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404호 아이들에게 - 조혜은 『구두코』 [도서]

오후가 될 때까지 이모들은 스웨터의 여왕처럼 길어져요
글 입력 2020.04.23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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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터의 여왕


 

 

선유, 유진, 정자, 보람, 유은,

유민, 건희, 강희, 선주, 이슬.


지워진 뒤에도

불러 보고 싶은 이름들에게

 

 

‘404호 아기들에게.’라고 쓰인 「스웨터의 여왕」에는 아기들과 이모가 있다. 화자는 “엄마도 없이 지나간 11개월”을 지낸 아이로 보인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맞지 않는 이모들의 가슴을 찾아 다툰다.


이모는 am 7:50에 온다. 이모들과 낮 시간을 함께하는 자원봉사자 남학생은 아이들을 돌본다. 이모들은 “단 하나의 가슴을 가진 엄마처럼” 울먹이고 아이들은 “단 한 명의 엄마를 가지려는 아가들처럼” 스웨터에 매달린다. 덜 헹구어 낸 기저귀 때문에 발진이 난 아이나, 가슴으로 떨어지는 실밥들을 두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이모들의 모습은 결코 완성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돌아가는 회전목마”다. pm 5:50이면 이모는 집으로 가고, am 8:00가 되면 다시 이모가 온다. 이모는 돌아가는 오후가 될 때까지 스웨터의 여왕처럼 길어지고 아이들은 비에 젖은 놀이공원에서 원 모양으로 반복되는 회전목마처럼 징징댄다.


아이들의 오후는 “선으로만 이루어진 도형”이라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이는 지겹도록 반복되는 후렴이다. am 7:50이나 am 8:00의 십 분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엘리베이터가 울리면 이모는 계속 올 것이다. 「스웨터의 여왕」에서는 이 반복을 “적응이란 그런 거야.”라고 말한다. 이모들은 비에 젖은 오후에 계속 울먹일 것이고 아이들은 가슴에 매달려 징징거릴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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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코』 속의 인물들


 

조혜은 시인의 시에서는 「스웨터의 여왕」과 같이 어딘가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 주로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자폐 아동 치료 연구소가 있는 「3층 B동」에서는 표정, 행동, 말을 통해 아이들에 대해 말하며 “아이들이 있는 세상에 가 보고 싶”다고 한다.


발달 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한 행동 수정 기법에 대한 「1학기 기말고사」의 화자는 장애 아동에게 단계별로 미습득 행동을 학습시키는 실기 시험을 끝냈다. 「지우에게」에서는 특수학급의 아이가 등장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목욕탕에서 만난 노인 복지관 할머니「목욕탕」, 장애 판정을 받은 할머니「모자」, 경비 아저씨의 이야기「실업의 조건」 와 같은 인물도 나타난다. 이들은 특정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다.

 

「스웨터의 여왕」 아이들의 경우에는 404호에 있다. 시에서는 손가락 사이가 짓물린 402호의 아기, 덜 헹구어 낸 기저귀에 발진이 생긴 아이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러나 402호의 아이와 404호의 아이들이 달라 보이진 않는다.


이처럼 조혜은 시인의 시에서는 여러 공간이 등장한다. 시의 본문과 각주에 자주 등장하는 복지관, 3층 B동, 제4호실, 204호 미용실, 고시원, 사무실. 화자는 건물에 올라가기도 하고「3층 B동」 누군가는 유치장「제4호실」을 오가기를 반복한다. 3층 B동도, 제4호실도 그 공간이 ‘3층 B동’, ‘제4호실’에 있어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공간을 구성하고 독자가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조혜은 시인의 시에서의 공간은 의미가 있다. 『구두코』에서의 시 대부분이 길지만 지루하지 않게 읽히는 것도 이 이유다.

 

「3층 B동」을 예로 들자면, 3층 B동의 연구소를 가기 위해 독자는 여러 장소를 지나쳐야 한다. 수선집을 들르고, 인쇄사에 들려 아이들의 얼굴에 대해 듣고 미장원에 들른다. 그러나 장소에 가기까지 겪는 과정은 결코 헛된 게 아니다. 우리는 몇 가지 발음을 잃어버린 아이와, "자폐, 아동, 교육 인지, 사회, 언어, 발달하는 스티거 같은 것들"의 단어를 존중하던 옥인 인쇄사의 인물들을 본다.


결국 우리는 자폐아동치료연구소가 있는 3층으로 향한다. 화자가 장소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며 우리는 그 장소에 인물과 같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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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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