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배부른 인간 대신 배고픈 돼지를: 붉은 돼지 [영화]

영화<붉은 돼지>를 보고
글 입력 2020.03.1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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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시ㅡ낭만은 현실과 동떨어져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감상과 이상을 섞어 우그려놓는다. 낭만주의자들은 비현실적이다. 고로 그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성과주의 사회에서 그들이 설 자리는 존재하지도 필요치도 않다. ㅡ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 말에 옳고 그름은 중요치 않다. 애초에 정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이 영화를 잠시 주목해보자.

 

<붉은 돼지>는 지브리의 1992년도 애니메이션이다. 지브리는 <이웃집 토토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등 내로라하는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한 이미 너무나도 유명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이다. 나는 이 지브리의 꽤나 광팬인데 꼭 그렇지 않아도 이들의 작품을 두어 개만 본다면 공통점이 보인다. 마법, 신비로움, 환상적인 세계관은 이들에게서 빠질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붉은 돼지>는 다르다. 여성 캐릭터를 주로 하는 와중 드문 남자주인공, 거의 등장하지 않는 마법과 환상적인 이야기. 다른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기대하고 보았다가는 자칫 실망하기 쉬워 보였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그리고 나 또한 <붉은 돼지>를 지브리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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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붉은 돼지’로 불리는 포르코는 빨간 전투기를 타고 다니며 하늘의 해적들을 소탕하고 현상금을 벌며 살아간다. 한때는 그도 인간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돼지로 변해버린다. 그 이후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이탈리아 근해에서 살아가던 그의 삶에 국가와 군대, 경쟁자, 그리고 사랑과 모험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또 다시 여러 사건을 겪게 된다.

 

영화에서는 포르코가 왜 돼지로 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소모적인 전쟁에 회의를 느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것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포르코는 파란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유를 즐기는 낭만주의자이다. 동시에 그는 끔찍이도 현실적이고 염세적이다.

 

살기 위해 현상금 사냥을 하는 것도 그의 오랜 친구 지나의 사랑을 모른 채 하는 것도 모두 현실적인 판단에서 나타난다. 지루하고 만만하게 이어지는 하늘의 총알 비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현실주의자라면 더욱 더. 끔찍한 삶을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이는 드물다. 대부분은 진실 앞에 슬며시 빗겨 선다. 그 앞에 서 있지만 절대로 마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주의자라면 어쩔 수 없이 삶의 잔인함을 마주할 운명이며 그것을 온 몸으로 견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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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코는 전쟁통의 어느 공중전에서 그의 친구를 잃는다. 그러고는 높은 하늘 위 마치 은하수처럼 흘러가는 온 나라의 조종사들을 마주하게 된다. 전쟁 속 목숨을 잃은 비행기 조종사들은 모두 어디론가 흘러가는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향하며 파르코의 외침과 멀어져 간다. 언뜻 보기에는 환상적인 이 체험은 파르코의 눈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늘 마주하고 있던 삶에서 그는 사라진 친구들과 이어지지 못한 이야기 그리고 슬픔과 무의미를 보았을 것이다.

 

낭만, 현실에 매이지 않는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태도. 견딜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파르코는 현실 대신 낭만을 택할 수 밖에 없었고 인간보다 돼지이기를 택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겠다 외치던 인간들은 더 이상 배고플 틈이 없었고 파르코는 배부른 인간들을 떠나 돼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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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배고픈 돼지였다. 늘 배고프기 위해 그는 안정적인 삶과 친구 그리고 사랑을 모두 포기하고 하늘을 선택한다. 먼저 떠난 전우들과 여전히 계속되는 싸움들의 고향 그리고 높이 오를수록 아득해지는 현실의 허망함까지 모든 것이 담겨있는 하늘은 그를 낭만적인 돼지로 만들어 주었다.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반전(反戰)영화로 보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 어디에서도 흔히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 할 때 등장하는 잔인한 사건들과 피와 시체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만큼 아름다운 풍경과 다양한 사람들만이 등장할 뿐이다. <붉은 돼지> 속에는 모든 인간의 군상이 모아져 있으며 각자의 삶을 만들어나간다. 그 안에서 파르코의 낭만은 과연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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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철학적 고찰과 자아성찰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남겨진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선을 실행한다. 그렇기에 <붉은 돼지>속 인물들은 모두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누구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저 조금 더 응원하는 이를 가질 뿐, 애니메이션 속 마주치는 현실의 반영은 차마 미워하기에도 가까운 우리의 이야기였다.

 

어찌 되었건 파르코 같은 인물이 현실에, 적어도 나의 주변에 존재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였기에 낭만을 찾아 떠난 이. 파르코에게 열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이를 어느 틈에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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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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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pqb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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