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간의 민낯을 본다면 - 스켑틱 Vol.21: 코로나19와 질병X의 시대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글 입력 2020.04.0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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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를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없다. 뉴스를 통해 마주하는 디스토피아적 상황들은 일시적으로 심각성을 확인시켜줄 뿐 그 자체로 나에게 타격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 패닉 상태를 어찌 보면 관조적 태도로 바라보며 그저 지금이 빠르게 지나쳐가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다면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사람들에게, 2019년 판데믹 상태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언젠가는 종결될 하나의 사건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현 상황이 우리 인간에게 던지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안타깝게도 21세기에 들어서 신종 바이러스는 주기적으로 인류를 위협해오고 있다. 인류사를 통틀어 다른 원인에 의한 사망을 모두 합한 것보다 감염병에 의한 사망이 더 많다고 하니 기생충과 인간 숙주의 끈질긴 동거가 새삼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인한 홍역은 어쩌면 끝없이 지속될 수도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인간의 추한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이번 사태를 통해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인간에 대한 혐오와 갈등으로 파열하는 것을 목격했듯이 말이다. 앞으로 인간에게 도래할 또 다른 사건들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혐오, 파괴, 경멸의 갈등적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서로에 대한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되찾으려 한다. 누군가는 현재의 위기를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 격려한다. 마치 인간이 본래 갖고 있던 박애주의적 공동체 감각이 회복되기라도 하듯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해야겠다. 현실 속 공포와 불안, 혼돈을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각자도생의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인간의 합리적 이성의 결과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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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다'라는 격려가 어떤 효용을 가질까? 피 터지는 현장 바깥에서 외치는 공동체니, 연대니 하는 말은 순진한 사람들의 속 편한 담론에 불과할 수도 있다. 물론 진심에서 우러나온 인간의 협력적 이타주의를 매도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단지 현재의 사태를 희망적인 키워드 몇 가지로 마무리하는 태도를 버리고 싶을 뿐이다. 오히려 인간이 이번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우리가 스스로 진보의 길을 걷는지 혹은 퇴보적 상태에 전착한 것인지 질문해봐야 할 것이다.

 

<스켑틱Skeptic>은 다양한 과학적 담론을 바탕으로 실재적 현상에 대한 건전한 회의주의적 관점을 모색한다. 우리 눈앞에 놓인 '사실'들과 관련한 사상을 검증함으로써 보다 비판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모든 사실에 대해서 다소 불편한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확장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번 호는 '코로나19와 질병 X의 시대'를 주제로 바이러스 전염병을 둘러싼 구체적 논의와 과학적 견해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우리가 평소에 다루지 못했던 통찰을 통해 코로나 사태의 현상을 넘어서 인간에 대한 보다 폭넓은 관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염병은 왜 혐오를 일으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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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gin akyurt

 


인간에게는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 방어기제가 있다. 진화적 생태 환경에 있어 인간은 자연적으로 역겨움을 배척하도록 설계된 것이다.(연구에 의하면 역겨움은 더러운 음식에 대한 반응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문제는 방어를 위한 경계적 행동이 혐오와 공포의 감정으로 전이되고, 특정 대상에 대한 폭력과 차별로 확대된다는 것에 있다. 감정은 언제나 연쇄적으로 작동하며 더 크게 확산되기에 방어적 감정이 역으로 우리를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렇다면 전염병과 '혐오'의 감정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인간이나 침팬지뿐 아니라, 원시적인 동물도 감염 가능성이 있는 대상을 피하는 행동 반응을 보인다. … 감염 가능성에 대해 인간은 행동 도메인에서는 회피를 보이고, 감정 도메인에서는 역겨움을 보인다. 역겨움은 인간의 여섯 가지 기본 감정 중 하나다. 이른바 '혐오'의 감정이다.

 

<전염병은 왜 혐오를 일으키는가 - 박한선>


 

인간은 혐오에 있어서 다른 동물보다 탁월하게 진화했다. 신석기 이후 감염병이 급증하면서 문화적 장치와 더불어 본능적 혐오가 사회적 혐오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사회적 낙인과 편견은 인간 행동 면역계에 수 천년을 걸쳐 고착화되었다. 어떠한 대상에 대한 감염 가능성 혹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위험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도 혐오의 감정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외부에 대한 경계와 보수적 행동 전략이 감염 확산을 막는 데 효과적으로 작동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행동 전략을 현대 사회에서 지속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국경을 폐쇄하고 세계화를 역행하며 서로를 탄압하고 제재하는 것이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방성이 낮아지게 되면 집단주의와 민족주의가 득세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들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는 현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초연결성'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돌이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본성의 합리적 천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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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끊임없이 인간이라는 종을 위협하는 다양한 사건들을 내놓는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지구의 또 다른 생명체들을 파괴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런 과정 속에서 불신과 부정이 팽배하고 비이성적 행동이 판을 친다. 이처럼 인간들은  '탈진실'에 기반하는 구제불능적 행위를 반복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존재인 것인가? 이에 대해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 Steven Pinker는 이성과 합리성이 어떻게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왔는지에 대해 역설한다.

