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기술 시대, 매체에 대해 성찰하다 - 20세기의 매체철학 [도서]

글 입력 2020.04.19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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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 책읽는 소녀

 

 

 

시공간 초월의 시대


 

저자는 ‘저기’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스마트 기기에 익숙한 현대인이라면 그 선언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사회 속에서 인류가 시공간의 변화를 맞이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러한 현대인 중 하나인 필자가 ‘저기’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시점 역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해 이야기해 보자면, 그 기점이 ‘실시간 방송 스트리밍’의 유행에 있었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모든 문화예술은 과거에 만들어지고, 관객들에게 다소 일방적으로 상영됐었다. 하지만 아프리카 방송을 중심으로 실시간 스트리밍이 유행을 타면서, 수많은 개인이 실시간으로 사진을 올리고, 실시간으로 영상을 스트리밍하게 되었다. 스트리밍 문화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공영방송의 영향력을 능가하고 이제는 하나의 디지털 예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

 

스트리밍을 중심으로 한 시공간의 초월은 인류 사회에 수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생산되며, 특정 집단 내에서 퍼지던 콘텐츠가 전 세계에서 동시 소비되고 있다. 과거로부터 전해지던 ‘저기’의 일은 모두 ‘지금 여기’의 일이 되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클래식이 한때 귀족들의 연회에서만 연주되었던 곡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놀랍지 않은가? 오늘날 필하모닉 연주는 모든 공간에 동시적으로 전달되며, 시간이 지나더라도 몇 번이고 들을 수 있다.

 

필자는 이번 코로나 사태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방역이슈, 사회 정치적 이슈, 환경이슈도 그렇지만, 판데믹이 개개인의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우리가 자연스러워 인식하지 못했던 기술의 힘이다. 전 세계의 모든 개인은 사회적 격리 기간 시공간을 초월한 기술발달을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는 외부활동이 지양되는 코로나 사태로 생활에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인터넷으로 음식재료를 주문하고, 친구들과 연락하며, 온라인으로 강의를 듣는다. 직접적인 생업 관계자가 아닌 학생으로서도 수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동 시간이 줄어들어 공부할 시간이 많아졌다. 사회적 격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불완전하게나마 굴러갈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기술이 우리 삶에 녹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기술발달은 환상이 아닌 현실에 있으며,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번 PRESS로 본 도서를 선택한 이유는 기술시대에서 인류가 마주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기술 시대의 인간은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이며, 어떻게 행동하게 될 것인가?” 이 질문에는 기대와 우려가 함께 섞여 있다. 시공간의 확장은 개인의 삶을 확장하고, 새로운 발견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더 많은 감시와 통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n번방 사태 역시 시공간의 확장이 가져온 비극 중 하나다. 돈이 오가고, 피해자가 끔찍한 고통을 가해자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는 n번방 사건을 이제 와 같이 있었던 성폭력 범죄로 다루어서는 안 되고,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신화로 덮어진 특수한 사건으로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소개되는 묵시론적 결말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기술시대의 특수성을 이해해야만 한다.

 


 

기술의 시대, 매체에 대해 성찰하다.


 

본 도서는 위 질문에 대한 충실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저자 심혜련은 독일 베를린 홈볼트 대학에서 벤야민의 매체이론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전북 대학교 과학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책의 머리말에는 저자가 매체철학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간단히 설명되어 있다. 본 도서의 이름을 포함해 매체 철학이란 매체의 개념과 매체를 비롯한 도구에 대한 철학적 이해, 또는 더 나아가 기술과 문명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는 학문이다. 필자가 책을 통해 해석한 매체란 인간과 세계를 이어주는 중간 매개물로, 사진, 영화, 디지털 매체가 그 예가 된다.

