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덕수궁을 걸으며 나를 마주하는 시간 [문화 공간]

덕수궁으로 향하는 세 번째 발걸음
글 입력 2020.05.06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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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따뜻해지면 가장 먼저 궁을 떠올린다.

 

파릇파릇한 잎이 올라온 나무들과 수줍은 듯 고개를 내민 꽃들, 그 속에 고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전각들까지, 발길이 닿는 데로 천천히 산책하는 것. 이것이 봄을 맞이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봄 치고는 추웠던 날씨 때문에 뒤늦게서야 궁 산책에 나섰다. 봄과 여름 사이에 있는 계절, 이번에는 덕수궁을 걷기로 했다.




처음 마주한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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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 매료되었던 것은 6년 전, 처음으로 석조전을 마주했을 때다.


한국의 궁은 모두 기와지붕에 목조 건물인 줄만 알았던 나에게 서양식으로 건축된 석조전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즈넉한 전각들 사이 홀로 장엄한 풍채를 드러내고 있는 석조전을 볼 때면 조선도, 대한민국도 아닌 대한제국의 모습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당시 황실의 처소 및 업무공간 등으로 이용되다가 일제강점기 미술관으로 전용되면서 주요 내부 장식이 훼손됐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구조체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다 2014년, 5년간의 원형 복원 공사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석조전의 역사를 생각하면 괜히 그 자리에 서서 건물을 계속 바라보고 있게 된다. 웅장하고 고상한 외형을 지닌 우리 문화재가 가끔은 삭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렇듯 아픈 역사를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외로움을 안아 준 두 번째 덕수궁



그리고 스무 살, 나는 또 한 번 덕수궁에 들렀다.

 

그동안 여행지로만 마주했던 서울에 거주하게 되자 꿈꾸던 화려한 불빛 대신 높은 빌딩의 회색빛이 나를 반겼고, 그것은 나의 외로움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나만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느낌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덕수궁이 떠올랐다.


몇 년 전과 같이 석조전을 마주했을 때, 나는 또다시 감상에 젖으며 카메라를 켰다. 순간의 느낌보다는 흘러가는 이 시간을 간직하고 싶어 사진 대신 동영상을 찍으려 혼자 낑낑대며 이리저리 카메라를 움직이고 있을 때, 한 커플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말했다.


“찍어드릴까요?”


참 고마운 말이지만, 그때는 그 말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말보다는 그들의 눈빛에 괜한 자격지심이 생겼던 것 같다. 당신들 눈에도 내가 외로워 보이냐고, 내가 불청객 같냐고, 그래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고 하는 등의 부정적인 생각이 들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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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조차도 내가 안쓰럽던 기분으로 궁 곳곳을 터덜터덜 걸은지 얼마나 지났을까, 궁 뒤편에 자리하고 있던 정관헌에 다다랐다. 대한제국 시절 연회를 여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된 정관헌은 그 용도에 걸맞게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현재는 내부가 텅 비어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다. 현재 모습이 어떻든 나는 내 가치를 다 기억하고 있고, 이렇게 내 자리에서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으니 흔들리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정관헌을 등지고 덕수궁을 쭉 훑어보았을 때, 그제서야 전각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울함에 빠져 이 아름다운 모습을 놓칠 뻔했다. 제자리에 고요히 자리 잡은 전각들의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산책이 주는 평온함 때문인지 나는 바보같이 연약했던 나의 감정들과 인사할 수 있었다.


대한문을 나와 다시 도심 속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내가 왜 덕수궁에 오고 싶었는지 깨달았다. 한없이 높고 칙칙한 건물들 사이 굳건히 자리 잡은 덕수궁의 모습에서 내가 바라던 나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건축물이 나에게 직접적인 위로를 해준 것은 아니겠지만, 덕수궁을 산책하며 느꼈던 감정들과 상상 속의 어루만짐을 통해 나의 두 번째 덕수궁 역시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다시 만난 설렘, 새로운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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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세 번째로 맞이한 덕수궁은 감성적이고 유약했던 과거와 달리 활기차게 시작했다.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건물인 만큼 앞에 서 있으면 왠지 압도 당하는 듯해 무서운 느낌이 들던 중화전의 엄숙함이 이젠 든든하고 씩씩해 보이고, 석조전 앞에 늠름히 서 있는 소나무도, 길가에 작게 핀 꽃들도 멋있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4년 전 그 앞에서 위로받았던 정관헌은 이젠 공허하기보다 그 특유의 화려하고 독특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방 이후 한때 일반인을 대상으로 차와 음료를 팔던 카페로 운영되기도 했던 과거의 정관헌을 상상하며 생기 가득한 이곳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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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위의 만연한 꽃들, 석조전 뒤 쪽과 이어지는 작은 산책길, 전에 왔을 땐 보지 못했던 준명당 옆 구석의 아궁이까지 덕수궁의 새로운 모습에 봄기운까지 더해지니 괜히 설렘마저 느껴졌다.


사실 덕수궁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이 모든 새로움이 나의 마음가짐이 변화해서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아서 산책하는 발걸음도 더욱 가벼웠다. 자연의 푸른빛이 주는 활력이 내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세 번째로 찾은 덕수궁은 나에게 새로운 설렘을 주었다.


*


내년 봄엔 덕수궁이 아닌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찾아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 봄이든, 더 먼 날의 봄이든, 아니면 포근한 눈을 감싸 안은 겨울이든,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덕수궁이 아닐까 싶다. 나도 모르는 새에 마음속에 애틋하게 자리 잡은 덕수궁에 들러 오래도록 천천히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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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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