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환상시(詩), 시대의 섬뜩한 거울 [문학]

글 입력 2020.04.0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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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체액을 빨아먹는 아이

그 여자의 미소를 찢어먹는 아이

그 여자의 뼈를 발라먹는 아이

그 여자의 눈을 사탕 막대기에 꽂는 아이

그 여자의 뇌에 불을 지르는 아이

불 지르며 불 지르며 무럭무럭 크는 아이

여자의 배꼽에 호스를 끼우는 아이

여자 몸에서 하나씩 플러그를 뽑는 아이 


– 이민하, 「배꼽 – 관계에 대한 고집」 중에서

 


시(詩)의 전통적인 서정성으로부터 보란 듯 탈주하여 정반대의 정서로 거칠게 내달리는 극단의 시.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즉흥적이고 즉각적인 표현과 어법. 낯설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불편하고 난감하다. 공포영화를 보듯 온몸에 긴장감이 감도는 동안, 어느새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환상시'의 등장, 그리고 '미래파 논쟁'


현대사회로 진입한 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소통의 방법과 과정은 점점 더 간소화되었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은 쉬워졌으며, 그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휴대폰과 무선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관계를 맺고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곧바로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에 빠르게 침투했고, 현재의 우리는 효율과 쓸모를 따지는 일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기계를 통한 소통은 다른 측면의 억압을 초래했다. 편리성에 이바지하지 못할 것들은 배제당해도 마땅하다는 사회 분위기와 구조, 이는 곧 모두에게 획일화된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강요했고 많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억압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기계로 맺은 관계는 언제 단절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항시 동반했다. ‘물질을 매개체로 한 관계’의 다른 이름은 ‘물질 없이는 단절될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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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2000년 이후의 한국문학도 새 국면으로 진입했다. 특히 낯선 어법, 탈장르, 환상성으로 무장한 젊은 시인들이 한국 시단에 잇따라 등장하면서 2000년대 중반엔 이른바 ‘미래파 논쟁’이 일었는데,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 또는 ‘실속 없는 언어유희’라는 엇갈린 평가가 오갔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한국 시단에 낯선 어법과 새로운 상상력이 등장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미래파’는 ‘길고 낯설고 섬뜩한 시를 생산하는 요즘 시인들’을 뜻하는 말 정도로 쓰이기 시작했다.

‘미래파’는 2005년 평론가 권혁웅이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 경향을 진단하며 사용한 단어다. 일각에서는 모호한 경계와 정치성을 띤 파벌 형성 등을 이유로 ‘미래파’라는 명명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필자는 이글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환상시’와 ‘미래파’의 용어로 명명한다.
 
 

「고등어 부인의 윙크」로 읽는 볼링공의 언어


현대사회에서 개개인의 다양한 욕망과 가치들은, 기성세대의 질서와 체계로부터 자주 ‘지움’ 당해왔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익숙해지기 위한 교육 또한 끊임없이 받았다. 그러나 라캉학파의 정신분석가인 브루스 핑크(Bruce Fink)에 따르면 ‘억압은 그 원동력이 무엇이건 간에, ··· (중략) ··· 한때 마음에 스쳤던 지각이나 사고의 기록을 따로 분리해 내는 것이다. 폐제(foreclosure)와 달리 억압(repression)은 지각이나 사고를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는다(「라캉과 정신의학」197)’.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의식에서 지워진 다양한 욕망은 결국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라는 것이다. 또한 프로이트는, 본래 내 것이었던 욕망들이 억압되었다 무의식을 통해 다시 회귀하고 환기될 때, 일종의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한다. 정확히는 공포감의 특이 변종인 ‘두려움’과 ‘낯설음’.

환상시는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오는 무의식의 환상을 포착하고, 두려움과 낯설음을 구체화시키는 미학적 기교로 ‘그로테스크’를 차용하여 질서와 체계로부터 억압되어왔던 다양한 욕망을 거침없이 발설한다. 그 언어엔 윤리적인 잣대나 시적인 것에 대한 어떠한 강박도 작용하지 않는다.
 


