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평범한 나는 그래도, 쓴다 : 뮤지컬 '최후진술'

글 입력 2020.04.0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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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후진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그래도’의 이야기



“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때론 비겁하고 자주 평범하다. 그래도 위대하다. 뮤지컬 <최후진술>이 내세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야기다. 이 뮤지컬은 오늘날 ‘근대 과학의 아버지’ '과학 혁명의 주도자' 등으로 수식되는 역사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지만, 위와 같은 후대의 평가와는 접근을 달리한다. 업적의 특별함보단 인간적 평범함을 선행시킨 것이다. ‘그래도’ 전후 문장의 선후 관계는 그래서 중요하다. 위대한 ‘영웅’이지만 ‘그래도’ 비겁하고 평범한 게 아니다. 비겁하고 평범했던 ‘인간’이지만 ‘그래도’ 위대하다. <최후진술>은 이 명제로 시작하고 끝나는 작품이다.


모든 이야기가 인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할 때, 갈릴레이의 평범함이 닿는 곳은 ‘진실을 향한 낭만적 진심’이다. <최후진술> 속 갈릴레이는 뭇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자본과 권력 앞에선 작아지고 죽고 싶지 않아 진실을 외면한 인물이다. 이 인물이 마주한 세계는 진실을 부정해야 안온하게 살 수 있는 곳, 뮤지컬은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가 자신의 진실인 지동설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사후세계 마지막 재판에서 신을 향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외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진실을 외면하는 갈릴레이로 시작해 진실을 지키는 갈릴레이로 끝나는, 그 변화가 작품의 몸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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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건, 그가 사후 재판을 받기 전 만나게 되는 모든 인물이다. 등장이 뜬금없다고 느낄 수도, 그들이 퍼붓는 말들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잘 살펴보면 모두 갈릴레이 내면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과 발화다. 갈릴레이보다 먼저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와는 서로의 비겁함을 묻고, 천동설을 주장했던 고대 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진실을 쓰는 것의 한계를 말한다.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브루노의 용감함은 갈릴레이의 죄책감을 추동하고, 갈릴레이의 원고를 수정하길 거부했던 밀턴은 후에 갈릴레이와 유사한 길을 걷게 되는 식이다. 그리고 인도자 윌리엄 셰익스피어(이하 공연 표기에 따라 윌리엄)는 갈릴레이와 함께, 진실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결국은 그가 진실을 지키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여정이 끝난 후, 갈릴레이는 신 앞에 서서 마지막 재판을 받는다. 그는 그 순간까지 고뇌하지만 '진실이 중요한 것'이라는 윌리엄의 날카로운 증언 뒤에, 끝내 신 앞에서 진실을 목놓아 외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라고. 자신이 사랑했던 것, 그래서 깊이 알기 위해 노력했던 그 진실을 말이다. 그 순간에도 갈릴레이는 불안해하고, 누군가를 질투하고, 잊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졌노라고 고백한다. 이 평범한 사람이, 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던 세계 앞에서 '그래도' 진실을 지키길 선택하는 이야기. <최후진술> 속 갈릴레이의 위대함은 이 평범함과 ‘그래도’에서 연원한다.


 

 

2. ‘작가’의 이야기


 

얼핏 보면 전형적인 플롯 같지만, <최후진술>은 우리가 실존 인물 뮤지컬에 기대하는 일반적인 공기를 비켜나간다. "1564년생 월드 스타"라는 공통점이 있는 윌리엄이 그를 인도하는 사자(使者)로 등장하는 것이나, 시대성이 소거된 재기발랄한 가사, 진지함과 엉뚱함을 오가는 상황 등이 그렇다. '말도 안 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엔 의외의(?) 고증과 예술·진실에 대한 다층위의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윌리엄의 이야기를 갈릴레이와 엮으며, <최후진술>은 ‘작가의 이야기’라는 심층을 서사 내에 깔게 된다. <최후진술>은 진실을 끌어안는 갈릴레이의 여정에, 윌리엄의 작품 속 진실에 응답하는 주인공의 역할을 부여하고, 더 넓게는 자신이 쓴 진실 앞에서 떳떳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을 덧입힌다. 그래서 가사 일반에는 작가로서의 고민이 담겨 있는데, 그것들은 근대 과학의 아버지, 영국의 대문호라 불리는 위대한 영웅들을 한 인간이자 작가로 돌려놓는 데 큰 공헌을 한다.


예컨대, 자신이 찾은 진실이 틀릴 줄 몰랐던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런데 이렇게 죽어서 딱 보니까 세상에 내 말이 완전히 틀린 거야. 하지만 난 이미 죽었어. 어쩌겠어. 이게 참 민망해.”라고 노래한다(이렇게 직설적으로 민망해하는 프톨레마이오스라니!). 그리고 갈릴레이와 프톨레마이오스는 “여러분, 제발 책 쓰지 마세요. 제멋에 겨워서 함부로 책 쓰면 무식의 증거가 영원히 남아요”라며 진실 추구의 시대적 한계와 글 쓰는 일의 위험함을 자조적으로 읊는다. 밀턴의 노래는 또 어떠한가. “이걸 어떻게 고쳐요, 누가 맘대로 고쳐요.”라는 가사는 작가 고유의 경험과 색깔을 마음대로 해치는 데에 대한 비판적 어조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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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갈릴레이가 진실을 최후진술을 하는 여정은 작가 갈릴레이가 책 속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 여정이기도 하다. 뮤지컬 속 갈릴레이는 『대화』의 속편을 써서 지동설을 철회하고 천동설을 지지하겠다는 다짐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은 그 원고를 흩뿌리는 것으로 결말 지어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갈릴레이를 서사 속 주인공으로 바라보는 작가 윌리엄이 하나의 이야기를 완결하는 여정으로도 해석된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작가로서 진실한 글을 쓴다는 건 과연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느낀다.


