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시간] Oogly_#2_우주

문드러진 사과
글 입력 2020.04.2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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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ogly_#2_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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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오른쪽 코와 눈 사이가 시큰거리고, 눈을 뜨고 있는 걸 감당하기 어려워. 그날 머리를 세게 때린 후, 이명이 너무 심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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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간 실과 파란 실 사이에 나를 꿰어놓고 싶어.

마음은 척추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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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비친 거울을 마구 파헤쳐. 검은 우주밖에 안 나와. 이게 무엇인가 싶어.

나는 없던 세계를 있다며 찾아 나섰구나.

하지만 나는 분명히 여기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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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눈을 질끈 감고, 코 위를 엄지와 검지로 지그시 눌러. 이 시큰한 죽은 꽃의 개화가 누그러지길 바라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아프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머리가 깨어진 틈 사이로 더 커진 이명만 울릴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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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를 위로해주는 건 그림자뿐이야.

 

불쌍한 영혼아,

너를 위로해주는 건 그림자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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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코를 깨뜨리지 말아라. 죽은 꽃이 펴 이끼가 잔뜩 끼어서 시린 그 코를 깨뜨리지 말어라.

네가 그토록 원하던 껍질 안쪽의 축축한 그 세상으로 인도해줄 테니.


본래 너의 마음은 죽은 꽃만 잔뜩 피던 곳이 아니었느냐.

너의 겉에 핀 온갖 꽃들은 그 아래, 축축한 죽은 꽃이 만개한 이끼 뒤엉킨 덩어리에서 물을 먹고 자란단다.


사랑해주렴, 그 죽은 꽃이 잔뜩 핀 언덕을,

바라봐주렴, 네게 스스로 꽂은 가시에서 흘러나온 진물로 이루어진 웅덩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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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너는 숨는다. 

보드라운 살점이라 믿고 싶은 그 개화 속으로,

스스로 피워낸 만개의 숨막힌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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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5


‘버려짐’에 가까운 외로움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무렵 써 내려간 글.


몇 달이 지난 지금에도 지난 여름에 이 글자를 끄적이고 있던 나를 떠올리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오른쪽 코와 눈 사이가 시큰거린다는 것이 어떻게 아린 것인지 선명히 떠오르고, 내게 남은 건 그림자뿐이라고 읊조리던 어두움이 무엇이었는지 불러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 생겼던 멍 자국이 가라앉고 나서도 온전히 아물지 못한 채 붉게 남아있다는 의미일 테다. 새삼 반갑기도 하다. 겉과 달리 속은 축축하고 까슬한 나의 웅덩이가 문득 왜 이리 반가운지 모르겠다.


시리고 아린 코와 눈과 그 사이, 척추를 관통하는 나의 감정, 아픈 곳을 가라앉혀보려고 지그시 누르는 엄지와 검지, 머리가 깨어진 틈, 축축한 덩어리, 바스락거리는 나의 만개, 생각보다 더 그때의 나를 선명하게 기록해낸 나의 웅얼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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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5


나는 아직도 씨름하고 있다. 내 안에 있는 그 녀석은 세상에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쳐서 며칠 휴전을 선포하고 몇 번의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아 성찰을 하고 다시 앞에 마주했다.


고작 몇 달 지났다고 먼지 수북이 쌓여 모습을 더 감추어 낸 것이 야속했다. 항상 그런 식이다. 내 안에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여전히 알 수 없어 나를 안달나게 한다. 살점, 살점이라는 나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이미 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게 뿌옇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입김을 ‘후’ 하고 불었다. 머쓱한 입김 ‘후’를 밀어내 보려고 한숨을 ‘휴’하고 내쉬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건 나의 ‘후’다. who, 나를 집어 꺼내는 과정은 늘 아무 맥락 없이 나를 맴도는 모습이다. 세찬 바람 한번 불어 요동치기를 바라는 하얀 천장에 매달린 모빌처럼.


나는 자주 내 오른쪽 눈썹 위부터 코까지 뒤집혀 왜곡된 기역 자의 호선을 따라 얇게 가르는 상상을 했다. 손을 올려 얼굴 위를 손가락으로 슥 훑기도 했다. 하나 명확한 것은 이번 우글리는 내가 지나치도록 선명하게 기억하는(어쩌면 '기억하려고’하는) ‘느낌’ 아니면 ‘감각’ 아님, 그 종류를 말하라면 ‘아픔’ 혹은 ‘쓰라림’ 같은 것이란 점이었다. “살짝 옅게 살을 가르면, 그 안에서 우주가 나오는 것이다”라고 상상한다. 찢어진 휴짓조각처럼 나풀거리는 먼지 같은 살점에 둘러싸인 보드라운 살의 옷을 벗겨내면, 이미 젖어있고 간지러운 언덕, 그런 것이 부유하는 우주. 그 느낌을 상상해서 느껴보라면 나는 분명히 지금도 그 감각을 불러올 수 있다. 오른쪽 얼굴에 허공으로 가득 찬 우주를 느낄 수 있다.


