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람들은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 밤쉘 [영화]

글 입력 2020.03.26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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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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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일상, 드라마, 스릴러, 공포, 코미디, 액션, 스포츠, 판타지 등등. 영화 타이틀을 검색하면 꼭 붙어 나오는 분류 방식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직관적이지 못하다. 중심 소재나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 밑에 나열된 줄거리까지 읽어야 약간 감이 잡힌다. 때로는 줄거리마저 명확하지 못하다. 물론 영화를 보기 전에 꼭 스토리라인이나 분위기를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영화의 어떤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만든 카테고리라면 그 몫은 다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장르 구분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


네 번째 장르는 '갈망하는' 영화. 무언가를 갈망한다는 것은 현재 그 무언가가 자신에게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거나 지금까지 쭉 없었거나 아니면 둘 다에 해당하거나. 안타깝게도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마지막 경우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의 삶을 동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관과 생각에 따라 선택한 결과물인 그의 인생을 누가 함부로 평가하겠는가. 다만 그가 자신의 것을 만들어 갈 때 사회가 끼친 영향력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한 실존 인물의 생애를 살펴본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어떤 변화를, 어떤 생각을,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주기에 앞서, 결정적인 힌트를 보고 당신이 맞추길 바란다. 이 힌트는 영화의 중심 뼈대가 될 주인공의 숨은 업적이다. GPS, 블루투스, 와이파이, 첨단군사기술, 핸드폰 발명을 가능케 한 기술, '주파수 도약'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한 사람.


참고로 현재 이 기술의 가치를 수치화하자면 300억 달러, 한화로 37조쯤 된다. 누구일지 감이 잡히는가? 알게 모르게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별난 일이지 않은가. 우리의 일상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온 발명품의 기반을 다진 기술인데 누구의 생각인지 알려지지 않았다니. 어쩌면, 그러지 못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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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이 바로 위대한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배우 헤디 라마. 사진을 보고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아름다운'가? 그의 외관에 감탄한 나머지 '칭찬'의 의미로 평가했다면, 환영한다. 당신에게 이 글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성을 인형이 아닌 사람으로대하려면 어떤 자세, 어떤 생각,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직업: 배우, 그리고 발명가



헤디 라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생으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오페라와 공연 등 문화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그러나 마음도 풍요로운 삶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어머니는 딸이 아닌 아들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헤디 라마는 아버지와 강한 유대감을 가진다.


그의 아버지는 외출할 때마다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기차, 타이어를 구르는 자동차 등 사물의 작동원리를 가르쳐 주었다. 생각만으로도 따분할 일이 헤디 라마에겐 그러지 않았다. 그는 5살 때 뮤직 박스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지적 호기심이 상당했다. 게다가 학교에서 화학을 가장 잘했던 그는 이과 소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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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첫 선택은 배우였다. 카메라 앞에 서서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배우. 16살의 그는 거대 기획사에 들어가 첫 영화를 찍는다. 문제는 그가 받은 배역이었다. 연기력이나 센스를 드러낼 만한 캐릭터가 전혀 아니었다. 사람이 아닌 인형, 상품으로서 카메라 렌즈를 통해 마구 소비되었다. 물론 상품화 자체를 비판하려는 생각은 없다. 자신의 능력과 자질, 성품이나 솜씨를 세상에 어필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문제는 이 소년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성적 대상화시켰다는 점이다. 미디어는 사회를 반영한다. 약 100년 전, 사회가 '아름다운 여성'을 대하는 방식은 이렇게 폭력적이었다.


헤디 라마가 활동하던 시기에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망명하여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긴다. MGM과 계약하여 7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한다. 그를 캐스팅한 남자는 모든 여성을 두 부류로 나눴다. 성녀와 창녀. 남자는 헤디 라마가 처음 맡았던 캐릭터와 똑같은 배역만 가져왔다. 연기자 헤디 라마로 인정하지 않고 그의 외적인 면을 멋대로 판단하여 짓밟았다.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몰려드는 스케줄을 견뎌야 하는 헤디 라마에게 '비타민'을 투약한다. 이상하게 그 주사를 맞으면 기운이 펄펄 난다고 후에 인터뷰했던 그. '비타민'의 정체는 마약, 필로폰이었다. 필로폰은 한두 번이라도 접하면 바로 중독될 정도로 강한 성분이다. 그러나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진 촬영을 끝낸 후에, 헤디 라마는 집에서 발명을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도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세상을 바꾼 아이디어