달콤 쌉싸래한 시럼, 붉은 고 촛농에 젖어 살빛 카스텔라는 꼼팡 난 매트리스로 푹 번져가는데 그 위로 삐걱, 삐걱 소리를 내며 꿈틀, 꿈틀거리는 이봐요 고등어 부인 씨······ 그녀는 한창 자위중이었다.


대지의 손을 빌려 뜨거운 혀와 같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속속곳 속곳 속에 물살을 일으키는 그녀, 출렁출렁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를 이불처럼 덮어쓰고도 푸들푸들 살 떨어대는 그녀. 그녀가 내게 윙크하는데 새까만 그녀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 오더니 가속도가 붙은 볼링공처럼 삽시간에 날 쓰러뜨리며 말했다. 너 하고 싶지? 에이 하고 싶으면서 뭘. 아뇨, 나는 아냣. 순간 나는 하이힐 벗어 그녀의 양쪽 뺨을 후려찍고 말았다. 거짓말! 분명 넌 하고 싶은 거야! 이런 씨발, 아니, 아니라잖아. 참다못한 내가 그녀의 알주머니를 싹둑싹둑 가위질하자 김말이 속 당면처럼 빼곡이 들어참 그녀들이 잘린 입 밖으로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이봐 고등어 부인 씨, 난 단지 갑갑증이 나서 살짝 따고플 뿐이라고!


나는 브래지어를 벗어던졌다. 나는 팬티도 벗어던졌다. 나는 콘택트렌즈와 치아교정기에 인조 속눈썹까지 자꾸만 벗고 또 벗어던졌다.


- 김민정, 「고등어 부인의 윙크」 중에서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性)’을 교묘히 금기시해왔다. 성적 욕망의 ‘표출’ 자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되어왔는데, 그중에서도 여성의 성적 욕망은 표출 이전에, 그 존재 자체가 대부분 지워져 왔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남성의 성적 욕망에 비해 여성의 성적 욕망은 사회문화적 분위기에 의해 대개 자의적으로 또 타의적으로 암묵적인 검열의 대상이었다.

시인은 이처럼 금기시되어왔던 여성 육체의 욕망을 검열과 축약 없이 직설적으로 발설하고, 이로써 여성에 대한 억압을 전복시킨다. 역동적으로 묘사된 자위행위의 주체인 고등어 부인과,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 나열된 물리적인 억압물(브래지어, 팬티, 콘택트렌즈, 치아교정기, 인조속눈썹)을 자꾸만 벗고 또 벗어던지는 화자, 이들이 행동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난 단지 갑갑증이 나서 살짝 따고플 뿐이라고!’.

두 인물의 구도 또한 흥미롭다. 고등어 부인은 화자에게 ‘너 하고 싶지?’라는 직설적인 물음을 던지고, 화자는 강하게 부인하며 하이힐로 고등어 부인의 뺨을 후려 찍고 그녀의 알주머니를 가위질하는 등 극단적이고 난폭한 대응을 행한다. 이와 같은 화자 내면의 공격성은, 억압으로부터 해소되지 못한 성적 욕망과 이를 인정할 수도 감출 수도 없는 내면의 갈등으로부터 기인된 불안감이 함께 표출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두 인물이 주고받는 폭발적인 형태의 대화, 그리고 멈출 새 없이 내달리는 그들의 즉흥적 행위들은 곧 볼링공의 언어가 되어 독자에게 돌진한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너 하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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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환상시와 미래파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고, 젊은 시인들의 낯선 시 형식과 어법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도 존재한다. 하지만 기존의 전통성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배제하기보다, 이러한 변화가 한 개인만의 ‘특이한' 형식이 아닌 집단적인 변화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더 나은 문화예술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으로 다양성을 수용하고 진지한 논의를 해나가려는 자세가 바람직하지 않을까.

김민정 시인의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의 시인의 말이 떠오르는 밤이다.  ‘내가 맘껏 뜯어먹을 수 있게 나를 구워준 나의 오븐이자 빵이며 우물거리는 입인 아빠 엄마, 당신들 덕분에 이리 배부른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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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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