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억의 지속이 아닌 달리를 만나기 위하여 [시각예술]

영화, 애니메이션, 가구와 로고 디자인을 아우르는 무궁무진한 달리의 스펙트럼
글 입력 2020.04.15 17:1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당신의 머릿속에 살바도르 달리는 어떤 이미지로 표상될까? 많은 사람이 ‘달리’하면 곧바로 떠올리는 것은 아마 중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실리는 회화 작품,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나에게 달리는 <기억의 지속> 그 이상의 미술가는 아니었다. 독특함을 넘어서 의아함을 자아내는 회화들, 교과서에 기재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학생으로서 실격당하는 일이었으며 그건 미술 과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살바도르 달리를 그저 '영원히 불가해한 예술가' 중 하나로 치부하며 잊어버리는 것이 작품을 계속 접하면서 답을 찾지 못하는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 훨씬 안전한 선택이었다.

 

그러던 중 22살의 어느 여름날, 독일의 포츠담 플라츠에서 땀을 식히고자 방문한 달리 미술관에서 나는 뜻밖의 친밀감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그저 <기억의 지속>으로만 표상되기에는 무척이나 스펙트럼이 넓은 작업을, 그것도 꾸준하게 해왔던 사람. 교과서 밖을 넘어선 달리의 흔적들을 찾고 싶었다.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 1929)


 

 

 

1929년 스페인의 감독 루이스 부뉴엘과 살바도르 달리가 공동 작업한 초현실주의 영화이다. 루이스 부뉴엘, 시인 로르카, 달리와 함께 대학 시절 어울렸던 삼총사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종전 후가 으레 그렇듯이 유럽 사회 역시 허무주의와 냉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한 자장 속에서 기존의 관습, 합리주의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거부하며 출현한 것이 아방가르드였다. <안달루시아의 개>는 초현실주의 영화의 대표작이자 수작으로 꼽히지만 사실 부뉴엘은 역사적으로 아방가르드라 불렸던 사조에 정면으로 대항하고자 했다.


 

"아방가르드는 예술적 감성과 관객들의 이상만을 겨냥한 사조였지만, 달리와 나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어떠한 이미지도 배격하였다."


- 루이스 부뉴엘

   

 

"이 영화의 의도는 합리적으로 사고하려는 관객의 정신적 욕망을 부수는 것이다."


- 살바도르 달리

 

 

무수한 비평가들이 프로이트 심리학, 마르크스주의 등 여러 이론을 적용하며 영화를 분석하고자 했지만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무용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영화가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영화로 분류되는 것은 제작자들의 의사를 무시한 학계의 오만하기 그지없는 체계화 작업의 결과라기보다, 이미 경직되어버린 사조를 넘어서 ‘초월’, ‘새로움’, ‘유일과 영원에 대한 거부’ 등 본질적 의미에서의 아방가르드일 것이다.

 

 

131.jpg

 

 

데뷔작 <안달루시아의 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꿈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부뉴엘은 눈을 베어내는 꿈을 꾸었고 달리는 손에 개미가 득실대는 꿈을 어느 밤에 꾸었다. 달리는 이 두 개의 꿈을 섞어서 영화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영화를 감상했다면 알 수 있겠지만, 그 꿈의 한 줄짜리 단순한 내용이 이 영화를 주요 이미지이다. <안달루시아의 개>는 15분밖에 되지 않는 러닝 타임을 가진 단편 무성 영화지만 사실 끝까지 감상하기 쉬운 영화는 아니다.


꿈 내용을 그대로 묘사한 안구를 면도칼로 그어버리는 장면, 구멍 뚫린 손바닥에서 개미 떼가 줄지어 나오는 장면 등 도저히 플롯을 찾을 수 없는 다소 불쾌하고 과격한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혹여나 영화를 보고서 감이잡히지 않더라도 ‘내가 예술을 몰라서 이해를 못 하는 것인가?’ 하는 자책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안달루시아의 개>를 설명하는 것은 장면들의 목록을 짜는 것에 불과하다. (...) 장면과 장면을 설명해 줄 플롯이 없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이미지는 뭐가 됐건 하나도 채택되지 않았습니다."라는 부뉴엘의 당당한 발언을 참고하자면 그저 등장하는 이미지를 관조하는 것이 이 영화가 요구하는 가장 적극적인 관객의 태도이지 않을까 싶다. 

 

 

 

애니메이션 <데스티노> (Destino, 2003)


  

 

 

디즈니와 달리. 이름만으로도 많은 경험이 설명되는 두 존재의 합작이라니! 1945년 달리는 디즈니 스튜디오 애니메이터 존 헨치와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 대전 직후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역시 경제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을 완성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15초의 짧은 필름과 스케치만 남겨진 채로 프로젝트는 8개월 만에 끝나는 듯했다.

 

달리 사후, <환타지아 2000>을 제작하던 로이 디즈니는 프랑스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팀을 동원하여 다시 <데스티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시 94세였던 존 헨치의 자문을 받으며 원작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고자 노력을 기울인 결과 <데스티노>는 2003년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반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프로젝트가 완성된 셈이다.

