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여성의 정치, 그 자체로 용기이자 연대이다

레이첼 리어스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Knock down the house)》
글 입력 2020.05.03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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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치러진 지 한 달 남짓 된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성의 활약은 여전히 찬란했다. 동수민주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여성 의제를 다루는 정당인 ‘여성의당’이 창당되어 비례대표를 선출하였고 수많은 여성 의원들에 의해 여성 공약이 추진력 있게 제기되었다. 언제나 뒷순위가 되었던 여성 의제를 최우선시하는 유권자들이 많아졌고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은 한국 의회 사상 최고의 수치를 기록했다. 미진하다고 판단될지라도 분명 여성의 발걸음은 앞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을 뒷받침하는 결과였다.


그러나, 한국 의회 사상 최고치인 21대 국회의 여성 의원의 비율, 19%라는 숫자는 여전히 매우 낮은 수치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2017년 기준 OECD 국가들의 평균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28.8%이다). 여성 의원의 비율이 반절은커녕 20%도 넘지 않는 이러한 구성의 국회가 과연 여성들을 대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위성 정당의 난립으로 거대 양당 체제가 형성된 지금, 정당 조직 단위로 이루어지는 정치가 다양한 소수자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을지 역시 미지수다. 아직 국회의 성취를 확인하기엔 이른 단계이나 지금의 국회가 다양한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기에 한계가 있는 공론장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 속에서 정치는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인식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는 비단 여성 의원의 비율 말고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성 운동을 지지하고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진보 남성 정치인들의 여성 폭력을 얼마나 많이 목격했는가. 그들의 폭력은 그들이 펼치는 정치의 정당성과 윤리성을 검증하고 비판하는 데 마땅히 적용되어야 하는 공적 담론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국한된 ‘여자 문제’로 귀결된다. 이러한 착오는 정치적 영역에 여성은 없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여성 역시 공적 담론의 구성원이자 발화자이며 모든 폭력이 그러하듯 여성에 대한 폭력 또한 공적 영역에서 비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많은 정치인이 간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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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의 인식이 얼마나 거듭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정치하는 여성을 기록하는 움직임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은 2019년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2018년 미국의 중간선거에 출마한 여성 의원들의 선거 과정을 기록한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에이미 빌레라, 코리 부시, 폴라 진 스웨어런진 등 네 명의 여성 의원들이 의회의 81%를 남성이 차지하는 백인 남성 중심 미국 정치에 정면으로 맞서고 소수 집단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치는 지난한 과정을 담는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는 민주당의 2인자 조 크롤리에, 광부의 딸인 폴 마진은 석탄 회사들로부터 로비를 받아 환경을 해칠 수 있는 광산 개발을 추진 중인 조 맨친에, 코리 부시는 10선 국회의원 레이시 클레이에 맞서 선거에 출마한다. 또한 부실한 의료체계 아래에서 건강보험증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은 딸의 엄마인 에이미 빌레라는 건강보험을 주요 의제로 선거에 나선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더군다나 남성 정치인이 그렇지 않은 데 비해 어떤 옷차림을 하고 표정을 하는지가 화두가 되는 여성 정치인의 목소리는 자동으로 주어지는 한 겹의 벽을 뚫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를 움츠러뜨리게 하는 어떤 거대한 권력에 그들은 굴복하지 않고 힘써 나아간다. 발로 뛰는 후보자들의 캠페인 현장에서는 일종의 전운마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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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 부시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감독 레이첼 리어스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날 이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수자 차별 정책으로 일관된 정치적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정치인의 당선인 만큼 막연하고 아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첼 리어스는 주저하지 않고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여성 정치인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기업과 결탁되어 있지도 않고 안정적인 자금과 기반도 없으며 해당 총선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정치 인생이 좌우되는 정치 신인이다. 유세 현장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시민이 상대 후보자를 뽑을 것이라고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다. 좌절의 연속일 시간 중 첫날에, 감독은 눈부신 성공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현실에 눈을 감기보다 당장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현실을 직시했다.


거대 정당 조직에 기대지 않고 풀뿌리 정치 조직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꿈꾸며 발걸음을 내딛는 그들이 주로 위치하는 곳은 현장이다. 그들의 자취를 바삐 좇는 화면은 흡사 로드무비처럼 흙냄새 가득하다. 집마다 들러 국민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지지자를 얻어야 하며, 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힘이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마찬가지로 힘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영화의 초입에서 언급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의 말처럼 힘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존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그것은 누구를 향해 있는가. 그들은 우리를 위해 그 힘을 쓰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그들의 선거는 시민들로부터 힘을 위임받기 위함이 아닌, 특정 권력에 불평등하게 배분된 힘을 가져오기 위한 싸움이다.

 

영화는 미국의 정치라는 거대한 판을 거시적으로 조망하지 않고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당 조직 체제에서 간과되는 무수한 개인들의 일상을 미시적으로 보여준다. 백인이 아니라서, 여성이라서, 이주민이라서, 노동자라서 무시되고 방치되는 그들의 목소리들을 의회에서 대변하는 정치인은 많지 않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의 상대 후보자 조 크롤리는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토론회에는 참석하지 않으면서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유세 현장에는 모습을 드러내며, 홍보 책자에는 예비 선거일을 기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에겐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투표할 ‘콘크리트 지지자’가 있기 때문이다. 풀뿌리 정치 조직으로 기반을 쌓기 시작하는 여성 정치인이 얼마나 기울어진 경쟁에 당면해 있는지,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 목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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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후보들 가운데서 당선된 후보는 단 한 명,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뿐이다. 폴 마진 스웨어런진, 코리 부시, 에이미 빌레라는 선거에서 이기지 못한다. 아쉬운 결과지만 1시간 30분가량의 러닝 타임을 통해 제시되듯 그들이 처한 환경은 후보에 올라 의견을 개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지만 쉽게 표면화되지 못했던 목소리를 끌어올려 공론장에 기입했다는 자체가 하나의 성취다. 여성이 걸어온 눈부신 용기의 길은 그 끝이 승리이든 패배이든 모두 역사에 기록될 가치가 있다. 남성의 그것이 응당 그러했듯 말이다.

 


“이번 경선에 참여한 게 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를 여기에 모이게 한 바로 그 이유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어요. 예비 선거는 끝났지만 불평등은 끝나지 않았어요.”


- 에이미 빌레라 선거 캠프 일원



선거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는 경선에서의 승리가 확정된 날 다른 지역의 경선에 출마한 여성 의원 아야나 프레슬리와 코리 부시의 이름을 언급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연대의 범위를 선포한다. 성패 여부를 떠나, 서로의 용기가 없었다면 그 어느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곳에서 서서히 여성의 목소리가 확장되고 있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수도 없이 쫓겨날 것이고 좌절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늘도 늘어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계속 참여할 것이고, 모일 것이고, 끝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있는 불평등에 맞설 것이다. 누군가에게만 허락되었던 영역은 더 이상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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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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