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프니까 청춘이다 [영화]

영화 <라라걸(RIDE LIKE A GIRL)>과 고통, 그리고 청춘
글 입력 2020.04.30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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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일상, 드라마, 스릴러, 공포, 코미디, 액션, 스포츠, 판타지 등등. 영화 타이틀을 검색하면 꼭 붙어 나오는 분류 방식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직관적이지 못하다. 중심 소재나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 밑에 나열된 줄거리까지 읽어야 약간 감이 잡힌다. 때로는 줄거리마저 명확하지 못하다.


물론 영화를 보기 전에 꼭 스토리라인이나 분위기를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영화의 어떤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만든 카테고리라면 그 몫은 다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장르 구분을 새롭게 하고자, 지난 3월에 '부수는/자립하는/심판하는/갈망하는' 네 가지 장르를 만들었다.


그리고 5월, '부수는' 영화로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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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이름, 미셸 페인


 

밀폐된 실내 공간에서 사람들과 밀착하여 두 시간여를 보내야 하는 장소, 영화관. 시국이 시국인지라 사람들이 쉽게 꺼릴 만한 공간이다. 하지만 영화관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발길 끊은 관람객들을 모으기 위해 '인생 영화'라는 기획전을 시행하면서, 예매차트는 과거 큰 인기를 끈 영화들로 도배되어있다. 그 리스트 중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라라랜드>.


오늘 소개할 영화도 아니고, 비슷한 주제나 소재도 아니지만, 굳이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제목이 아주 닮은 탓이다. 그래서일까. <라라걸>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땐 가볍고 유쾌한 뮤지컬 영화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빼어난 자연경관, 심장 박동 같은 말발굽 소리, 그리고 그 말을 타고 달리는 호주 멜버른 컵(2015) 첫 여성 우승자를 다룬 영화였다.

 

 

*

스포주의

 

 

<라라걸>은 호주 여성 기수(경마에서 말을 타는 사람) '미셸 페인'의 실화를 다뤘다. 실화 영화 중 특히 한 인물에게 초점을 맞춘 영화는 인물의 사전 정보를 알면 알수록 보는 재미가 있다. 미셸은 경마 관련 가업을 잇고 있는 페인 가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형제 대부분이 기수의 삶을 선택했고, 미셸도 그중 하나였다. 그에게 천부적인 실력은 없었다.


어린 시절만 해도 작은 지역 대회에서 늘 꼴찌였다. 그러나 미셸이 지닌 힘이 있었다. 승리를 향한 집념, 이기고자 하는 욕망, 안주하지 않는 도전정신. 그의 노력은 숫자로 더 잘 보인다. 3,200번의 대회 출전, 161번의 우승, 16번의 골절과 7번의 낙마. 특히 2004년 낙마 사고로 전신 마비를 겪고서도 그는 두려움에 떠는 대신 말을 다시 탔다. 이유는 꽤 간단했다. 아직 못 이룬 자신의 꿈, 멜버른 컵에서 우승하기 위해.


멜버른 컵은 1861년에 시작된 세계 3대 경마대회로, 약 2분간 3,200m를 달린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들 틈에서 균형을 잡고, 상대를 견제하고, 자신이 탄 말의 속도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수에게 의미 있을 정도다. 그러나 매년 열린 경기이니만큼 150명이 넘는 우승자가 나왔을 터인데 왜 미셸의 이야기는 영화화가 될 정도로 특별한 것일까?


답은 여기에 있다. 미셸은 1세기가 넘는 기나긴 멜버른 컵 역사상 5번째로 출전한 여성 기수이며, 최초의 여성 우승자이다. 대회가 시작된 지 150년이 지나서야 첫 여성 우승자가 탄생한 셈이다. 여성이 신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에 출전마저도 어려웠을까?




#LIKEAGIRL


 

2014년경에 시작했던 'LIKEAGIRL 캠페인'을 기억하는가? '여자처럼'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사회현상을 바꾸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여자아이에게 '여자처럼 달리라는 게 어떤 의미야?'라고 물었을 때, 아이는 '최대한 빨리 달리는 거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실제로, 아이는 온 힘을 다하여 달린다. 우리 사회가 가진 의미와는 다른 모습이다. <라라걸>의 원제 은 여기서 따온 말이다. 이거야말로 미셸 선수가 승마하며 겪어온 성차별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미셸의 언니가 오빠보다 말을 더 탔지만, 기회를 얻는 것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것도 모두 남자인 오빠였다. 어린 미셸은 의문을 가진다. 왜 언니가 더 잘하는데 대회에 출전할 수 없는지. 미셸은 자신에게 안주하기를 강요하던 집에서 뛰쳐나가면서 장벽의 실체를 직면한다. 힘겹게 미셸이 살던 지역의 최고 선수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여성이기에 아무도 그 실력을 믿어주질 않고, 심지어는 실력을 보여줄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분명한 목표 의식을 가진 미셸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동분서주하며 트랙만이라도 돌 수 있도록 부탁한다. 돌아오는 것은 둘 중 하나. 성희롱 혹은 무시.


