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고통, 타인의 고통 [도서]

아무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글 입력 2020.03.2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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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모임, 외출 등을 자제하라는 광고를 자주 볼 수 있다. 또 항상 마스크를 끼고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타인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분위기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의무가 된 요즘, 황정은의 단편소설집 아무도 아닌(문학동네)을 통해 타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타인을 ‘상처’로 정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집에는 사람들의 고통이 드러나 있다. 소설에서 인물은 자신의 잘못이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지만 그 잘못은 타인에 불과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 때로는 거기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인물들은 자신의 잘못이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란다.


그런데 상처는 누군가에게 남아 있다. 그 누군가는 자신일 수도, 타인일 수도 있다. 아무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타인에 불과할지라도 그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아무도 아니기를 바라고 잘못과 상처, 둘 중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잘못된 일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자기 자신도 아무도 아니기를 바란다.


 

[크기변환]의자.jpg

 

 

모두에게는 상처가 있다. 일상 속에서 지나가는 차갑고도 무거운 그것을 견딘다. 괴로워하면서도 차가운 그것에 몸을 묻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개인의 상처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사회 체계의 불안정한 사각지대 속에서 발현된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때문에 사람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보다 체계 속에서 무언가를 누려야 한다는 강박이 더 익숙하게 느껴진다. 사회체계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사람을 지칭할 때는 타인과 ‘나’를 굳이 구별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사람 모두가 타자가 되는 것이다.

 


“연체금이 있을 때나 호명되는 사람들. 노인은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고 죽은 지 몇 달 만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뉴스에 나올만한 사람이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내게도 권리가 있어. 남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권리가 말이다...해방이라기보다는 차단될 수 있는 권리...그런 게 있고 그것이 내게도 분명 있는 권리인데 그걸 확실하게 실현하려면 돈을 가지고 있어서 돈으로 그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거야.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니지.”


- 124p <누가>


 

주인공이 새로 이사 온 집에는 오랫동안 그곳에 살던 노인의 머릿기름 자국이 남아 있다. 자본주의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돈을 내고 들어온 ‘나’는 자본주의에 의한 순환체계를 깨닫고 돈이 없어 머무를 능력이 없던 노인의 상황에 언젠가 자신도 도달할 것을 알아차린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입각한 ‘나’의 사고방식으로 돈으로 이웃에게 시달리지 않을 권리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침범한 사람들에게 고통 받는다. 이웃의 헛소리와 윗집의 몰지각한 행동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나’도 소음공해를 유발한다. 그 자신이 소음을 유발하면서 타인과 ‘나’의 고통은 섞이고 각자의 상황은 비슷해진다.

 

아무도 아니라는 말은 이상한 말이다. 누구나가 누구에게나 아무도 아닌 사람일 수 있다. 누군가가 타인임을 인정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타인의 고통에 선을 긋는 말이다. <양의 미래>에서 ‘나’는 소녀의 실종을 막지 않아서 비난을 받게 되고 소녀의 어머니가 시위를 벌이는 모습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소녀의 실종도, 비난도, 소녀의 어머니의 시위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있지도 않은 지하터널에 소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어보지만 실제로 지하터널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죄책감을 견디기 위해서 지하터널은 존재해야만 했고 자신은 터널 속에 죄책감을 던져버려야만 했다. ‘나’는 터널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군가를 신경써야 해?... 그 애가 누군데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


“터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어느 쪽이 더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일일까. 나는 그걸 알 수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59p <양의 미래>



각 소설에서 왠지 신경질적이고 그만큼 무심한 사람들의 고독한 모습을 엿본 것 같다. 이 단편집의 단편들은 타인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상처 받은 얼굴 없는 타자로부터 ‘사실 고통 받는 ’나‘의 얼굴도 타인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이끌어낼 수 있다.


타자의 존재를 나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고통은 타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변질될 때도 있고, 타인에 대한 공감불능으로 형태를 바꿀 때도 있다. 상처는 바로 그런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상처의 고통은 절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없다. 또 ‘나’와 타인은 모두에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없다.


그저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중얼거리면서 상처를 아파하며 살아갈 뿐이다.


 

 

김수연이다.jpg

 

 



[김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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