 

 

우리가 탈진실이라는 상투어에서 벗어나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유해할 뿐만 아니라, 자기 충족적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우리가 이성과 진실을 당연한 듯이 포기하고, 악당들의 거짓말과 협박에 우리도 거짓말과 협박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나은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탈진실을 넘어 사실의 세계를 향하여 - 스티븐 핑커>

 


스티븐 핑커는 인간의 비합리성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추론과 회의주의와 같은 이성적 능력 또한 우리의 진화적 본성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에게 합리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 중 하나가 합리성의 역설인 '다수의 무지 pluralistic ignorance'로 나타난다. 사회적으로 집단의 무지가 개인에게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집단적 무지가 선제공격, 자기강화 비난, 때로는 마녀사냥과 같은 '기이한 대중적 망상과 집단 광기'의 연쇄 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어렴풋이 드러난 집단적 광기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적 방해물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 본성의 합리적 천사'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인간은 합리적 능력을 이용하고 비합리성을 최대한 배제하는 규범을 따름으로써 집단적 합리성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의 무지와 선동이라는 혼탁함 속에서 진실을 건지기 위한 메커니즘과 제도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나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꽤 많은 사람들에게 특정 국가에 대한 지나친 편견과 혐오의 감정이 뿌리 깊게 존재한다고 느꼈다. 그것이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인종 집단에 대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한다. 집단적 망상을 끝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 본성의 합리성을 촉진하는 규범과 제도에서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한 극단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는 보다 온건한 관점을 가지기 위해 진실에 대해 더 많이 토론하고 변화를 위한 용기를 내야 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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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ut carniollus

 


이번 <스켑틱> 21호에서 다뤘던 내용 중 가장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바로 FOCUS '신 존재 논쟁'에 관한 글이었다. '신은 악과 공존 가능한가'라는 타이틀로 무신론자와 신학자 간의 논쟁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과학 잡지에서 '신'에 관해 논했다는 사실부터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신은 결코 증명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관점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끔찍한 폭력과 희생이 점철되는 현실 속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이 꾸준히 도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온갖 끔찍한 온상들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 폭력적 세계를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애로운 신이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정의하는 신이 최상의 '선' 그 자체라면 이러한 끔찍한 상황들은 일어나지 않았어야만 했다. 이처럼 '악'으로 점철된 세상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신론자의 대표적 입장이며, 신을 인간의 기준에서 '도덕적 존재'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유신론자의 입장이다.

 


우리는 완전한 선(善)을 생각할 때, 우리가 가진 존경, 숭배, 사랑 때문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즉, 우리는 '신-반대파 anti-God' 대신 '신-옹호파 pro-God'의 입장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끔찍한 우리 세계를 창조한 책임으로부터 이 경이로운 존재를 떨어뜨려 놓고 싶기 때문이다.


<자애로운 신이 폭력적인 세계를 창조했을까 - J.L 셸런버그>


 

신을 '도덕적 존재'로 바라볼 수 있느냐 없느냐. 일반적으로 신에 대해 인간이 가지는 이미지는 완전한 선에 관한 것이다. 'God is Good'. 그치만 신이 정말 선 그 자체라면 우리가 마주하는 고통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만약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우리가 끝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 할 운명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신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어쨌거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들이다.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땅에 살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도덕적으로 진화한다 하더라도 신의 존재에 대한 해답은 명확해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할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대로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신을 증명할 수 없는 과학의 한계에 아쉬워할 것이다. 결국 인간의 과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얼마나 무기력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하고 소중한 능력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실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의 과학은 아직 원시적이고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보물이기도 하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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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cKenna Phillips

 


어쩌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소크라테스도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겠는가. 인간이 인지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라 할지라도, 나는 인간의 민낯이 더 나은 상태로 진화할 것이라 믿는다. 물론 더 나은 상태라는 개념은 모호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선'과 '악'으로 나눠서 설명할 필요는 없다. 우리 안에 천사와 악마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의 속성을 좀 더 낙관적으로 희망하고 싶다.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이기 때문이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한국 스켑틱 21호
- Skeptic Vol.21 -


엮음 : 스켑틱 협회 편집부

출간 : 바다출판사

분야
기초과학/교양과학

규격
170x250mm

쪽 수 : 268쪽

발행일
2020년 03월 06일

정가 : 15,000원

ISBN
977-2383-9840-00-01
 

 


 

 

[김지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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