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무도 몰랐을 걸, 세 여신의 속마음 -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글 입력 2020.03.18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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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아_포스터.jpg

 

세 여신이 한 자리에 모인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각기 다른 성향의 세 여신. 우연히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연회장에서 짧지만 힘 있는 이야기가 오간다. 오가는 이야기 속 그들의 공통된 이야기거리가 있다면 사랑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것. 연극은 사랑과 욕망의 문제에서 출발하되 이에 개인의 사고와 정체성이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며, 또 일반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지로 내용을 확장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신이라는 타이틀 뒤에 숨겨져 있던 세 여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지극히 인간적인 괴로움이 겉으로 드러난다.



헤라.

헤라는 비옥한 땅과 땅 위의 세계를 관장하는 대지의 여신이었으나 제우스와의 결혼 이후 그의 뒤를 쫒아다니며 바람에 전전긍긍하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모했다. 남들은 그런 그녀에게 이제 제우스와의 결혼 생활에 아직도 집착할 게 남았냐며,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냐며 포기하라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다르다. 제우스가 정을 준 여인들을 쥐잡듯 찾아내고 쫒아가 어떻게든 벌을 주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질투에 미친 여신일지 몰라도 그녀의 속은 그리 간단치 않다. 그녀가 단 하나 원하는 것은 제우스의 온전한 사랑. 하지만 늘 새로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제우스의 천성은 바뀌지 않고, 헤라는 그에게 자신의 화를 표출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그가 마음을 준 여인을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불빛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헤라는 집착을 멈출 수 없다. 이러한 행위가 자기 자신에게도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일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본래의 자기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제우스의 외도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힌다. 악순환이다.


 

아프로디테.

순수한 사랑의 여신이라고 생각할법하지만 실상은 욕망의 여신에 가까운 아프로디테. 현대에 대입하자면 주체적 섹시를 주장하는 듯한 그녀는 다른 남자들과 자유로운 관계 맺기에 열중한다. 수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즐기면서도 그 순간마다 자신은 진정한 사랑을 한 것이라 말한다. 허나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명쾌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그녀도 마음 속에 흉터를 지고 살아간다. 사랑을 나누다가 헤어진 남신 아레스가 복수심에 불타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던 남자를 죽이고 만 것.


주체적으로 여러 남자들과 사랑을 나눈다고 말해온 그녀지만 아레스의 말에 무너져버린다. 네가 걸레처럼 여러 남자들과 놀아났기에 니 사랑하는 연인이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가해의 이유를 피해자에게 덮어씌우는 잔인한 행위에 아프로디테는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새긴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잊기 위해서든, 혹은 자유로운 연애를 해온 본인의 관성이 강해서든 다른 남자들과 복잡하고도 가벼운 관계를 이어간다. 사랑의 여신이긴 하지만, 그녀 자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부재한 채로 정말 쉴 새 없이 사랑만을 한다.

 

 

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는 다른 두 여인과 달리 오히려 사랑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여신이다. 이 결심이 과한 나머지 그녀는 순결을 지키는 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한다. 복잡한 세계에서 자신을 최대한 차단하고 오로지 자신을 따르는 요정들과 사냥을 즐기고 개인적인 생활을 이어간다.


이런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형제인 아폴론의 꾐에 의해 자기 손으로 그 사랑을 죽이고 만다.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마음의 문을 걸어잠근다. 너무도 폐쇄적인 성향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아르테미스는 헤라와 아프로디테에게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설파한다. 연애도 중요하고, 사랑도 중요하고, 원초적인 욕망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개념 사이에서 온전히 나로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녀는 알고 있다.

 

 

헤아아 공연사진 6.jpg

 


그래서 이 연극의 결말이 너무도 궁금했다. 떠나버린 사랑에 목매며 집착으로 자신을 소비하는 헤라와 자유로운 연애와 섹스에만 골몰하는 아프로디테는 아르테미스의 진심어린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 두 여신은 아르테미스가 너무 폐쇄적이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그렇게 혼자서만 산다면 그 누구에게도 영향을 줄 수 없고 받을 수 없는 삶을 살 거라는 데에 경고를 전한다. 아르테미스 역시 이 점을 인정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모습을 보여 마침내 세 여신은 각자의 내면을 직시하고 이 세상 속에서 상호 교류하며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되려는 변화의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진다. 갑자기 들이닥친 헤르메스로 인해 헤라는 다시 제우스를 쫒아 무대를 박차고 나가고 아르테미스는 헤르메스의 무릎에 걸터앉아 사랑을 속삭인다. 정말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어떻게 지키며, 또 다른 타인과 어떻게 건강하게 교류하며 살아나갈지 의논하려던 그 마음은 한 순간에 원래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함께 눈물지으며, 서로 얘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맞춰간 그 시간이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여겨질만큼, 아무 일 없었듯이. 아르테미스는 맥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자리를 떠난다. 현 상황을 보여주는 완벽한 엔딩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앞서 바라봤던 헤라와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의 이야기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연애와 사랑, 결혼에 대한 문제 사례를 단편적으로 보여줬다. 신화 속 여신들의 이야기임에도 어찌 그리 공감되던지. 특히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면 연애, 혹은 사랑에 목매어 자신을 잃어버리는 모습. 사랑은 나쁜게 아니다. 하지만 사랑에 휘둘려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은 분명 잘못됐다. 사실 이런 모습을 심심치 않게 봐왔다.


특히 첫 연애를 했던 내 모습에서. 사랑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해야 건강하게 이룰 수 있는 거다. 이전에는 이 말의 뜻을 몰랐는데 이젠 안다.작게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부터 시작해 크게는 커리어나 인생 계획에까지, 연애가 너무 맹목적 요소가 되어버림은 굉장히 위험하다. 사랑이 없어지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존재로 남아버리면 안된다. 사랑이 너무 달콤하다고 그렇게 취해버리면 안된다. 취해버리고 나면 그 사랑이 무너졌을 때 내 자신이 너무도 쉽게 무너져버리고 만다.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던 헤라나, 반복적으로 사랑을 찾게 되는 아프로디테처럼. 그리고 비단 마음의 문제뿐 아니라 여신들의 일화에서 피해자를 향한 '가해의 정당화'를 짚어준 점이 인상깊었다. 데이트 폭력이나 성폭행 등 분명 잘못된 행위임에도 이 행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며 2차 가해를 이루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점에 더욱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동시에 헤라와 아프로디테와 대척점을 이루는 아르테미스라는 캐릭터를 제안하면서 반대의 입장에서 성찰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아르테미스가 절대적인 선으로 나오지 않는다. 다른 여신들에 비해 자기 자신의 꿈은 무엇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떻게 살기 원하는지 알아가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고립된 모습을 보인다. 연대하고 더 큰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혼자 고고히 남아있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연극은 아르테미스에게 더 좋은 가치를 함께 행하려 하는 연대 의식을 심는다. 물론 결말에 이르러 모든것이 허망해진다.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 개인이 각성하고 뭉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현 세태를 강렬하게 표현한 마지막이었다.


끊임없는 자아성찰과 더 나은 우리의 모습을 향한 기대감. 페미니즘은 별 것이 아니다. 매 순간 돌아보고 한 발짝씩만 더 나아지면 된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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