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수업일기1 - Lectio Linguae Latinae, 라틴어 수업/ 한동일 [도서]

Lectio I - 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 Magna puerilitas que est in me / Lectio II -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 Prima schola alba est
글 입력 2020.05.0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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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tio I - 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 Magna puerilitas que est in me

Lectio II -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 Prima schola alba est


 

불문과에 다니던 때부터 꼭 라틴어를 배워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이유는 단순하고 유치했다. 프랑스어가 좋아서 프랑스어의 뿌리가 되는 라틴어를 배우고 싶었고, 라틴어 하나를 마스터하면 유럽 언어의 절반을 쉽게 구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문화를 배우다보면 필연적으로 알게 되는 라틴어에 대한 곁가지 지식이 내 상상 속에서 라틴어를 아주 폼나는 어떤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파리에 가면 대학가를 중심으로 라틴지구(quartier latin)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소르본느’를 비롯한 명문 대학들이 모여 있는 곳에 형성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여기에서 교수들과 학생들, 소위 ‘배운’ 사람들이 라틴어로만 대화를 했다고 한다. 라틴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그런 허세와 겉멋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IMG_6601.JPG

(2014년, 라틴 지구 어딘가에서)

 

 

하지만 막상 라틴어를 공부하는 일 자체는 늘 기약없는 ‘나중’으로 미뤄두곤 했는데, 그 이유 또한 단순하고 유치했다. 어려운 걸 아니까, 지레 겁먹고 반쯤 포기한 것이다. 혼자서는 절대 못할 테니 나중에 라틴어 수업이 있는 학교를 다시 다니게 되면 배워야지, 하며 비슷한 사연을 가진 꿈들이 죽 늘어서 있는 목록에 ‘라틴어 배우기’를 적어 두었다.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면 그 때 배우겠다니, 이 얼마나 실현 가능성 낮은 이야기인가.

 

돌이켜보면 학교를 다니면서 그런 로망이 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전공이었고, 나는 내 선택에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내가 더 자유로워지면 정말 즐겁게 원없이 공부해서 다시 대학에 다녀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고등학교 땐 끔찍스럽기만 했던 과목들에 느꼈던 부담감이 사라지고 다시 배워보고 싶다는 흥미가 생길 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는 수업 위주로 듣고, 평점을 깎아 먹을 것 같은, 재미있어 보이지만 동시에 위험해 보이는 수업들을 포기할 때. 그런 나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배우는 것을 싫어한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스트레스에 취약했을 뿐이라는 걸.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것을 책임지고 완수해나가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무서워서 외면하고, 책임을 떠넘기려다 내 삶의 선택권까지 다른 이에게 넘겨 버리는 것. 그게 지금까지 내 무의식의 패턴이었다.

 

라틴어 수업 첫 강의를 읽고, 오랜만에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하다보니 깨닫게 된 건, 캐나다에 올 때까지, 그리고 오고 나서도 그 무의식적인 회피가 내 안에 남아있다는 점이다. 처음 캐나다에 왔을 때, 지낼 곳을 선택하는 것 때문에 한국 시간으로 새벽에 부모님에게 전화했었다. 일을 구하는 것부터 여가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는지, 누구와 보내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배경 지식도 전무하다시피 한 낯선 나라에서 새롭게 하나씩 선택해왔다. 1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어떤 선택은 성공적이었지만 어떤 선택은 처참하게 실패하기도 했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코로나가 심각해지기 전, 지금 지내는 집으로 들어오기로 했던 선택은 아마도 내가 캐나다에 와서 내린 선택 중에 가장 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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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 업무가 잠정 휴면에 들어가고, 산책할 때를 제외하곤 집 밖으로 출입하지 않는 날들이 한 달을 채워갈 무렵에 집주인 언니의 책꽂이에서 [라틴어 수업] 책을 발견했다. 라틴어를 선생님 없이 책 한 권으로 배운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 같았지만, 그래도 라틴어가 배우고 싶다고 말했던 과거의 내가 생각나 첫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라틴어의 기초라도 뗄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한동일 선생님께서 수업의 목표라고 말씀하신 ‘생각의 책장 만들기’는 이미 시작 단계에 돌입한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공연과 전시를 보러다니며 공부하던 때를 지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기가 길어지면서, 점점 사색하는 일이 줄었다. 생각하는 근육이 풀어지고 글쓰는 감각을 상실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래간만에 접한 인문학 수업 한 강에 다시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꿈틀거리며 기어나와 나를 노트북 키보드 앞에 앉혀 놓았다. 물론 막상 글을 쓰는 데까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지만, 주 1회 수업이라고 위안삼으며.

 

‘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 첫 수업은 휴강이다. 욕심을 앞세워 한 권을 앉은 자리에서 정독하려다가 이 챕터를 읽고 그만 멈춰섰다. 선생님께서 휴강을 주신 이유, 바로 ‘휴강’으로 생긴 여유 시간에 바깥에 나가 ‘아지랑이’를 보라는 과제 때문이다.

 

 

자, 이제 이 봄날의 아지랑이를 보러 운동장으로 나가십시오. 공부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원래 의미하는 대로 ‘보잘 것 없는 것’, ‘허풍’과 같은 마음의 현상도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힘들기는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 마음의 운동장에는 어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습니까?


 

라틴어로 ‘아지랑이’는 ‘네불라nebula’라고 한다. 그 어원을 살펴 올라가면 그리스어, 인도유럽어를 끼고 돌며 명사와 형용사를 얽었다 푸는 과정이 굽이굽이 더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뜻은 ‘보잘것 없는’, ‘안개 낀, 희미한’, 혹은 그런 마음상태. 프랑스어 단어를 공부하다보면, 영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가 엮여 굽이굽이 올라간다.


그 종착지가 라틴어일 줄 알았는데, 라틴어 단어에도 어원이 있다니. 한 나라의 문화는, 그리고 그 문화의 중심이 되는 언어라는 건, 정말 오랜 시간이라는 씨줄 위에 시대의 유행, 주변과의 교류를 날줄로 엮어 내린 결과물인가 보다. 그리고 그 매듭은 지금도 한 올 한 올 엮여 내려가고 있다. 먼 훗날에 우리는 어떤 단어로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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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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