이럴 수 있는 데에는 우글리도 아주 큰 한몫을 했다. 나는 이 여정을 마무리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잔뜩 의심하면서도 오히려 그 의심 때문에 그들을 선명하게 불러오고 있다. 하지만 내 손끝에는 아직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냥 여기까지인 작업인 걸까 싶기도 하다.


나는 그 소우주를 불러올 수 있을까, 멍 자국 가득한 그 시커먼 덩어리를,



2020.03.25


얼굴 한 켠에 자리한 우주를 그려보려고 발버둥 치는(더 정확히는 내 마음이 그런 거겠지만) 이 작업을 매일 마주하지는 못하고 있다. 계속 망설인다. 왜인지는 모른다. 대신 나의 오른쪽 얼굴을 자주 ‘떠올린다.’ 살갗 벗겨져 나풀거리는, 가장 여린 살이 벌어진 사이에서 침잠해있는 묵직한 덩어리를 상상한다.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우주라 비유되는 것들은 꽤나 다양했던 것 같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과정으로 감싸고 겹쳐져 있는 나의 오른쪽 얼굴의 우주는 ‘나’라는 범위 내에서 경험한 그 어떤 ‘우주’ 따위의 것 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고 입체적이다.


생명체로 따지면 아주 아메바 같은 것도 아니고 우주로 따지기에는 사실 온전한 규칙에 이른 공간도 아닌 단계인 것 같다. 고요함 뿐이다. 내뱉어진 더운 입김과 맞물려 차가워지다 만 미적지근한 바람이 ‘후’ 주변으로 감싸든다. 엉덩이와 온 다리와 맨발바닥으로 맞닿아진 새파랗게 질린 언덕은 너무도 축축하고 차갑다. 시리다. 아주 뜨거운 온도도, 아주 차가운 온도도 없는 이 우주에는 열이면 열 가지, 백이면 백 가지의 온도가 잔뜩 뒤섞이며 하나 되지 못한 채 서로 맞물리며 휘청이고 있다. 덩어리가 맞물린 모습으로 우주에 흐르는 기류는 마르도록 만개한 꽃잎들을 실랑이게 하고, 아래에 죽은 꽃들에겐 살아있는 것의 움직임을 무심코 내던지는 듯 스쳐 지나간다.


등에는 차가운 그림자가 흐른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의 내가 처음으로 우주에 대해 읊어갈 때 이야기하던 그림자는 차가웠던가, 뜨거웠던가. 왜 지금의 나는 그것을 차갑다고 하는 것인가. 그림자는 미적지근하지 않았다. 차갑거나 뜨거웠다. 나를 위로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이 우주의 구성 요소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존재였던 것일까. 등 뒤로, 더 정확히는 척추 위로 꿈틀거리던, 끈적이게 안겼던 그 감각을 기억한다. 그림자는 나의 척추를 타고 올라와 목을 지나 얼굴로 침투해서 내 오른쪽 얼굴에 도달해 ‘후’를 끌어안고야 말았다.


존재하지 않는 감각을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한다. 떠올리고 불러온다. 벌려진 살갗이 바람에 맞아 쉽게 차갑게 식어버린다. 나는 그 벌어짐 위로 먼지처럼 마른 살점이 탄생하는 것을 그려본다.


사랑해주렴,

바라봐주렴,


문득 그 말들이 얼마나 시리도록 뜨거운 목메임에서 나왔는지 곱씹게 된다.


사랑해주렴,

사랑해주렴,


바라봐주렴,

바라봐주렴,


이 우주에서 어쩌면 가장 일렁이는 것, 가장 불안하고, 금방 소멸해버릴 것 같은, 가느다란 떨림.



2020.03.26


공허함.

작업하며 그때의 나를 불러오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때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왜 내 우주는 여기에 있어야 했을까. 그 순간 벌어져야 했을까.

꼭 겨우 아물어가려는 상처를 억지로 왜 그랬냐며 다시 벗겨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오른쪽 이마를 만지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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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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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 문드러진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많은 방식이 있을 것이다. 손으로 들기도 버거울 정도로 물러터진 마음, 겨우 손에 담아 들어 올리기도 전에 으스러질 것 같은 마음을 말한다면, 누구에게 말할 것인지, 어떤 표현으로 말할 것인지, 어떤 말투로 말할 것인지, 어떤 감정으로 말할 것인지, 어떤 눈빛으로 말할 것인지, 어느 공간에서 말할 것인지, 그리고 어느 시간에, 무엇과 함께, 무엇, 어떻게, 왜. 전달이란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벌써 작년 여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1년 전이 될 기록이다. 지금의 나는 종종 그때 나의 마음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그려본다. 지난 여름의 나는 내 사과에 못난 벌레가 들어와 그 벌레들 때문에 내 사과 속이 파이고 썩어들어가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것마저도 확신할 수 없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 마음은 벌레 때문에 문드러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벌레는 사과에 들어가자마자 익사했었다. 이미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마음에, 곪아버려 축축해진 웅덩이에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온 벌레들이 속수무책으로 빠져 죽어버렸다. 마음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선도 악도 되지 못한 채 무의미가 되어 익사했다. 그때 나의 마음은 그런 것이었다. 들어보려 꼭지를 집어 들면 꼭지만 두 손가락 사이에 남은 채 알맹이는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해버릴 사과. 아니, 이미 사과가 아닌 게 돼버린 것.