여성 기수에게 자리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명히 보여준 것은 단연 이 장면 아닐까. 여성 기수 대기실을 찾아 헤매던 미셸. 캐리어를 끌고 서성이는 그를 본 매점 주인이 그를 부른다. 대기실이 여기 있다고 하면서. 매점 주인이 안내-라기에는 바로 옆이긴 했지만-한 곳은 매점에 딸린 작은 창고 방. 누가 봐도 손글씨로 쓴 '여성 기수 방'은 꼭 어린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에 '내 방' 혹은 '내 거'라고 적은 것처럼 장난스러웠다. 어느 길을 가든 어려운 상황에서 미셸은 홀로 우뚝 섰다. 불합리한 페널티 판정, 협박, 멜버른 컵에서 성과를 못 냈을 때 100배의 위약금을 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서도.


아까 했던 물음으로 돌아와, 다시 묻는다. 여성은 신체적으로 불리하므로 해내기 어려운가? 답은 미셸 선수가 들려주었다.


 

 

"여성은 힘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방금 우리가 세상을 이겼네요."

 

 


아프니까 청춘이다


 

한때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많은 사랑을 받다가 정반대로 욕도 많이 먹은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기억하는가? 책 제목에 역정을 내는 대부분의 젊은 층이 그러하듯 당시 나도 썩 달갑게 보지 않았다. 뭘 해도 살기 힘든 세상에 청춘이 무슨 대단하고 고귀한 가치를 지닌 것처럼 포장하면서 아픔을 정당화한다니. 노력이 부족해서 힘든 것이라며, 각박한 현실을 사회구조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고 느꼈다. 그런데 우스운 일이 생겼다.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청춘은 아프다'가 아니라 '아프니까 청춘이다'이기에.


사람은 살면서 끊임없이 배우고, 깨닫고, 알아차린다. 이렇게 세상에 적응해 갈수록 아픔의 강도는 약해진다. 왜, 그런 적 있지 않은가. 한때 나를 너무 힘들게 하던 사건을 훗날 다시 보면 별거 아니었음을 깨닫는 경험. 그땐 어려서 이런 일에도 힘들어했구나, 했던 경험. 때로 성장의 다른 말은 무뎌짐이기도 하다.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스킬이 생길수록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얻을 수 있는 생각, 아이디어, 가치관, 변화, 자극이 사라진다.


일주일 전에 힘든 일을 겪었다. 단언컨대 나의 짧은 생 가운데 가장 강렬한 괴로움이었다. 그 여파는 엄청났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뜬금없이 울고, 숨을 잘 못 쉬고, 종일 누워있는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힘든 일은 남에게 털지 않고 혼자서 이겨내 왔다. 그런데 그때는 사람이 필요했다. 길을 잃은 나에게 살 수 있다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괜찮아진다고 말해줄 사람. 이런 나를 기꺼이 찾아온 십 년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정도로 강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네가 부러워. 지금 네가, 그리고 그 사람이 힘도, 돈도, 뭣도 없는 20대이기에 느낄 수 있는 고통이라고 생각해. 만약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3~40대라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 같거든. 이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을 거야. 뛰쳐나가도 먹고살 수 있을 거니까. 윤혜야, 너는 글을 쓰잖아. 스트레스받을 때 글로 푼다고도 했고. 이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앞으로 훨씬 깊고 풍부한 글을 쓸 수 있을 거야. 자양분인 거지.


 

사실 사흘 전만 해도 이번 주에 올릴 글은 우울하고 칙칙한 불순물이었다. 단어도, 문장 연결도, 흐름도 엉망인, 꼭 내 머릿속 같던 글. 예상치 못한 큰 변화였다. 나는 에디터 활동을 시작하면서 매달 하나의 카테고리에 관련된 글을 쓰자고 계획했는데 영화를 보기가, 아니, 몸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메모장을 켤 엄두도 못 냈다. 이번 주에 기고하려던 <라라걸>을 생각만 해도 그 일, 정확히는 그 일과 관련된 과거가 줄줄이 쏟아져서.


사흘 후의 나는 꽤 평화롭게 <라라걸>을 말하며, 글을 마무리 짓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정말, 시간이 약이긴 한가 보다. 여전히 괴롭긴 하다. 그래도 매 순간이 힘들던 날이 과거가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 아침에 눈을 뜨고 점심때까지, 그리고 기나긴 새벽녘을 잘 다룰 줄 알면 된다. 긍정적인 생각과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일까.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 말은 언젠가 전공 수업에서 들은 말이었다. '바닥에 떨어졌다고, 이제 올라갈 일만 있다고 안심하지 마라. 끝이 아니다. 바닥 아래에는 끝없는 지하가 있다.' 지하가 있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지 않다. 오히려 기쁘다. 힘든 상황에서도 더 괴로운 쪽, 그러니까 생 生을 선택하고 이어가려고 애쓰는 나 자신이.


주저 없이 포기했다. 누군가, 혹은 세상이 안 된다고 하는 것에 반기를 들며 그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해본 적도 없다. 낭비할 돈도 시간도 없다는 생각으로 합리화했다. 해보지도 않고서. 그러나 이번에는 쉽게 나를 놓고 싶지 않다. 부딪히고, 맞서고, 싸우고, 또 아파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한낱 일반인인 나와 세계 최정상에 오른 스포츠 선수를 같은 선상에 두기는 어렵지만, 공통점 하나는 발견한 것 같다. 우리는 아프니까 청춘임을 배우고 있다고.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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