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채식, 그 어려운 이름 - 채식주의자 [도서]

글 입력 2020.04.05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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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굉장히 그로테스틱한 소설. <채식주의자>를 다 읽고 처음 들었던 생각이다. 이런 소설은 처음인지라 소설을 읽은 직후에는 어두운 분위기만 받았을 뿐 작가가 무엇을 전하려 이 책을 썼는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책을 읽던 와중에도 채식주의자 책은 문뜩문뜩 떠올랐고 그러면서 나는 소설 속 기억나는 부분들을 다시 생각해보곤 했다.

 

 

 

그 시작, 그리고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 p.9

 


소설은 지극히 평범한 아내를 둔 남편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아내는 특별히 잘난 점도 없지만 모난 점도 없어 평범한, 즉 사회의 기준에 있어 표준선에 놓여있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이 부부는 결혼 이후 별 탈 없이 잘 살아왔다. 아내가 그 어떤 꿈을 꾸기 전까지는.


 

하지만 난 무서웠어.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ⵈⵈ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 p.19

 


아내는 어느 날 꿈을 꾸고 그 이후 갑작스레 고기를 끊는다. 일상 속에서의 그 어떤 동기도 없이, 서서히 줄여가는 것도 아니라 한 번에, 그 모든 고기를. 심지어 유제품과 계란까지.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은 삶이 점차 피곤하고 불편해진다. 남편이 원했던 것은 평범한 일상이지 유별난 아내를 뒤치다꺼리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자신에게 따라오는 책임과 시간들에 불만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남편만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채식만을 고집하는 영혜를 영혜의 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혐오적인 눈빛으로 바라본다.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에, 사회적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는 비정상적이라는 시선만을 보내며 적대감을 표출한다.

 

가부장적인 장인어른, 즉 영혜의 아버지는 그런 영혜에게 강압적으로라도 고기를 먹이려 하고 끝까지 입을 벌리려 하지 않는 그녀에게 결국은 폭력을 행사한다. 더욱이 이를 지켜보던 가족들은 장인어른의 폭력을 말리지 못했으며, 아니 않았으며 그 폭력에 암묵적으로는 동의를 표한다. 장인어른은 영혜의 신체에 직접적인 폭력을 행했지만 그 외 모든 사람들의 질책, 염려를 가장한 혐오, 자신과 다름은 거부하리라는 명백한 거절 그 모든 것들도 가면을 쓴 또 하나의 폭력으로 보인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 없이 자신과 다른 것은 곧바로 거부하려 하는, 사회적으로 정해진 것만을 강요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영혜는 위태롭게 서 있고 이런 영혜를 바라보는 우리도 이에 따라 날카롭게 휘둘린다. 때론 영혜의 상황에 놓이기도, 때론 그들처럼 누군가를 향해 거부를 표하기도 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


중간중간 비치는 꿈을 통해 우리는 영혜가 채식을 고집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숲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 날고기의 촉감에 충격받은 그녀의 모습, 요리를 하던 중 남편의 재촉으로 아내는 손을 다치고 남편은 음식을 먹다 칼조각을 씹을 뻔하지만 이를 보며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 누군가 죽는 꿈을 꾸며 끔찍해하고 이를 요리를 위해 고기를 칼질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모습, 어렸을 적 그녀를 문 강아지가 오토바이에 묶인 채로 동네를 일곱 바퀴 달리다 죽고 마을에선 잔치가 열리던 모습 등.


