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끄러운 침묵은 이제 그만 [도서]

글 입력 2020.05.1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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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나는 항상 왜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많고 많은 책 중에 왜 하필 이것부터 내 손으로 들어 올렸는지 그 이유부터 서두에 밝히곤 한다. 그렇다고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베스트셀러니깐, 누군가가 추천해 줘서,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서, 영화화된 소설이라서 등등.


이 책 또한 큰 이유는 없었다. SNS 속 어쩌다 우연히 발견한 한 글에서 그분이 한 해 동안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의 목록을 올려주셨고 나는 그 책들을 인터넷 서점에서 모두 검색해보다가 그냥 표지가 마음에 들어 바로 구매했었다. 흰색 바탕과 눈에 띄는 노란색. 맞잡은 두 손. 세 가지의 색만을 이용해 제작해낸 표지의 심플하면서도 디자인적인 감각.


그런 이유로 책을 선정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이래서 첫인상이 중요한 건가 싶었다. 글을 그 자리에서 모두 읽어버릴 수는 없으니 한 번의 눈길로 담아낼 수 있는 표지 혹은 제목으로 우리는 그것을 읽어볼지 말지 선택하곤 하니까(물론 줄거리나 책 소개까지 읽어보고 선택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많겠지만).


서론이 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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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갈래 길

LA TRESSE



이 책은 프랑스 소설이다. 한국 번역본의 제목은 ‘세 갈래 길’이고 본래는 La Tress. 라 트레스. 불어로 tress는 세 갈래로 나눈 머리카락을 서로 엇걸어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 혹은 세 가닥을 하나로 땋아 엮은 줄이나 끈을 의미한다(참고로 la는 영어에서 the와 같은 관사에 해당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제목처럼 세 주인공의 삶이 서로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의 스미타,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줄리아, 캐나다 몬트리올의 사라. 세 주인공은 모두 여자이며 소설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들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삶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서로를 모르고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곳에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은 여자라는 사실과 사회적인 관념에 고통받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의 스미타


 

 

오늘은 그가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될 것이다. 오늘, 그의 딸은 학교에 간다.

 

스미타는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 이곳 바들라푸르에서 달리트는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 스미타는 달리트다. 카스트의 최하위인 수드라보다도 못한 존재, 노예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다. 달리트는 너무 부정해서 사람들과 섞일 수 없다고 했다.


p.10



세 주인공 중 한 명, 스미타는 인도 카스트 제도의 최하위인 불가촉천민이다. 불가촉천민들은 수 세대에 걸쳐 어머니로부터 딸에게로,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대물림되는 직분, 의무가 있다. 스미타가 종일 하는 일은 타인이 싼 똥을 맨손으로 긁어모으는 것이고, 스미타의 남편 나가라잔은 타인의 밭에 가 그곳에 기생하는 쥐를 잡아오는 것이다. 냄새로 인해 치솟는 헛구역질을 참아가며, 손이 물어뜯기더라도 그 감각을 참아가며. 그리고 그들은 남편이 잡아온 쥐를 먹으며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스미타와 나가라잔에게는 딸 랄리타가 있다. 본래라면 랄리타도 스미타를 따라 배변을 치우는 일을 슬슬 배워나가야 하지만 스미타는 그 숙명을 거부한다. 절대 딸만큼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겠다고, 글을 배우게 하리라고 다짐하며. 그 일념 하에 그간 모아온 돈을 교사에게 모두 가져다주며 딸을 겨우 학교에 보내지만, 첫날부터 딸은 선생님에게 부당하게 매를 맞고 돌아온다. 남편은 자신들의 처지에 순응하며 살자고 하지만, 스미타는 굴복할 생각이 없다. 우타르프라데시를 떠나 조금의 기회라도 존재하는 도시로 향하고자 한다.



이렇게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며 달리트는 굴종의 삶을 견뎠다.


스미타는 다르다. 그는 굴복할 생각이 없다. 그는 삶을 잔인한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딸마저 굽실거리며 살게 할 수는 없다. 모두가 잠들어버린 어두운 움막 안, 비슈누 신의 제단 앞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안 돼, 랄리타가 그들 앞에 무릎 꿇게 할 수는 없어.’


p.89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줄리아



 

열여섯이 되던 날 줄리아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공방 일을 돕기 위해서다. 학교에서 학업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특히 국어 교사는 그에게 학자가 될 수 있을 거라며 대학 진학을 권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로서는 공방 말고 다른 길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란프레디 가족에게 머리카락이란 세대를 이어온 가업이기 이전에 일종의 열정이었다.


p.25



열여섯이 되던 날 줄리아는 학교를 그만두고 공방 일을 돕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에겐 공방이 큰 존재였다. 하지만 어느 날 공방을 운영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쓰러지게 되고, 어머니의 부탁으로 들어간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줄리아는 생전 처음 보는 서류들과 대면한다.