 

많은 사람이 그간  편치 않은 기분으로 달리 작품을 봐왔을 것이다. 그러나 대사 대신 애니메이션을 이끄는 Dora Ruz의 벨벳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미풍을 타는 듯 힘을 뺀 인물의 동작들은 으레 달리하면 연상되는 긴장을 덜어준다. <데스티노>는 인간 여자‘달리아’와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달리는 제작 과정에서 “시간이라는 미로에서 생의 문제를 마법처럼 펼친 작품 (A magical display of the problem of life in the labyrinth of time)”이라고 설명했었다.


‘크로노스’를 만나기까지 달리의 초현실주의 회화 작품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듯 헤매는 달리아의 몸짓을 눈으로 좇아가는 동안은 이 애니메이션이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단번에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스크린을 마주하는 동안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달리의 작은 세계를 느끼고 있자면, 그 심오함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집중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6분이 아닐까.

 

 

 

츄파춥스(Chupa Chups) 로고


 


141.jpg

 

 

단돈 250원으로 소유할 수 있는 달콤한 기쁨, 막대 사탕 ‘츄파춥스’의 로고는 과연 독보적이다. 노란 데이지꽃 모양의 로고만 봐도 우리는 쉽게 이 작은 먹거리에 얽힌 따스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늘 괴기하고 기이한 작업만을 해왔던 것 같은 달리가 이 로고를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달리와 친구 사이였던 츄파춥스 사장 엔리크 베르나트는 1969년의 어느 날 달리와 커피를 한 잔 마시다가 자신의 사업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그 말을 듣고 달리가 앉은 자리에서 신문지 위에 그려낸 로고가, 현재 우리가 포장을 벗길 때마다 마주하는 샛노란 그 로고였다. 눈에 잘 띄도록 색은 원색에, 폰트는 두껍게, 포장할 때 주름지어져 로고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방지하도록 사탕의 윗면에 오도록 배치하라고 로고에 대한 세심한 조언까지 덧붙였다.

 


151.jpg


 

로고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츄파춥스는 전 세계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고 지금도 막대사탕의 대명사로 막대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달리의 작품이 어린 시절 동전 몇 푼으로 입에 달고 살았던 막대사탕에 꽃 피어 있었다니. 더 이상 잘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내 몸이지만, 얼마 전 무려 23년 만에 내 손목에 빨간 반점이 있었음을 발견하고 느꼈던 산뜻한 생경함과 맞물리는 앎의 순간이었다.

 

그 밖에도 달리는 알프레드 히치콕과 할리우드의 막스 형제와 협업하여 영화사에 잊지 못할 영향을 끼쳤으며, 아내 갈라 달리를 위하여 유명 레스토랑의 레시피 차용한 요리법들을 엮어 다소 에로틱한 요리책 '갈라의 만찬들(Les Diners de Gala)'을 내기도 했고, 사소하게는 과슈와 디지털 콜라주를 사용하여 타로 카드도 제작했다. 이러한 행보의 방점은 바로 스페인 북동부, 달리의 고향 피게레스에 위치한 ‘달리 극장 박물관’이 아닐까.


그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박물관에는 회화, 조각, 금속공예품, 가구에 이르기까지 1,4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혹자는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여러 주인공이 존 말코비치 몸에 들어가 그의 삶을 훔쳐 살았던 것처럼, 달리 박물관에 방문한 일이 머릿속에 들어가 그의 시작과 끝, 곧 ‘달리 자체’를 만나는 경험 같았다고 회고한다. 마치 달리가 외친 “Come into my brain!”처럼.

 

*

 

글을 준비하면서 여러 자료를 읽었지만, 미안하게도 달리는 나에게 아직 너무나 어려운 사람이다. 의외의 친밀감을 느꼈던 베를린의 달리 박물관에서도 사실, 그 친밀감을 훨씬 웃도는 수준의 혼란과 지난함을 겪어야 했었다. 달리의 한 마디가 그런 나에게 위로이자 혹은 용서로 다가왔다. "완벽하지 못한 걸 두려워하지 마. 어차피 죽을 때까지 도달하지 못할 테니까." 작품에 대한 완벽한 이해, 감상, 합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달리 작품을 대했던 모든 시간은 늘 나를 단죄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왔다. 그러나 누군가의 작품을 완벽히 이해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달리 본인이 완벽이라는 상태를 부정하는 와중에, 그의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것은 모순에 가까운 일이었다.

 

단순히 교과서를 벗어나서 달리의 흔적들을 찾고 싶었던 게 사실 이 글의 출발이었으나, 이제는 달리 특유의 불가해함, 그 한 가운데에 기꺼이 머물기로 용기를 낸 것이 이 글의 종착점이다. 엉뚱한 결론에 이른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애초에 교과서를 벗어나기로 한 의도 자체가 이 글의 종착점을 암시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교과서를 바탕으로 학생들의 풍부한 예술적 체험을 교육하는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일단 내 경험에 한하여 교과서는 늘 이해에 대한 강박이었으니까. 나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이 글이 작은 족쇄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그렇게 달리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호기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우제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