영혜는 상처 입었다. 상처 입은 사람은 두 가지 행동을 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거나, 자신을 죽여가거나. 그리고 그녀는 후자를 선택했다. 어릴 때부터 줄곧 아버지의 엄격함과 강압적인 사고, 더러는 폭력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며 자기 존재를 부정당했고, 결혼한 이후에는 폭력은 아니지만 남편에게 사랑도 이해도 존중도 받지 못하였던 영혜는 존중받지 못한 시간, 진정한 사랑의 결여 등으로 쌓여온 모든 것들에 대한 이상신호를, 불유쾌함을 그녀는 꿈으로 인해 전복된 의식의 전환으로 표출해낸 것이 아닐까. 사람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대 죽어간다. 남편도, 가족도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려 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 그녀를 들여다보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약육강식이 팽배한 동물의 세계와 같은 사회에서 그녀는 그 누구도 관용할 의지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단호히 육식을 단절하고, 철저히 식물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폭력과 단절하고자 영혜가 식물화되어가는 과정이 평화적이지만은 않다. 고기를 거부함에 자연친화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고 그녀는 어느 것과의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며 오직 직관만을 따른다. 그리고 그 직관을 따라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긋고 형부와 해서는 안 될 짓까지 이행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며 주변인들에게 직간접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나무 불꽃



소설은 3부에 걸쳐 영혜의 모습을 그려나가지만 작가는 영혜에 있어서 그 어떤 인물보다 냉정하도록 비설명적이다. 책을 읽어갈수록 영혜의 시점이 너무나도 궁금해지지만 작가는 끝까지 이를 우리에게 노출시켜주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읽어 내려갈수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는 영혜를 그려오고 제목도 영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작가가 정말 전하고 싶은 건 영혜의 언니인 인혜를 통해 나오는 게 아닐까.


3부 나무 불꽃에서는 인혜가 영혜를 생각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그 섬세함이 극에 달한다. 영혜는 약육강식인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나 식물이 되고자 하지만 인혜는 그러지 못한다. 속이 뭉그러지고 썩어가면서도 자식인 지우를 생각하며 버텨내곤 하는데 병든 동물로 보이는 그 모습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ⵈⵈ미친 거니, 너 정말 미친 거야.

지난 수년 동안 자신이 결코 믿을 수 없었던 그 질문을, 그녀는 처음으로 영혜에게 던진다.

ⵈⵈ네가 정말 미친 거니.

그녀는 알지 못할 두려움을 느끼며 동생으로부터 주춤 물러나 앉는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병실의 정적이 물먹은 솜처럼 그녀의 귀를 틀어막는다.

어쩌면ⵈⵈ

침묵을 개고 그녀는 중얼거린다.

ⵈⵈ생각보다 간단한 건지도 몰라.

그녀는 망설이며 잠시 말을 끊는다.

미친다는 건, 그러니까ⵈⵈ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 p.203

 


그리고 인혜는 자신이 식물이라 생각하며 죽어가는 영헤를 보살피고 지켜보면서 그녀를 점차 이해하게 된다. 인혜와 영혜는 같은 상처를 가졌다. 단지 영혜가 더 빨리 이를 깨닫고 표출했을 뿐이고, 인혜는 계속 참아오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영혜가 채식을 결심하기 전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영혜에 대해 철저히 비설명적인 태도를 지켜온 이유는 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혜를 통해 인혜를 바라보도록.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영혜와 인혜만이 이름을 갖는 이유도 이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하게 추측해본다.


하지만 영혜와 인혜는 다르고, 지우를 생각하며 인내하는 인혜가 끝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인혜에 우리가 투영되어 보이기도 한다. 우리도 인혜처럼 병들었음에도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질척지게도 버텨가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찬란할지도.


 

파괴적인 열정에 부딪쳐 깨져버린 이들이 숭고한 예술작품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인내의 근육을 가다듬으며 일상의 곡예를 아슬아슬하게 연마한 그녀의 삶이 감히,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또 어디 있겠는가. 욕망을 감추는 데 들이는 에너지는 욕망의 나신을 드러내는 데 들이는 에너지보다 훨씬 더 막대할 것이다.


- p.238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작가의 말까지 포함하더라도 247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어 그리 길지만은 않은 소설이다. 하지만 길지 않은 소설을 읽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수많은 것들을 들어내고 생각해보도록 이끈다. 우리는 과연 영혜일까, 인혜일까 혹은 다른 무엇일까. 이 책을 통해 작가가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기에는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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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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