이쯤에서 헤디 라마의 '주파수 도약' 아이디어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어뢰(*군함이나 잠수함 등에 닿으면 폭발하는 폭탄)와 교신하는 주파수를 독일군이 매번 찾아내어 간섭과 교란을 계속했다. 독일군의 지도자 히틀러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해 없이 목표물로 어뢰를 인도할 보안이 필요했다. 헤디 라마는 방법을 고안하다가 번뜩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주파수가 추적당한 이유는 한곳에 머물기 때문이다. 한 주파수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지면 상대가 추적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헤디 라마와 대화를 나눴던 공학자 하워드가 자동 피아노의 작동 방식을 활용하여 실제로 구현하고자 했다. 특허 출원까지 끝낸 그들은 해군에게 이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해군은 단칼에 거절했다. 자동 피아노를 어뢰에 연결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헤디 라마의 아이디어는 세상에서 발견되고 실제로 다른 기계를 만드는 데 쓰인다. '주파수 도약' 기술을 활용한 첫 발명 기계 '소노부이'가 탄생했다. 발명자는 헤디 라마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의 뛰어난 아이디어에 감사를 전했다. 이 찬사가 무색하게 해군은 헤디 라마의 기술 특허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받아들이면 자존심 상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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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우리에게 큰 이로움을 줄 헤디 라마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다. 당시 공학자 하워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를 설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그는 해박한 지식과 기발한 생각을 하는 헤디 라마에게 설계안을 보여주며 조언을 구했다. 헤디 라마가 지적한 문제는 하워드가 생각한 사각형 날개였다. 그는 공기 저항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 다른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빠른 새와 가장 빠른 물고기를 합친 형태, 즉 유선형의 날개를 고안해냈다. 하워드는 그의 말을 따라 비행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탄생할 수 있던 것도 헤디 라마의 덕이었다. 역사는 그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거울 속에 가려진 의미



헤디 라마의 발명가와 배우로 사는 삶에 대해서 영화는 자세히 다룬다. 이제는 예명 '헤디 라마'가 아닌 그의 본명 '헤트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를 볼 차례다. 젊은 시절 내내 꼬리표처럼 그를 수식한 단어는 '아름다움', '예쁨', '고결함'이었다. 미디어는, 사람들은, 세상은 그의 외적인 생김새를 요목조목 언급하며 칭찬이라는 이름으로 평가내렸다. 세상을 향해 그는 자신의 얼굴 말고 다른 것들을 봐 달라고 계속 이야기했다. 자신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그것을 해낼 자질이 충분한 사람임을 자신도 알았다.


하지만 평생 자신의 겉치레에 대한 언급만 받아 온 사람은, 성적으로 소비됨으로써 관심을 받았던 사람은, 세상을 등지고 자신의 신념을 얼마나 지켜낼 수 있을까. 얼굴과 몸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변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이 지날수록 노화한다. 주름이 생기고, 탄력을 잃고, 거뭇해지고, 세포가 죽는다. 슬퍼할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야 즉 시간이 지나야 자신이 전문가가 되고 싶던 분야에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세월이 흐르고, 관심과 사랑을 갈망하던 그는 숨어버린다.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하게.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한 탓이다. 능력이나 자질의 부족이 아니라 늙고 주름진, '못생긴' 얼굴로 더는 사랑 받지 못한다고. 혼자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젊었을 땐 그를 '인형'처럼 대한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는 그에게 추하고 못생겼다며 공격을 퍼부었다. 세상은 그를 정말 상품으로 여겼다. 기능이라곤 '예쁜' 생김새뿐이라는 듯이.


'주파수 도약' 아이디어는 그가 말년이 되어서야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특히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그의 기술을 이용하여 보안성을 뛰어난 군사 위성을 만들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를 시상식에 초대했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아들을 보냈다. 앞서 말한 이유로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극도로 꺼렸다. 아들이 시상대에 서서 마이크에 대고 소감을 전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가 전화한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 가고 싶지만 가지 못했다. 전화로 현장 분위기를 느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열망과 집념보다 사람들의 말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커졌으므로. 그는 자신이 전하고 싶었던 말을 녹음해 아들의 손에 보냈다. 800명의 사람이 한마음으로 기립박수를 치던 현장에 박수를 받아야 할 사람은 갈 수 없었다는 아이러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답은 저마다 다르다. 그래도 하나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사회적 기준에 맞춘 자신이 '예쁘다'는 평을 듣기 위해 살지 말 것. 자신의 원동력으로 삼지 말 것. 시간에 속박된 허상은 짧고 허무하며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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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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