진실을 추구하는 건, 때론 “한심한” 부모, “끔찍한” 친구가 되는 일일 수 있다. “무식의 증거가 영원히 남”기 때문에 “죽어서 딱” 보면 “민망”한 일일 수도 있다. 아니면 신과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되어야 하는 일일 수도 있다. 종교, 사회 같은 거대 담론을 제하고라도, 어느 시대 작가라도,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소박하고 진실된 고민이 위대한 저서를 남긴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입으로 전달된다.

 

하지만 '그래도' 윌리엄는 망자에게 관여하지 말라는 규율을 어기고 자신의 서사 속 주인공에게 진실한 방향을 안내한다. 그리고 갈릴레이는 ‘그래도’ 진실을 지키며 결국 천국과 지옥,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 밤하늘 별로 빛난다. <최후진술>은 두 작가를 통해 '그래도' 글을 쓰고 진실을 추구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낭만화한다. 있어 보이는 대사를 굳이 발화하지 않아도, 작가 갈릴레이와 윌리엄이 누구보다 위대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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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연’의 이야기


 

역사 속 인물, 저명한 기록을 남긴 명사들을 데리고서, 그들의 신념과 그들이 좇은 진실을 마냥 엄숙하지 않게, 그러나 진실하게 들려주는 힘은 뮤지컬 <최후진술>만의 특별한 자리를 만든다. 어쩌면 B급과 주류, 그 어드메에 있는 듯한 외피를 보면서, 예상했던 분위기가 아니라 실망할 수도 있겠다(내가 그러했듯). 하지만 그 아래에서 숨 쉬는 메타적이고 은유적인 이야기를 깨닫게 된다면 이 작품은 예술과 진실에 관한 이야기로 넓게 확장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요것 말곤 다 메타포야"라는 가사의 의미를 뒤늦게야 깨닫게 된 사람으로선, 이 작품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심히 궁금할 따름이다. 지금과는 또 다른 연출이 이 작품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걸어봄 직하다. 뮤지컬 <마마 돈 크라이>가 그러했듯.


이번 <최후진술>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 더 있다. 10년 전에 고개를 갸웃거렸던, 노희경 작가의 에세이 속 한 문장이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책을 낸다고 하고서는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말도 안 되고 문장도 안 되고 더더욱이나 생각의 깊이란 게 너무도 보잘것없는 것이 수두룩하다. 뺄까 말까 하다가, 그냥 둔다. 어차피 지금 쓴 글들도 시간이 가면 지금처럼 낯간지러울 게 뻔하다.”(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아니, 작가님 당신처럼 잘 쓰는 사람이, 그것도 이렇게 글을 잘 써놓고 낯간지럽다니. 이건 지나친 겸양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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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 이는 "책 쓰지 말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가사와도 닿아 있다. 지금의 내 생각, 지금의 내 언어는 짧게는 몇 년 안에(길게는 나 죽고 난 후에), 틀린 것이 되어 “민망해”지고, 식견이 부족하게 느껴져 “낯간지러울”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밖에 생각하지 못 했느냐고 손가락질당할 수도 있다. 내게, 또는 남에게. 그래서 나는 종종 무서움을 느끼곤 한다. 이렇게 내 생각을 내 언어로 담은 글을 어딘가에 남기는 일에 말이다. 틀려본 적이 있고, 생각을 철회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무식의 증거가 영원히 남는" 건 아닐까, "게으른 정신을 그대로 들키"는 건 아닐까.

 

그러나 <최후진술>의 밀턴은 말한다. 그 안엔 당신의 경험과 감정이 담겨있다고. 그래서 한 자도 남이 고칠 수 없노라고. 그리고 윌리엄은 말한다. 다시 한번 더 태어날 기회가 온다 해도 “다시 똑같이 살” 것 같다고. 마지막으로 갈릴레이는 끝내 외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진실을 부정하는 글은 못 쓴 게 아니라 안 쓴 거라고. 이 작품은 진실한 글을 쓰는 일의 어려움과 회의를 노래하지만, 결국 그려내는 건 그것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의 낭만적인 진심이다. 과연 '그래도'라는 부사가 마땅한 선택이다.

 

후세의 과학적 사실에 비추어 결국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주장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세계적인 극작가로 남았기 때문도 아니다. <최후진술>이 그리는 위대함은 자신이 사랑하던 것의 진실을 끝까지 탐구하고, 현실의 벽 앞에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길 선택한 것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건 그것이다. 틀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의 진실을 끝까지 놓지 않는 용기. <최후진술>에게 배운, 글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비겁하고 평범한 내가 '그래도' 글을 쓰는 이유다.


 




최후진술
- Final Testimony -


일자 : 2020.03.13 ~ 2020.05.31

시간
화, 목, 금 오후 8시
수 오후 4시, 8시
토 오후 3시, 7시
일 오후 2시, 6시
월 공연 없음

장소 : 예스24스테이지 2관

티켓가격

R석 66,000원

S석 44,000원

 
기획/제작
장인엔터테인먼트 / 극단장인

관람연령
만 8세 이상

공연시간
100분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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