 

사과는 언제부터 썩어들어간 걸까. 그 지경이 되도록 나는 얼마나 휘청이며 지내고 있던 걸까.

그제야 그 원인을 따지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일이다. 이미 그런 마음은 모든 원인을 공허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보내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왜 그랬냐고 따지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모든 형태를 잃어서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안 되었었다.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저 종이 위에 선을 그어야만 했었다. 그러니까, 그것만 해야 했었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정말로 잘 지내고 있다. 몇 번 짜증을 내봤어도 아무렇지 않음에 기뻐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우글리의 두 번째 이야기에 온전히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랬던 것 같다. 더 정확히는 그럴까봐 나의 모든 판단과 행동을 섣불리 믿을 수가 없었다. 새삼 내 자신이 웃기기도 하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저 나름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하하. 그저 지금은 내가 그만큼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게 아니겠냐고 결론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아니다. 행복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일종의 착각인 것이 아닐까. 행복은 결국 내가 정하는 것이니까.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까. 믿으면 되는 거니까. 나의 어딘가는 여전히 차분하다.

 

무어라고 할 수 없어, 두 번째 우글리, 그러니까 보이는 것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우주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변화 없이 머무는 화면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7월 18일의 기록을 반복해서 읽고, 연필을 쥐고 무엇이라도 끄적이는 시간에 살았다. 가만히 있으려는 시간이 자신의 운명을 지키려고 나타난 것처럼,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고.

 

과거의 이야기는 과거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야기가 과거가 되었음은 지금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새기는 손길을 절대 과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으스러진 마음의 잔재와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남아있던 3월에 이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었다. 나는 그 3월 동안 남겨진 몇 가지 흔적을 우글리 세계 안으로 데려왔다. 닮은 마음에서 태어난 것들을 불러오고, 더 과거의 바스러진 이미지들을 데려오고, 원래의 이야기가 내게 말하는 몇 가지 기호들을 선명해질 때까지 마주했다. 이 과정에서 작년 7월 18일, 그러니까 이번 우글리가 시작되었던 밤에 무심코 만들었던 그 모호한 영상은 내게 좋은 힘이 되어주었다.

 

다시 글의 처음에 있는 ‘썩어 문드러진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돌아와 볼까. 이번 우주는 그 표현의 대화 혹은 언어 사이에서 가까스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대화는 나만 홀로 남은 채 일어난 상대 없는 대화였고, 누가 보면 그저 새벽에 홀로 남은 시간에 젖어 괜히 웅얼거리는 혼잣말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흩어 사라져도 상관없을 말들이 지금까지 남은 이유는 절박함이라 할 수 있는 것 때문이다. 더이상 쓸모없어지기 싫다는 절박함 하나로 하얀 화면에 고정된 까만 먼지에서 우주가 시작되었다. 거의 1년이란 시간을 맴돌다가.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점에서 아무도 온전히 밝혀낼 수 없을, 자신의 세계에서도 완전히 품을 수 없는 ‘우주’가 보이는 것으로 싹을 텄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우주 같다. 내가 이 작품과 마주한 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작품에는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 사람의 속내란 건 그리고 그것이 토하는 것들을 참 기이하다. 정말 알 수 없는 우주다.

 

만개에 띄워 놓은 노란빛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난 7월 18일의 나에겐 반짝이는 그 무엇도 없었을 테니. 그런데 그걸 다시 회상하는 나는 노란색을 띄우고 싶어졌다. 마음이 그랬다. 아무리 그래도 그때의 나는 무성하게 핀 그곳을 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못난 덩어리에서 스멀거리며 피어난 것일지라도 말이다. 펜을 들고 꽃들 위에 아무렇게나 노란빛을 그었다. 뜬금없이 놓인 노란색이 어색해서 그 빛의 그림자도 두었다. 빛에 그림자가 있다니. 지난 내가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래, 네가 비웃어도 상관없으니 위로조차 버거워 거절하려던 너에게 나는 위로를 갖다 붙이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이 ‘우주’를 기억하고 싶다. 나 자신에게도 내버려 졌다고 생각한 그때의 ‘나’가 더이상 무자비하게 흩어지지 않고 어딘가에 조금 더 단단하게, 조금 더 기억될 수 있도록 남기는 존재의 확인이자 기록이다.

 

그렇게 망설이고 어려워하더니 이제 이 여정도 마무리 할 때에 이르렀다. 막상 마무리하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이 물러터진 마음을 손안으로 잘 들어 올린 걸까. 아마 이미 들어 올리는 과정에서 진물 몇 방울 손 틈 사이로 흘러 떨어졌을 것이다. 손짓도 서툴렀을 테니 모양은 더 망가졌을 테고. 나는 잘한 걸까. 그러니까 바닥에 나뒹굴다가 어차피 사라져도 괜찮았을 순간을 손에 담아온 것 말이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 없지만 그 반갑지 못한 모습의 우주도 사랑해주고 바라봐달라 했던 나는 고마워하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이 끝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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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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