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일상의 비를 피해 잠시 쌓는 환상의 세계 [공연]

글 입력 2020.04.2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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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릴 때 놀던 것 같았어.” 공연이 끝나자마자 같이 간 친구가 말했다.


어렸을 땐 하루가 길었다. 텅 빈 집에 홀로 남아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정지해있는 사물들은 나의 상상 속에서 저마다 말을 하고 날개를 달아 움직였다. 보자기를 두르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가 되었고, 책을 쌓아올리면 어느덧 큰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지루해질 때 쯤 밖으로 나가 계단식 빌라의 5층을 단걸음에 뛰어 내려가면 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이렇다 할 비싼 장난감 없이도 지금은 가지지 못하는 커다란 세상을 안을 수 있었다. 나뭇가지를 쥐면 요술봉이 되었고, 웅덩이에 고인 진흙투성이의 물은 비싼 카페의 커피가 되었다. 아무 것도 없어도 달콤한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다. 보자기는 보자기고, 책은 책이고. 나뭇가지나 웅덩이 따위에 시선을 둘 시간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버거운 하루를 살게 되었다. 유난히 버티기 힘든 하루였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궁상맞게 괜히 어렸을 때의 커다란 세상을 떠올리곤 한다. 이미 상상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그곳을 다시 비춰준 연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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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버벌 마임극 <정크, 클라운>은 어린 시절의 세계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한다. Junk (정크) 쓸모없는 물건 + Clown (클라운),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고 노는 광대의 이야기 <정크, 클라운>에서는 네 명의 광대들이 일상 속에서 버려진 물건들을 가지고 환상의 세계를 펼친다.


이들은 일상의 사물들로 끝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어린 시절의 모습, 바로 그 모습으로 한 시간 내내 놀음을 한다. 이곳에서 폐물들은 더 이상 폐물이 아니다. 바가지 두 개를 붙여 만든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질주하기도 하고. 고무장갑 하나로 암탉이 될 수 있고, 청소기 몸통에서 빠진 호스로 코브라가 될 수도 있다.


사물들은 사물들을 벗어나고, 사람들은 사람들을 벗어난다. 말도 안되는 상상들인데, 터무니없지 않다. 낯설지 않다. 우리 모두 그렇게 놀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감각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나보다. 어린 시절의 나 자신과 친구들을 무대 한 켠에서 바라보는 느낌이다. 땀에 젖은 광대들의 몸짓에 생생함을 느끼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웃음이 나면서도 어쩐지 가슴 한 켠이 뭉클하다. 괜히 따뜻하게 번지는 것 같다.


짜여진 그대로 연기하는 것도 재밌겠지만, 광대들이 갖고 노는 폐물들은 이따금 이들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조차 계획된 것일 수도 있다) 모자가 벗겨지기도 하고, 서로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들은  돌발 상황이 아니라, 광대들의 놀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무대 위의 땀방울 하나하나 다 보이는 소극장에서,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뻗어나가는 광대들을 지켜보자니 그 어느 때보다 그들의 놀음에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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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환상의 세계에 마냥 행복한 채 깊숙이 빠져들 수가 없다. 환상의 세계에 푹 빠진 것처럼 보이던 광대들은 중간 중간 모든 놀음을 잠시 멈추고 객석을 쳐다본다. 공연장에서의 배우로서 관객을 쳐다보는 것일 수도 있고, 극 속의 광대로서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잠시 눈치를 보는 것만 같다. ‘잠시 멈춰,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 같아!’ 하고. 그래서 더욱 이 순간이 와닿는다. 이 광대들이 펼친 환상의 세계가 정말 환상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위에서 어른들의 눈을 피해 잠깐 세운, 곧 사라질 현실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완성도 높은 판타지의 세계보다 현실에서의 순간적인 도피에 좀 더 동참하기 쉽듯.


그리고 이 모든 유희 끝에 비가 쏟아진다. 광대들이 펼쳐놓은, 그 환상의 세계를 순식간에 적시며 극은 마무리된다. 수많은 땀방울을 무대 위에 튀겨놓던 광대들은 하나둘씩 구멍 난 우산을 펼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는다. 언제 그런 세계가 존재했냐는 듯, 가만히 앉아 그저 쏟아 내리는 비를 바라볼 뿐이다. 그 눈빛이 참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씁쓸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그 상상의 세계가 이제는 어느덧 끝났음을 알고 웃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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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크, 클라운>은 어른들의 마음을 시큰하게 한다. 지극히 현실 위에 쌓아낸 환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사물들로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던 어린 시절의 놀이를 함께 하는 것 같다가도, 때때로 이 모든 놀음을 세상에게 들키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쏟아져 내리는 비를 피할 수 없다. 아무리 막으려 해봐도 우리는 구멍 난 우산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현실을 피할 수가 없다. 그 어린 시절은 끝났다.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의 세계를 선물해 준 <정크, 클라운>과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집으로, 각자의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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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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