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더 깊은 우물 속에서 유목을 꿈꾸는 사람들 – 장벽의 시대 [도서]

경계의 구분 없이 만들어지는 정체성은 몽상에 불과한 것일까?
글 입력 2020.04.1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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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초연결 사회’, ‘지구촌’, ‘디지털 노마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이 키워드들은 모두 기술의 발달 속에서 시공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이상향을 그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계화와 온라인 공간의 확장이 이동가능성을 증가시키고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들면서 사람들은 물리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탈중심화된 세상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세계가 어디든 자유롭게 유랑하는 유목민의 삶의 환상에 젖어있는 것과 달리 우리는 현실 속에서 상상과는 모순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국제뉴스를 끊임 없이 전해 듣고 있다.


외부세계로부터 오는 정보를 차단하기 위한 방화벽을 세우는 중국, 국경에 ‘물리적으로 으리으리’하고 ‘오르기 불가능’한 장벽을 세우는 미국, 종교를 둘러싸고 팽팽히 대립하는 중동 지역 등 공간의 구획을 통해 정체성을 구분 짓고 경계를 허물지 못하도록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련의 현상들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와 그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공간을 좋아했다. 무리를 이루고, 수많은 외부자에 경계심을 느끼고, 인지된 위험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것이다. 우리는 생존만이 아니라 사회적 결속을 위해서도 중요한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집단 정체성을 발전시키는데, 이것은 종종 다른 집단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우리 집단은 자원을 위해 경쟁하지만 정체성 갈등의 요소도 있다. ‘우리와 그들’의 서사가 그것이다.


p. 11

 


인터넷의 발달이 인간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물리적인 환경은 여전히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내가 속한 장소는 단순히 지리적인 좌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이 어떤 장소에 머물고 있는지에 따라 관계를 맺고 있는 집단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적인 위치 감각이 달라지고 이렇게 구성된 정체성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속한 준거집단에 해당하는 ‘우리’와 타자로 분류되는 ‘그들’의 대립각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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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지평을 넓혀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과는 달리 파편화된 개인들은 통합과 연결 대신 분열과 갈등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분열은 필연적으로 소속감의 부재를 가져오고 자아를 규정할 수 있는 의미 체계를 갈망하도록 부추긴다. 결국 물리적 경계가 위태로워진 후에 찾아온 것은 자유의 시대가 아닌 ‘장벽의 시대’였다.
 
<장벽의 시대>의 저자 팀 마샬은 저널리스트로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장벽’을 둘러싼 갈등을 다룬다. 그는 ‘장벽’이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분리를 통해 보호와 통합의 기능을 상징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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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사례인 중국은 만리장성을 통해 수 세기에 걸쳐 세계를 중국과 비중국으로 나누는 ‘우리와 그들’의 전형적인 상징을 개발해냈다. 한족이 거주하는 중국의 중심 지역과 평야의 유목 민족을 구분하고 각각 문명과 야만으로 규정 지은 이 ‘장벽’은 중국이 세계의 문화적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의 신념을 나타낸다.
 
또한 중국은 인터넷 시대 속에서 중앙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리방화벽’을 이용해 정보의 흐름을 감시한다. 이 방화벽은 민주주의 등 외부의 관념을 차단해 중국인을 보호하고 사람들이 집단을 조직하지 못하도록 분열시키는 역할을 한다. 통합의 목적을 위해 분리의 전략을 택함으로써 교차적인 이해관계가 실현될 수 없도록 억압하고 검열한다.
 
이렇게 중국은 외부와 내부에 세운 장벽으로 중화주의와 지도부의 권력을 유지한다.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할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을 확신했을 때 비로소 전국의 내부 장벽을 무너뜨렸다. 20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지도부의 권력, 그리고 한족과 나라의 통일은 여전히 우선순위이다. 그 통일이 중국을 나머지 세계로부터 분리하고 그 자신을 분열시키는 디지털 장벽을 통해서 달성된다고 해도 말이다.


p.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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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중국과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미국에서도 ‘장벽’의 전략은 유효하게 작동한다. 트럼프의 보수 정책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가르는 으리으리하고 거대한 장벽을 건설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는다. 이때의 장벽은 단지 물리적 장애물일 뿐만 아니라 미국인과 비미국인을 가르고 미국을 침범하고 ‘미국적’인 문화를 약화시키는 타자성을 차단하고자 하는 결의를 상징한다.
 
미국 내부에 존재하는 분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적인 것’을 정의내리고 ‘우리’와 ‘그들’ 간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장벽을 건설해 외부에 맞서 응집하도록 만드는 미국의 보수 정책은 중국과 정반대의 방법을 택하고 있더라도 동일한 목적을 겨냥한다. 외부를 향한 적대감과 내부의 극단주의를 이용해 막강한 미국으로서의 입지를 보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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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은 ‘보호’라는 명분 하에 더 높고 위협적으로 세워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벽의 근처에서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장벽 자체가 갈등의 근원이므로 모든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극복되지 않은 분열을 상징하는 장벽의 문제는 그 원인인 불평등에 관한 합의 없이 해결될 수 없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타협’을 통해 모든 개인에게 가치를 공유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을 보호할 건강한 울타리가 생긴다면 공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고 주장한다.

*

현대 사회가 꿈꾸는 시공간의 구분 없이 평평한 디지털 유목민의 시대는 ‘우리’의 정체성이 ‘타자가 아닌 것’으로 구별되는 장벽의 논리를 극복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가 전 세계의 수많은 갈등을 목격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타협’이 가진 힘에 희망을 거는 것처럼 나 역시 이해와 합의를 통해 장벽을 극복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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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의 시대

- 장벽, 나누고 가르고 가두다 -

 


지은이

팀 마샬

 

옮긴이 : 이병철


출판사 : 바다출판사


분야

인문 교양

사회학일반


규격

152x224mm


쪽 수 : 360쪽


발행일

2020년 03월 20일


정가 : 16,500원


ISBN

979-11-89932-49-7 (03900)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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