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찰나와 순간을 노래하는 가수, 이예린 [음악]

글 입력 2020.03.25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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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지면 덜컥 울고 싶어진다. 울고 싶어지면 기댈 곳을 찾고, 기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외로워진다. 마음이 허하면 이것저것을 급히 욱여넣다 결국 쓰린 속을 부여잡고 새우잠을 자는 결말. 그러므로 솔직해지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섣부른 솔직함은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는 걸로 끝이 날 테니.


준비되지 않은 물렁한 마음이 급습당하는 일이 잦다. 그 시간은, 쉽게 감성에 젖는 취약한 감수성을 원망하는 걸 시작으로, 별 수 있나 날씨도 좋겠다 그런 우울함을 즐기다, 마지막은 항상 위로를 구하러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울고 싶게 만든 것의 다른 이름은 결국 끝에 위로를 구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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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 이예린은 2013년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2017년 4월, 첫 싱글앨범 [찰나]를 발매했고 그해 6월 첫 EP앨범 [순간]을 발매했다. 가장 최근엔 <사람은 이상하고 사랑은 모르겠어>라는 한 곡의 곡이 실린 싱글앨범을 발매했다.


 


줄곧 가까워지고만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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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나 스토리는 무한하지 않고, 그러한 이유로 내용적인 차별성은 사실상 큰 차이를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그러므로 예술의 작품성은 스토리의 서술방식, 즉 형식과 표현의 차별성을 통해 완성된다.

특히 음악의 감상이란 가사, 멜로디, 악기 사운드 등 음악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의 총체적인 합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기에, 노래 가사는 시(詩)와는 달리 텍스트만을 독립적으로 감상하기 어렵다. 많은 것이 충족되어야 하는 쉽지 않은 텍스트다. 하지만 그만큼의 힘이 있다.

이예린의 음악은 가사표현에 능하다. 극적인 전환 없이 잔잔히 진행되는 곡에, 한 번 듣고 흥얼거리게 되는 자극적이고 중독성 있는 맛도 아니지만, 간소화된 악기구성의 공백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낯선 표현과 단어들에 그 의미를 곱씹게 하는 진심과 깊이가 있다.

헤아릴 수도 없이 그리울 거라 말해달라는 부탁에, 비겁한 당신들 다 나 같다는 솔직한 고백에 이끌리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당신 나 부끄러워요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모습
그 모습에 난 마음으로 울어요
사랑 아 사랑이라니
···
그 거친 손이 내 어깨를 훑으면
난 그저 당신 위에 쌓이고 싶어
밀물 같은 몸짓들
재우지 않을래요
가까워져요
우리 더 가까워져요


- 이예린, <가까워져요> 중에서



언젠가부터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일 뒤엔 계산과 마음의 무게를 저울 다는 일이 따라오곤 한다. 관심의 크기와 두려움의 크기는 대개 비례했고,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비겁한 행동인 걸 알면서도, 만남과 동시에 먼 훗날의 이별을 먼저 상상하고, 내 마음의 크기가 상대의 것보다 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어느새 내 관심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크기’였다. 그럴수록 마음은 보호되지 않았고, 배로 비참해졌다.

하지만 그 시작은 상대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마냥 미워할 수 없다. 가까워지다 못해 당신 위로 쌓이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 틈에 끼여도 좋을 때가 있다. 줄곧 가까워지고만 싶은 철없는 마음이 가득 찰 때가 있다. 어쩌면 쉬운 사랑과 쉬운 이별을 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겁이 나는 걸지도.

‘사랑, 아 사랑이라니’라는 가사가 그렇게 한달음에 박혔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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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말아요 나는 초조해요
그대가 내뱉기 전에
먼저 먼저 이별을 말할래요
난 원래 이랬어요 나는 나약해요
상처받기 싫은 마음
그댄 아마 알 수 없을 거야
···
그대 미소는 나를 허물고
잔뜩 움켜쥔 내 맘 무너뜨려요
감당할 수 없이 빠져들 텐데
날 좀 내버려둬요
도망치고 싶어요
난 항상 그랬어요
난 원래 이랬어요


- 이예린, <난 원래 이랬어요> 중에서

 


방어기제가 발동하는 또 다른 순간, 끝에 남겨짐을 예감했을 때. 이예린은 이 곡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사랑을 하다 보면 자존감이 끝도 없이 낮아질 때가 있어요. 공감하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분들께 이 노래를 바치고 싶습니다.’

자주 오던 연락이 조금씩 늦어질 때, 주고받는 질문들이 줄어들고 내게 더는 궁금한 게 없다는 걸 느낄 때. 그럴 땐 착잡한 마음으로 활시위를 당겨본다. 화살촉이 향하는 곳은 나. 결국 스스로에게서 문제를 찾으려는 루트. 그리고 그 끝엔 가시 돋친 방패를 든 채 먼저 이별을 고하는 내가 있다.

방어기제가 발동하면, 남겨지는 것보다 비겁한 나를 보는 게 더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건 ‘고백’이다. 나약하고 불안하며 무척이나 두렵다는, 비겁하게 도망치고 싶다는 발화. 나의 불완전함을 수긍하고 인정하는 말. 가끔은 너무 당연한 말 한 발짝이 그날을 살게 하기도 한다.

도망치고 싶다고, 나는 불안하다고, 당신은 몰랐겠지만 나는 원래, 또 항상 그래왔다고 말하는 화자가 이 노래가 다 부르고 나면 두려움으로부터 조금은 홀가분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1년 후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다시 돌아오진 않지만
그 자체로 무한히 피어날 순간들 속에서
제 노래와 함께해 주세요.’


- [순간] 앨범소개글 중에서

 


결국 ‘찰나’면서 ‘순간’인 시간의 연속이라는 생각이다. 이예린은 찰나와 순간은 비슷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주 짧게 스쳐갈’, ‘머무르지 않는’, ‘지나가 버릴’ 것들. 찰나와 순간, 이 두 단어엔 언제나 아쉬움과 후회가 묻어 있다.

행복한 현재를 마냥 기쁜 마음으로 누리지 못하고 불행을 미리 예감해두는 건, 지금 이 시간이 곧 소멸할 것이며 훗날 이 시간을 그리워할 거라는 것조차 알고 있기에 그런 것에 마음 아파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이예린의 음악은 많은 찰나와 순간들을 담담히 읊는다. 그리고 그 진심 어린 고백 앞에, 나를 지나간, 지나가고 있을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그 자체로 무한히 피어나고 있을 순간들이기에.

그래서 더욱이 지나가는 현재를 그저 뭉뚱그린 시간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요즘이다. 무수히 잘게 쪼개진 순간들의 연속으로, 더 자주 더 많은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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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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