 

저자는 대중 매체에 관심이 있다가 계기가 되어 이는 대중 매체를 깎아내리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는 벤야민의 이론을 만나 매체철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저자가 공부한 매체철학과 매체미학은 1980년대부터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논의되어온 새로운 학문적 시도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독일어권의 학자들이 영어 중심 교육환경에서 다소 소외당하는 현실, 매체철학이 아직도 낯섦에 본 도서를 출간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본 도서는 매체를 단순한 도구로 바라보지 않은 10명의 이론가의 매체 이론을 분석한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매체에 대한 글을 쓰는 만큼, 책이 독자에게 어렵게 다가갈 것을 고민했을 밝히고 있다. 본격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철학 강의나 책을 짤막짤막 읽은 필자가 그녀의 고민에 대답해보자면, 책은 아주 쉽게 쓰인 편이다. 책은 10명의 사상가의 이론과 매체에 대한 태도를 크게 아날로그 매체로부터의 전이와 디지털 매체로 나누어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전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디지털 시대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방식은 직관적이어서 좋았다 10명의 철학자의 이론을 부담스러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쉬운 언어로 쓰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지난 사상가와 비교와 대조를 통해 이해를 돕는다. 이에 저자만의 짤막한 평가가 기술된 것도 이해하기 쉬웠다. 서론에서 전체적인 맥락을 정리한 점도 독자 친화적인 글을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을 읽는 모든 과정이 마냥 쉬웠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어렵다고 여겨져서 추가적인 자료를 찾아본 부분이 있는데, 안더스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제시된 하이데거의 테크네 개념과 포이에시스, 장 보드리야르 이후로 계속 등장하는 미메시스가 특히 그랬다. 테크네 같은 경우에는 저자가 쓴 논문을 찾아 읽고 나서야 약간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본 도서는 추가적인 자료를 위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쉬운 실제 예시를 빌려오며, 대부분 어렵지 않은 용어로 설명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등 독자 친화적이다. 일부 철학이나 미학 책은 과하게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철학에 관한 관심이 어려운 용어에 좌절할 때가 많았는데, 전공 여부를 떠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질문을 던지는 도서가 출판되는 것이 참 감사하다.

 

벤야민 이론의 가능성이 이론적 탈출구가 되었다는 저자의 고백은 도서에 충실히 반영되어있다. 책을 읽다 보면 기술이 가져오는 불안한 전망을 딛고 확장된 세계에서 마주할 정치적, 예술적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이는 저자가 가지고 있는 낙관적 평가가 책에 은근히 배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각 이론가의 입장을 오해 없이 전달하고, 기술 발달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론가들도 천천히 검토한다. 즉, 저자는 기술발달의 해석 여지를 독자에게 열어두었다. 시공간의 확장은 소멸로 이어진다는 비릴리오의 비판이 온전한 현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매체 사용자 스스로가 기술시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매체는 양날의 검인가, 아니면 가치 중립적 변화인가?


 

앞서 기술했듯이 본 도서는 ‘아날로그 매체 시대’와 ‘디지털 매체 시대’를 나누어 전개하고 있다. 아날로그 매체 시대에 소개되는 학자는 발터 벤야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권터 안더스, 마셜 맥루언, 프리드리히 키플러가 소개된다. ‘디지털 매체’에서 소개되는 학자는 장 보드리야르, 빌렘 플루서, 폴 비릴리오, 노르베르츠 볼츠, 괴츠 그로스클라웅스가 소개된다. 본 리뷰에서는 각 이론을 짧게 비교 및 요약하는 방식으로 전개해보려 한다.


 

1. 아날로그 매체 시대, 대중문화를 열다

 

가장 먼저 제시되는 발터 벤야민과 아도르노는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학자들로, 아날로그 매체와 관련된 논쟁에서 중요한 인물들로 소개된다. 벤야민은 예술의 기술적 재생산과 아우라의 몰락을 주장하고, 아도르노는 대중매체와 문화산업의 관계를 주장하였다. 대중매체에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벤야민은 대중매체와 예술의 관계를 ‘아우라의 몰락’으로 설명했다. 아우라의 사전적 정의는 영기나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벤야민은 아우라를 설명하기 위해 객관적 특성과 주체적 경험으로 구분한다. 객관적 특성으로 이해하는 아우라의 이해는 인간의 예술이 오랜 역사 속에서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써 존재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숭배의 도구로서의 예술은 감상자에게 숭배의 태도를 요구한다. 단 하나밖에 없는 신비스러운 ‘유일무이의 진품’의 가치는 이러한 맥락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예술의 특성 뒤에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낙인이 숨겨져 있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예술작품을 사회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 생산물로서 사회적 생산물을 의미한다.

