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모델] 몬스터

글 입력 2020.04.3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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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자기소개 해주시죠."

"이름은 그냥 뭐, 제가 자주 쓰는 닉네임 몬스터로 해주시구요. 27살입니다. 아, 다리가 저리네요. 뼈마디가 시리는게, 제가 25살 때부터 뼈가 시렸거든요. 그래서 일기예보 보다도 제가 더 정확하다고 하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얕보면 안됩니다. 가는 건 순서가 없거든요. 제가 먼저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제 말도 들으셔도 됩니다."


"아.. 저 아재.... 대체 언제부터 아재였나요?"

"글쎼요. 제가 고등학생 때 편의점 알바를 하는데, 30살 이상 먹은 아저씨들이 저보고 형님이라 할때..? 그 중 단골 아저씨가 월 400이상 벌 수 있게 할테니 자기랑 같이 공장하자고 한 적이 있었죠. 인상이 마음에 든다고."


내가 어쩌다 저런 사람을 알게 됐을까. 정말 신기한 인물이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는 하지만, 저 말투는 한 50대 이상 아저씨들의 말투인데, 청년이 말하니 너무 우습기도 하다. 영감이 하나 들어있어.. 만나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는데 흔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있어주어서 낯설었다.



범1.jpg



저 표정, 거만한 눈을 그리고 싶었는데 본인도 그림을 그리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보라고 해도 쳐다보지 않아서 그냥 숙인 얼굴을 그렸다. 눈은 못그리고 내리깔고 있는 이목구비 얼굴 형태 정도만. 보라색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도 알록달록 새깔이 많았다. 보라색 눈 앞머리와 핑크색, 초록색, 노란색 광대 등을 칠했다. 반대쪽에도 주황색과 초록색을 칠하고, 콧대는 노란색이었다. 하늘색도 있고. 이마 윗부분의 머리카락도 색이 너무 많았다.


나는 네가 단색일 줄 알았는데 색이 많아서 놀랬다. 얼굴 윗부분과 윤곽을 그리고, 상체로 넘어왔다. 보라색 티를 입고 있었다. 네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어도 나는 보라색을 칠했을 것이다. 보라색과 노란색 선명한 대비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 그리는 그림은 모 아니면 도이다. 색을 잡기 가장 어렵거나 혹은 가장 빠르고 쉽고 명료하게 찾아지거나. 내 생각보다 더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너 보라색이 잘 어울리네. 노란색이랑. 보색이 되게 강하다."

"난 검은색이 가장 잘 어울려."

"그건 당연히 알지. 하지만 난 네가 어떤 옷을 입고 있어도 나는 너한테 보라색과 노란색을 느낄 거 같아. 그림은 어떤 거 같아?"

"내가 이렇게 색이 많았나?? 네 그림 보니 내가 아재같네. 나이가 들수록 경험이 늘아나잖아. 경험이 많다는 건 색이 많은 것을 의미하고."

"정면을 그리고 싶은데, 네가 여기를 안봤어."

"알겠어. 이번에 해봐 그럼."


다른 말 없이 그림만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내 지시를 따라 내 쪽을 바라봤다.


*


"그래, 그렇게 얼굴 들고 가만히 있어."

"나 웃으면 잘생겼는데 (눈웃음)"

"(무시) 저 가식."

"원래 가식이 가장 매력적이잖아."


실 없는 소리를 하며 다시 그림을 그렸다.


저 얼굴을 그리고 싶었는데, 인상/눈빛이 잘 담겨지지 않았다. 표현하고 싶은 마음과 내 손이 따로 놀아서 조금 슬펐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머릿속의 느낌을 따라가려고 애를 썼다.


눈을 크게 뜨면 크지만 가늘게 뜨면 그만큼 가늘어진다. 그 중간 어느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데 잘 되지는 않았다. 색을 많이 쏟아냈다. 주황색, 노란색, 하늘색, 초록색, 분홍색. 하지만 하나의 인상으로 잡히지는 않았다. 아크릴을 사용해야 할까. 내가 제일 좋아하고 즐겨 쓰고 잘 맞다고 느끼는 오일파스텔의 한계 -두께를 느꼈다. 이렇게 퍼석한 느낌이 아니라 찐득한 색이었는데. 그래서 가득 눌러져있는 색 느낌을 내고 싶어서 계속 덧칠했다. 그리고 화이트로 색의 경계를 뭉갰다. 까만 콩테로 눈, 눈썹 그리고 코의 선을 만들었다.


마음에 가득 차지는 않지만, 여기서 더 손을 댔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그림이 될 것 같아서 손을 놓았다. 색 많이 쓴 그저 사실적인 그림 그 정도였다. 나중에 다시 재도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범2.jpg


 

"난 네가 널 그리게 허락할 줄은 몰랐어."

