못 자는 내게 최적화된 곳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 앞에 큰 놀이터가 있어서 좋았다. 토요일이면 언니와 종종 그 놀이터에 가곤 했는데, 그곳에서 언니와 나는 그네를 즐겨 탔다. 그네는 색칠이 벗겨지고 녹이 슨 채로 낡아 있었지만 꽤 튼튼했다.
그네는 ‘끼익-’ 신호를 보낸 후 나를 하늘 속 세상으로 물들게 했다. 발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갈 때, 아파트들이 옹기종기 모인 먼 세상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저 넓은 세상이 전부 내 것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주는 흥분은 어떠한 꿈이든 꾸게 해줬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선사했다.
긍정의 힘으로 나아간 세상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면 그늘진 방이 아닌 햇빛이 환히 드리워진 거실에서, 그 햇빛을 양분 삼아 더 밝게 웃는 가족들이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상과 함께 느껴지는 흰 구름의 폭신함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한편 시간이 흘러 계절이 여러 번 바뀌자 우리 가족은 단칸방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하기 시작했다. 공중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는 점, 언니와 비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점과 같은 불편은 이제 사소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적응이 안 되는 게 딱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집이 어디냐는 친구의 질문에 쉽사리 답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었다.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게 일상다반사였지만, 꽤 집요한 친구에게는 이름만 들어본 어느 동네의 아파트에 산다고 거짓말했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고 했던가. 그 허술한 거짓말도 결국 들키는 날이 오고 말았다. 특별할 것 없던 무료한 주말, 아버지의 심부름에 슬리퍼를 신은 채 밖으로 나섰는데 같은 반 친구들이 집 근처에서 무리 지어 놀고 있었다. 친구들은 곧 나를 아는 채 했고, 나는 당황한 나머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쾅 닫아버렸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대문을 두드리며 내 이름을 불렀지만,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당당하게 이 집에서 산다고 말하면 될 것을,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워 피해 버린 것일까.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의 내 모습을 초라하게 느꼈던 것 같다. 친구들이 집에서 보내는 평화로운 일상이 사실 내겐 큰 희망임을, 그들에 비해 내가 가진 꿈의 크기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고작 일 분 남짓했던 이 사건은 흑역사로 남아 한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어엿한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우스운 추억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경제적 형편이 나아져 안방과 거실이 있는 집에서 살 게 돼서 창피한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아니다. 희망을 품음에 있어 그 크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어떤 희망이든 큰 가치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단칸방이 있던 동네를 떠난 후에도 가끔 그 집 앞의 놀이터에 가곤 한다. 풍경도, 위치도 그대로인 놀이터에서 변화된 게 있다면 내 몸이 커져서 더 이상 놀이터의 그네를 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그네를 타려면, 아쉽지만 더 큰 놀이터로 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그네는 그 자체로 내 기억에 의미 있게 남아있다. 이 그네 덕분에 희망을 품을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또 다른 꿈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네가 되리라 다짐하며 어둑해진 저녁 놀이터를 떠났다.
[황채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채현 에디터님은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글로 담담히 풀어 내는 용기를 지니고 계신 듯 합니다. 존경해요!
그네가 '나를 하늘 속 세상으로 물들게 했다'라는 표현, 정말 예뻐요! 저도 어렸을 때 그네 타는 것을 참 좋아했는데, 저를 조금이나마 하늘과 가깝게 만들어 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나 싶네요.
채현 에디터님에게 긍정의 힘을 준 그네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네가 되리라는 채현 에디터님의 마음이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만큼은 100퍼센트 진솔한 글을 써보자고 결심한 후 썼던 글이라, 공유하고 싶었어요. 이러한 마음을 용기라고 표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바를 발판삼아 그네같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ㅎㅎ
이보다 더 좋은 칭찬이 있을까요ㅎㅎ 무엇보다 제 글에 담긴 진심을 봐주셔서 제가 오히려 경원님의 답글을 보고 행복을 얻은것같아요:)
어린시절 마음에 까맣게 자리잡았던 부분을 끄집어낸 거라 공개하기까지 고민도 많았어요. 경원님 비롯해 에디터분들의 답글을 받으며 공개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ㅎㅎ
이젠 무엇이든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라지만, 추억만큼은 변하질 않더라고요. 경원님에게도 마음 한곳에 이쁘게 기억할수있는 추억이 가득하길 바라요!!
어린 시절 대문을 닫아 걸었던 에디터님을 떠올리니 너무 뭉클해졌어요. 지금은 건강하게 그 기억을 떠올리실 수 있게 되어 마음이 괜찮지만, 어린 에디터님을 만나 안아주고 싶어지는 이야기였어요. 어떤 희망이든 큰 가치가 있다는 점은 오히려 제가 위로받은 말이었어요. 제 작은 희망들도 가치가 있다는 말이 저를 또 다른 꿈을 꾸게 만들어주네요.
그네는 박차면 박차는대로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잖아요. 그만큼 시야도 더 넓어지고요. 이 글이 제겐 그런 글이었어요. 채현 에디터님이 알려주신 것처럼 저도 더 멀리 바라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지만 덕분에 따뜻해졌어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어쩌면 철없이 보일수있던 아이의 모습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봐주시는 것을 보며 fullsun님은 참 성숙한어른이실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답글을 받으며 따뜻했고 행복했어요!
더욱 좋은 글로 보답할게요:)
더불어 채현 에디터님의 긍정적 문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ㅎ 사실 제가 이런 글을 잘 못쓰거든요.. 무언가 담담히 제 경험을 풀어내는 것에 조금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마음 속에 어떤 두려움을 품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그런가 채연 에디터님의 글이 더 마음 깊이 다가왔던 것 같아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가진 경험에 대해 시간을 두고 오래 생각하다보면 '이건 별 거 아닌 일이었지'라는 생각과 함께 어느순간 담담해지고 아무렇지 않아지더라구요. 부끄럽고 생각하기 싫은 기억을 때로는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도 나쁘진 않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푸른하늘님이 기억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보실 수 있도록 응원하겠습니다!! 아마 푸른하늘님이라면 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푸른하늘님의 글을 응원하니까요!!
푸른하늘님이 마음껏 글을 펼치실 수 있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