 

신비로운 작품의 아우라는 시적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예술적 시공간적 거리감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가끔 고전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허름한 옷을 입거나 우아한 태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작품을 보면서 작품 감상에서 소외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작품의 권위적 아우라를 느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벤야민의 기술 재생산 시대의 예술작품의 가능성이 제기된다. 기술 재생산 시대의 예술작품은 유일성도, 원본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새로운 형식의 예술작품은 무한히 재생산될 수 있으며 그 자체적 형식으로 인해 원본성을 문제 삼지 않는다. 이에 일반인들은 권위적 아우라를 파괴하고 작품과 일대일로 시선을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아름다운 자연의 꽃이 우리와 동등한 시선에 서서 뜨거운 감동을 선사하는 것처럼, 기술 재생산 시대의 예술작품은 이미지에 대한 민주적 접근 가능성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을 중심으로 대중예술 이론을 전개한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이 예찬했던 아우라의 몰락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벤야민이 대중의 측면에서 사용과 수용을 강조했다면, 아도르노는 생산 또는 제작의 측면에서 대중매체를 분석한다. 즉, 대중 매체 이면에 존재하는 생산자의 의도가 더 중요했다. 아도르노는 대중매체에 의해서 예술과 문화가 상품이 되는 상황, 즉 ‘예술의 상품화’와 ‘상품의 심미화’를 고민하였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아도르노에게 예술은 상품이 되지 않아야 하며, 절대 상품이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도 극소수의 독점 자본 소유 아래에서 예술은 진지성을 잃고 통일성과 획일성만을 산출하는 하나의 유흥으로 전락한다.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진 예술을 자리를 잃고, 상상을 위한 공간은 점점 사라진다. 관리되는 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은폐하고, 조작하는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으로 제기된 문화산업이론 오늘날에도 의의가 있다.

 

권터 안더스는 아도르노 이론의 계승하고 있다. 대중음악과 영화를 중심으로 비판한 아도르노와 달리 안더스는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비판한다. 그는 실재와 가상을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안더스 이론의 핵심은 팬텀이 결국 실재를 지배한다는 데에 있다. 안더스는 인류가 더는 실제 세계나 세계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의해 구성된 팬텀 세계에 살고, 소비한다고 주장했다. 미디어가 뉴스를 전달한다 해도, 드러나는 것은 이미지로 이루어진 팬텀화된 세계일 뿐이며, 이 세계에 익숙해진 수동적인 이미지 소비자는 실제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 세계라고 믿는다.

 

맥루언은 아도르노와 안더스와 같은 학자들이 매체의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비판한다. 맥루언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중심으로 매체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기존의 매체 형식에 따른 문화를 문자를 중심으로 한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통해 이론을 전개했다.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구텐베르크로 대표되는 인쇄문화를 일컫는 것으로, 인쇄문화 역시도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시각 중심으로 이루어진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다른 매체의 등장으로 종말을 앞두게 된다. 맥루언이 주목했던 것은 감각들의 상호작용이었다. 이전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는 다른 감각들을 억압했던 현상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시대에는 다른 양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맥루언은 구텐베르크 은하의 종말을 인간의 확장으로 파악한다. 이는 매체를 인간과 연결하는 매체인간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아날로그 매체의 마지막 부분으로 소개된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아날로그 매체 이론과 디지털 매체의 가교 역할을 한다. 본 도서에서 소개하는 키틀러는 아날로그 매체와 정신분석학적 패러다임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논의한다. 키틀러는 20세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아날로그 매체로 축음기, 영화, 그리고 타자기를 꼽는다. 이 중 축음기는 소리를, 영화는 이미지를, 그리고 타자기는 문자를 기록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매체들의 기록 방식을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패러다임과 연결한다. 축음기는 실재계와, 영화는 상상계와 그리고 타자기는 상징계와 연결해 아날로그 매체들이 어떻게 정신분석학적 패러다임을 대체하는지 설명한다. 키틀러는 이러한 매체적 분리가 디지털 매체 시대에 이르러 해체된다고 주장하였다.

