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 연극 '죽음의 집' [공연예술]

글 입력 2020.05.1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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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죽음의 집’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 41회 서울연극제 공식 선정작인 ‘죽음의 집’을 관람했다. 묵직한 여운을 주는 연극이었다. 이번 오피니언에서는 연극 ‘죽음의 집’이 담고 있는 내용과 함께, 내가 공연을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하고 싶다.


 


죽은 자들이 모여드는 죽음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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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욱은 친구 황상호의 집에 방문한다. 그런데 황상호는 자꾸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불안정해 보인다. 어딘가 좀 이상하다. 둘 사이에 대화가 오가고, 황상호는 자신이 죽었다고 밝힌다.


죽어있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단 말인가? 이동욱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하지만, 이어서 두 명의 죽은 사람이 또 집에 방문한다.


그들은 황상호의 고등학교 동창 박영권과 그의 아내 강문실이다. 그들은 약국에 가서 치사량 2배의 수면제를 먹어서 방금 죽었다고 한다.


죽음의 집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들은 함께 술을 마시고, 음악에 맞춰 미친 듯이 춤을 추기도 한다.




삶과 죽음의 혼란스러운 경계



박영권과 강문실 부부는 살아있을 때 못하고 곪아버린 이야기를 한다. 이제 죽었으니까 솔직히 얘기해보자면서.


살아있을 때 그들은 왜 더 솔직하지 못했을까? 이제 죽었으니 더 솔직해질 수 있다면, 죽은 자들은 왜 더 솔직할 수 있을까.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삶과 죽음을 구분 짓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죽음의 집 안에서 언뜻 보면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다른 점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그리고 죽어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에서 그들은 혼란스러운 대화를 이어간다. 그 와중에 강문실은 속이 좋지 않을 때마다 약을 먹으면 괜찮다면서 약병을 꺼내고, 박영권은 자신의 가방을 챙긴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다.



강문실이 집 밖으로 잠시 나갔다 오는 순간 연극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기 시작한다. 밖에 나갔다 온 강문실을, 나머지 세 사람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은연중에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기에 아직은 완전히 죽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죽음의 집, 그 집의 밖으로 나가는 순간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강문실은 이내 자신의 죽음을 완전히 깨닫는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왜 자신을 못 알아보냐며 따지지만 그것마저 포기한다. 그녀가 죽음을 완전하게 '인지'하고, 은연중에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약병을 집에 두고 나간다.


이어서 박영권도 집에서 나갔다 들어오며 그들에게 잊히게 되고, 살아있는 사람인 이동욱은 나가서 그들의 시체를 보고서야 세 사람이 정말 죽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황상호는 어쩌면 바깥에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어있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살아있을 때 못해본 새로운 일들을 해보고 싶다며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집 밖에 나가면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이동욱은 황상호가 나가는 것을 말린다.


황상호는 새로운 것이 아니어도 된다고, 이미 몇 번이나 겪었지만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많은 순간들을 다시 살아서 경험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침에 울리는 알람을 끄는 순간, 책상에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는 순간…. 전혀 새롭지 않은 순간들을 그리워하는 황상호를 보며 생각했다. 왜 그는 살아있을 때 그것이 소중하다는 걸 몰랐을까. 그리고 왜 살아있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처럼 살아가지 못하고 있을까?




살아있는 사람처럼 삶을 살아내기



나는 가끔 내가 살아가고 있는 건지 죽어가고 있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할 때가 많다. 확실한 건 살아낸다는 게 꽤 어려운 일이고, 내가 삶을 힘겹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살아가야지' 라는 메세지를 담은 작품들에 공감하지도, 그것들을 좋아하지도 못했다. 삶이 너무 힘들기에, 알지 못하는 죽음 너머를 그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집' 후반에서 황상호는 이동욱에게 말한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평소라면 내게 불편하게만 다가왔을 이 대사가 왜 자꾸 맴도는지. 삶이 죽음보다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다만, 죽은 사람은 삶을 이미 경험해봤기에 그것에 대해 알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죽음 이후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극 중 인물들이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 느꼈을 허무감과 외로움을, 살아있는 사람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계속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 이후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영원한 것이었다면 삶과 죽음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무한한 고민을 해야 할 테지만, 다행히도 삶은 유한한 것이다. 


언젠가 나도 죽음 너머를 보게 될 것이다.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할 일은 삶을 삶처럼 살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대한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익숙한 것의 소중함을 알기. 그리고, 넘칠 만큼 충분한 사랑을 하기.


살아있는 사람처럼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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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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