"나도 예술 좋아하거든. 요리하는 것도 예술이고."

"응 그렇지."

"나도 너처럼 내 나름의 그림을 그리고 있어. 플레이팅은 예술이거든. 요리가 예술이야. 조리는 아니고." 

"차이가 뭔데?"

"조리는 정헤진 레시피에 따라 하는 거.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만들어내는 것이 조리지. 그리고 요리는 창의성, 예술성 등 모든 감각을 투자해서(만들어서) 한 요리에 담는 것이야. 그게 나에게는 요리야. 내가 돈 있으면 계속 할텐데... 하지만 요리로는 대한민국에서 힘들 것 같아서 공부만 했잖아. 대기업 가려고. (웃음)"


"요리 왜 좋아해? 왜 하게됐어?"

"밥 굶을 일 없으니까."


*


어떤 신체부위가 의미 있는지, 자신있거나 없는 부위를 물었다. 전부 다 라고 말했다. 무시하고, 그 중에 정해보라고 했다. 눈, 코, 입, 귀, 얼굴, 팔.. 계속 늘어나길래 그냥 포기했다. 그림은 여기에서 끝낼까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수다만 떨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가, 잠깐 자세를 바꾸려는데, 주저 앉은 자세가 마음에 들어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다리는 좀 아프고 불편하겠지만, 미안하지만 그대로 가만히 있어줘.



범3.jpg



발부터 그렸다. 구겨진 모습처럼 보이는 발이 그리기에 맛있어 보였다. 구불구불하게 파란 선으로 올라갔다. 허벅지를 그리고 허벅지에 걸친 팔의 끝, 손가락부터 그렸다. 디테일한 건 의미가 없으니 자세히 그리지도 않았다. 구불구불 그리고, 올라가서 상체를 그리고, 얼굴을 날렸다. 그리고 색을 칠했다. 보라색, 파란색, 빨간색, 주황색, 초록색 등 여전히 많은 색을 가졌다. 그래서 상체 옷에 이것저것 칠했다. 머리카락도 주황색으로 칠하다가 날렸다. 표정은 그리고 싶지 않아서 가로 작대기로 눈 하나를 그렸다. 노란색으로 팔 다리 포인트를 칠했다. 그리고 제일 마음에 든 발가락 모습들을 다양한 색으로 칠했다. 대신 시선을 많이 뻇아가지는 않게- 아주 조금씩, 깨알같이, 대신 잔뜩 많이.


일단 친구 모습은 다 끝냈는데, 배경은 까만색이여야만 했다. 그냥, 무조건 까만 배경에 있어야하는 느낌/그림이었다. 그래서 콩테로 하나하나 줄을 그으며 다 덮었다. 친구는 그 동안 쉬고있고.


까만 선으로 다 그려서 빼곡히 채웠는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가 자기도 화구 있다며 가져온 재료를 보니 아크릴이 있었다. 반 망가진 작은 붓과 새끼손가락만한 물감 하나. 그래도 배경을 칠하기엔 충분해서, 빌려서 썼다.


까만 배경이긴 하지만 가득 채우면 답답할 것이다. 그래서 물은 최소한으로 해서 농도는 짙게하되, 건조함을 이용해서 빈틈을 만들었다. 오일파스텔과 같이 퍼석한 느낌을 통일되게 주었다. 물론 아쉽게도 테두리 라인은 물감으로 덮어졌다. 하지만 내가 바라던 대비/대조적인 모습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제 됐어. 오늘 그림은 너무 충분해. 만족했어. 뿌듯하게 그림을 마무리했다.


"너는 정말 또라이야."

"또라이가 되고 싶어서 하는 거지."

"왜?"

"매력적이니까. 사람들도 비슷하잖아. 다 비슷하면 끌리는 게 없잖아. 또라이는 튀니까 끌리는 거지. 안좋은 쪽으로 또라이면 범죄자이고 질타받지, 하지만 좋은 쪽으로 튀는 또라이는 괜찮아."


원래 특이하지만, 되고 싶어서 한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서 흥미로웠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타고난 또라이지만. 예술을 좋아해서 시각, 감각에 대한 얘기들도 나눴다. 그림 세 개는 내 한계야. 여기서 마무리했다. 툭 툭 던지는 가벼운 말투지만 절대로 거짓이 없는, 즐거운 자리였다. 인상 깊었던 대화들은 최대한 그대로 남기려고 노력했다. 다시 회상하고 기록하기에 전부 각색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내가 끌려가는 경험은 또 다른 색다른 경험이었다.



[최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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