 

 

2. 디지털 매체, 새로운 존재방식을 열다

 

키플러의 주장대로 디지털 매체는 개인용 컴퓨터, 태블릿 PC등 일인 매체를 통해 이전과는 또 다른 개인매체 문화를 형성한다. 이 개인매체는 동시에 대중문화기도 하다. 이러한 매체 상황 속에서 디지털 매체는 그것이 소리든, 이미지든 또는 문자이든 간에 디지트라는 비물질적 정보로 형태를 기록하고 전송한다. 타블렛이 있다면 누구든 그림을 그려 외부에 공개할 수 있고, 프로그램만 돌릴 줄 안다면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디지털 매체 등장 이후로 본격적인 매체철학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만큼 매체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실재와 가상 문제를 안더스의 이론과 비슷한 궤도에 있다. 안더스가 실재가 가상에 의해 지배받게 된 상황을 비판했다면,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실재라고 믿었던 것의 가상성을 폭로한다. 가상은 실재가 가상임을 감추기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보드리야르가 새롭게 제시하는 시뮬라르크와 하이퍼리얼은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다뤄지고 있는 개념으로 시뮬라르크는 플라톤이 비유한 동굴의 그림자처럼 모방된 세계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하는 시뮬라르크 세계에서는 추구해야 할 원본, 즉 이데아의 세계가 없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르크가 몇 개의 단계에 걸쳐 어떠한 실재와도 무관한 순수한 시뮬라르크, 시뮬라시옹이 된다. 후에 소개될 학자인 비릴리오처럼 시뮬라르크의 등장으로 실재의 소멸을 보았다. 그냥 쥐보다 미키마우스가 영향을 미치고, 흰 곰이 아니라 콜라를 마시는 흰곰이 익숙한 시대에 다다른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작용하는 강렬한 시뮬라르크인 하이퍼리얼은 우리가 실재 또는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의 가상성을 폭로했다. 이처럼 보드리야르는 가상과 실재를 구분하였던 전통 형이상학의 종말을 지적하면서, 실재의 가상성을 이야기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플루서 또한 보드리야르와 마찬가지로 가상, 특히 디지털 가상의 문제를 지적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와 달리 플루서는 왜 가상이 실재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보드리야르가 시뮬라르크의 선언과 함께 허무주의자로 남고자 했을 때, 플루서는 가상의 구원 가능성을 탐구한 것이다. 플루서 또한 맥루언과 마찬가지로 전자 시대에 매우 낙관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문자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역사 이전의 시대’, 문자의 등장과 이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역사시대’, 기술적 장치와 기술적 이미지가 등장한 시대를 ‘탈역사의 시대’로 보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이미지의 지위 회복을 꿰한다. 그에게 핵심은 이미지, 특히 탈역사 시대에 기술장치로 만들어진 기술적 이미지이다. 플루서에게 이미지는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표상하도록 하고, 다의적인 상징 복합체다. 단 한 번의 시선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미지의 의미는 그 자체가 무궁무진한 해석이 가능한 공간이다. 이를 전제로 해서 그는 디지털 가상을 중심으로 한 가상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

 

그다음은 폴 비릴리오에 대한 분석이다. 그는 현재 매체를 중심으로 가장 엄격한 입장에서 매체 상황을 분석한다. 그는 전반적인 매체 상황에서 새로운 학문인 ‘질주학’을 제시하였다. 질주학은 속도를 매개로 한 일종의 정치사회 비판론이다. 속도를 중심으로 권력이 어떻게 이동하고, 또 매체를 소유한 자들이 어떻게 권력의 소유자가 되는지를 고찰하기 떄문이다. 비릴리오는 많은 사람이 속도에 대한 광기 어린 욕망을 품으며, 이를 실현하려 했으며, 실제로 실현되었다고 본다. 속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처음에 혼란스러워하지만, 내성이 생기게 되며, 결국 좀 더 빠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새로운 가치이자 척도가 된다.


속도가 모든 가치의 중심에 설 때, 출발점과 도착점만이 중요해진다. 이와 같은 속도에 대한 집착은 사적공간과 현실적인 공간의 경계마저 해체하고, 현실 공간의 소멸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현재가 되는 세상에서, 가까움은 의미를 잃고 인간의 실존은 위협당한다. 이와 같은 기술발달은 외눈 거인 키를로페스처럼 시각의 증가가 아니라 편협된 시선의 증가이다. 대상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된 시각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확대된 시각은 감시의 시각으로 이어진다. 거대한 판옵티콘이 사람들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 oo녀, oo남을 부르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릴리오는 최종적으로 외부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비판했다.