채무 이행 최고장, 지불 명령, 셀 수도 없는 등기우편들. 한마디로 말해, 공방은 빚더미에 깔려 있었고 란프레디 가의 가업은 끝장난 셈이다. 당장 살고 있는 집에서도 쫓겨날 판이기에 어머니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줄리아에게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라고 말한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사라


 

 

사라가 잠자리를 벗어나는 시각은 오전 5시. 더 자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시간을 일분일초 단위로 나눠써야한다. … 지금은 모든 일이 계획에 따라, 미리 준비된 상태로, 예정된 대로 이루어진다. … 1년 내내 그렇다. 한 가정의 주부, 조직의 임원, 워킹걸, 잇걸, 원더우먼. 여성잡지들은 사라 같은 여자들에게 이런 라벨을 붙여 분류했다.


p.31


 

변호사 사라. 입사하는 변호사 상당수가 여자임에도 여전히 남성우월주의에 젖어있는 이 로펌에서, 여자 변호사들 가운데 최초로 파트너로 승진한 사람이 바로 사라다. 로스쿨에서 함께 공부한 여자 동료 대부분은 유리천장에 부딪쳤고 몇몇은 포기했지만 그는 다르다. 무수한 추가 근무 시간으로, 사무실에서 보낸 주말들로, 변론을 준비하며 지새운 밤들로 유리천장이라고 불리는 벽을 힘껏 두들겨 깨버렸다.


사라는 회사 동료들에게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 소아과에 갈 일이 생기거나 아이들의 학교에 꼭 가봐야 할 때면 고객과의 외부 면담이 잡혔다는 핑계를 댄다. 임신할 적에도 7개월에 접어들 때까지 그의 배는 그리 표시가 나지 않아 일을 계속 진행했으며, 출산 휴가도 가장 짧게 끝냈다.


그렇게 철저히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온 사라에게 현실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암 진단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이 회사 내에 알려지자마자 그의 입지는 좁혀지며 직원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그가 담당하던 사건마저 다른 변호사에게 뺏겨버린다.

 

 



 

 

옳지 못한 침묵

이제는 멈추어야 할 때

 


누구나 각자의 사연을 지닌 채 살아간다. 인생은 그럴만한 사정과 까닭들로 가득하기에 어느 누가 더 슬프다고, 덜 힘들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럴 권리가 없으니깐. 각자의 상황 속에서 고통과 슬픔에 짓눌려 한이 서리기도 하겠지만, 한 인생을 통째로 기쁨이나 슬픔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본다. 단 하루를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수많은 감정들과 공존하고, 그렇기에 삶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여정의 연속이니.


여기 각자의 처절한 사연에 둘러싸인 세 여성이 있다. 인도의 스미타, 이탈리아의 줄리아, 그리고 캐나다의 사라. 세 주인공을 둘러싼 사회 환경은 다르고, 그들이 처한 상황도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제도와 관습에서 일반적으로 자신이 속한 성에 부여하는 정해진 틀로 인해 자유와 자존을 위협받는다.


같은 여성이기 때문이었을까. 첫 페이지를 펼친 그 순간부터 마지막을 장식할 때까지 내 두 시야를 책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었고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그 삶의 파편들에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상황에서조차도 나는 숨이 막혔고 위협을 느꼈다. 인간은 그렇다. 자신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한 사건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나는, 우리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고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가는 내내 자꾸만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있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들처럼 맞서 싸울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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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는 공통된 한 가지 열망이 있다. 주어진 삶을 견디기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 그들은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자존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현실과 맞서 싸운다. 하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지구상에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알 수는 없겠지만 동시대에 살아가고 있고, 공동체 속에 살아가는 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무수한 영향을 미치곤 한다. 그게 선하든 악하든.


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주인공들에게 내려지는 억압과 차별은 공동체의 문제이다. 단순히 직접적인 비판과 폭력만이 문제는 아니니깐. 침묵과 의구심, 체념 그 모두를 포함해야 할 테니깐. 결국 누군가의 사연 속에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 숨어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를 이겨내는 일에도 우리 모두는 함께해야 한다. 세 인물이 머리카락이라는 하나의 매개로 연결됨으로써 각자의 사연을 이겨낼 힘을 얻은 것처럼. 결국 우리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부여한 책임도, 이를 이겨내도록 하는 힘도 모두 나눠 갖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책 속에서 여성을 나타내는 인칭대명사로는 ‘그녀’를, 남성은 ‘그’를 주로 사용한다. 본래의 책이 그러했는지,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는 책이라 번역을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 갈래 길> 속에서는 세 주인공들에게 여성, 그녀와 같은 호칭을 부여하지 않는다. 끈질기게도 그들을 ‘그’라고 언급하는 그 모습은 마치 책을 읽고 있는 우리라도 그들에게 성별이라는 필터를 씌우기보다 그들을 한 객체로서, 한 사람으로서 바라봐달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세 삶의 단편적인 모습들을 들여다보는 데 있어서 단지 여성들의 이야기라고만 치부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포기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면 좋을 듯싶다. 사회의 제도들과 맞서 싸우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제는 너무나 오래 노출된 채 살아왔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그 문화와 차별들에 의구심을 품기를, 변화에 따라오는 눈초리에 두려워하지 말고 더 이상은 침묵하지 않기를, 나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따라올 책임의 무게를 절실히 느끼고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기를. 나부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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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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