 

볼츠는 비릴리오와 다르게 낙관적인 견해를 밝힌다. 그는 낡은 매체의 패러다임에 갇혀 새로운 매체를 받아들일 마음도 없고, 새로운 매체의 특성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문맹인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디지털 매체의 확산과 예술의 문제를 연결해 디지털 매체의 확산이 결국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 주장했다. 볼츠는 작품 분석이 아니라, 각각의 수용자의 체험과 지각방식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해석과 관조를 기반으로 한 예술 이해 또는 미적 체험이 아니라 감각과 이미지의 스펙터클 그리고 몰입이다. 이처럼 볼츠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예술 개념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볼츠는 사회의식의 부재와 유희로써만 존재하는 예술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적절히 수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이론가는 괴츠 그로스클라우스다. 그의 이롬의 핵심은 시공간 재편의 문제다. 그가 문제 삼고 있는 시공간은 추상적이며 과학적인 시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시공간이자 일상적 시공간이다. 사회적 시공간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매체에 의해 사회적 시공간이 새롭게 재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시공간의 문제를 다룬 비릴리오와 달리 시공간의 ‘재편’만을 이야기했다. 그는 더 나아가 ‘매체공간’에 대한 분석을 한다. 이는 순수하게 매체로 인하여 성립된 공간으로, 일종의 사이버스페이스 또는 가상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로스클라우스는 이러한 매체 공간에 긍정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매체 공간인 사이버 스페이스는 이전 공간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하이브리드한 공간이기도 한다. 장르 간의 경계, 생산자와 수용자 간의 경계를 해체하고 이를 융합하는 하이브리드 공간을 그로스클라우스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나가며



아도르노, 비릴리오가 기술매체 시대로 인해 인류의 정신이 해체될 것이라 주장했지만, 그들의 주장이 중요한 이정표가 될지언정 우리 미래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믿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발생하고, 멈추지 않을 일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인간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지금까지 인류는 가치와 행복을 꿈꾸는 존재로서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우리가 근미래에 러다이트 장군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계를 부수더라도, 기술과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기술발달로 인한 매체의 발달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이미 매체 없이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도 아이패드로 글을 쓰면서,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보고, 최종적으로 노트북을 통해 맞춤법을 교정한다. 이 중 하나가 없었더라면, 이 글을 쓰는 과정이 더 더디고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스마트 기기가 흩어져있는 책상이 우리의 인지와 심리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걱정하게 된다. 필자가 몇 달 전 다루었던 ‘중독의 시대’라는 도서는 기술과 매체의 발달과 중독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 이미 어린아이들은 이제 책을 넘기지 않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와이프 한다.

 

PPT 사용이 자연스러운 오늘날, 줄글로 된 교과서는 점점 더 그 자리를 잃고 있다. 물론 어떤 시대건 분석적 사고의 가치는 유지되기에, 이들의 가치와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환경과 시대 정신은 변할 수 있다. 오늘 다룬 도서에서도 매체를 단순한 수단이 아닌, 인간 지각과 세계 지각의 매개체로 소개하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시대의 인류는 세분화나 분석 대신 확장에 더 익숙해질 것이다. 당장 유튜브에 올라오는 요약 영상을 보면 그러한 미래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도래할 문제들을 걱정한다 해서 세상이 변화를 멈추는 것도 아니고, 멈추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적응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필자가 도달한 대답은 바로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맥락은 좀 다를 수 있지만, 필자가 사랑하는 인지 발달심리학자 중 하나인 피아제의 기본 전제를 빌려 새로운 기술 매체 시대를 기대해보려 한다. 인간은 환경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생물이자 꼬마 과학자로서 적응하기 위해 그의 세계를 확장해나간다. 즉, 세계를 더 세분화시키고 확장할 가능성은 단순한 매체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닌 그와 상호작용하는 모든 인간의 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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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매체철학

 

저자

심혜련

 

정가

23000원

 

출판사

그린비

 

쪽수

344p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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