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의 업적 - 영화 '이브 생로랑의 라무르' [영화]

글 입력 2020.03.16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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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의 오랜 짝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새 3년이 되어간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연인이자 지금의 생로랑 브랜드를 있게 한 장본인, 탁월한 사업가, 프랑스 역사상 사회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이 된 프랑스와 미테랑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굵직한 정치 후원가, 〈르 몽드〉의 주인,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에이즈 퇴치를 위해 조직된 단체인 시드 액션(sidaction)의 의장, 사회운동가, 게이 채널 〈핑크 티브이〉와 게이 매거진 〈테투〉의 창시자, 파리 바스티유 극장의 디렉터, 예술 애호가, 세기의 수집가.


그를 수식하는 말들은 차고 넘치지만, 내게는 이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세상의 온갖 것들에 대해 늘 뜨겁게 할 말이 있고 분주히 할 일이 있었던, 여든이 넘어가도 눈빛만은 늘 타오르던 불꽃같던, 나의 완벽한 이상형”


        

그의 이름은 피에르 베르제이고 나는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가슴이 뛴다. 언젠가 꼭 한 번은 그와 악수하고 눈 맞출 수 있기를, 오랫동안 터무니없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의 죽음으로 이제는 정말 이룰 수 없는 바람이 되어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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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베르제


 

이브 생 로랑 사후에 제작된 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2011)〉는 피에르 베르제를 비롯해 이브와 각별한 사이였던 몇몇 인물들이 이브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띤다. 이브와 관련된 일화와 그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한 축을 이룬다면 다른 한 축은 피에르 베르제가 이브 사후에 그와 50년에 걸쳐 함께 수집한 온갖 예술품들을 경매에 부치는 과정을 다룬다. 

 

영화는 피에르가 내일이면 경매에 넘어갈 작품들이 한가득 놓인 방을 향해 서서히 걸어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뒤이어 카메라는 마치 무덤 속 부장품처럼, 죽은 연인에게 보내는 굳은 맹세처럼 차갑고 결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각과 그림, 토르소를 시간과 공을 들여 비춘다. 


2009년 파리의 그랑 팔레에서 열린 〈이브 생 로랑-피에르 베르제 컬렉션〉 경매는 ‘세기의 경매’라 불리며 전 세계 화상과 예술 애호가들을 열광케 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진귀한 유물부터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 브랑쿠시 등 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까지, 시공을 초월한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들의 소장품은 총 700점이 넘었고 한화로 약 6,000억 원에 달하는 수익을 남긴다. 수익금은 두 사람이 함께 설립한 ‘이브 생로랑-피에르 베르제 재단’에 위탁돼 에이즈 연구 기금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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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의 포스터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건 전적으로 피에르 베르제 덕분이었다. 2008년 이브 생 로랑이 암으로 사망하고 홀로 남겨진 그는 이브와 함께한 반세기라는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물건들을 끌어안고 슬픔에 잠겨 있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죽은 연인에 대한 사랑을 이어가는 쪽을 택했다. 즉 이 경매는 피에르 베르제가 이브 생 로랑을 위해 연 성대한 추모식이자 이브를 영원히 살아 있게 하려는 그의 노력의 일환인 셈이다.


영화 후반부에는 프랑스 문화부 장관 자크 랑이 등장해 이런 말을 한다. “그들의 사랑은 상징적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어둠과 공포, 근심 속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그들과 같은 처지의 두 사람이 연인이자 친구로서 스스로를 공개한 모습은 사랑의 고귀함뿐 아니라 용기와 힘을 보여줍니다.”

 

뒤이어 자크 랑은 피에르 베르제가 참여한 각종 사회운동 덕분에 성소수자의 인권이 더 이상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공공연하게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에이즈 퇴치 운동이 얼마나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는지를 언급한다. 말하자면 그는 피에르와 이브의 사랑이 지닌 사회적이고 ‘공익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그들이 프랑스 사회에서 동성애와 관련해 진일보한 변화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피에르가 일군 ‘사랑의 업적’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이브의 삶을 이해했던 방식, 이브를 사랑했던 방식 자체다. 크리스천 디오르가 사망한 후 스무 살의 나이로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가 돼 천재성을 입증하며 단박에 세계 패션계를 사로잡았던 이브 생로랑은, 일평생 지독한 우울증과 약물 중독에 시달린다. 많은 사람들이 이브를 찾고, 환호하고, 감탄하고, 비난하고, 떠나가고 다시 찾아오기를 반복하는 수십 년 동안 피에르는 이브와 이브의 삶을 정확히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그의 곁을 지킨다.

 

 

“명성은 눈부시면서도 슬픈 행복이다… 이만큼 이브를 잘 표현하는 말은 없습니다. 그는 늘 고통스러워했어요. 명성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고 점점 더 힘들어질 뿐이었죠. 이브가 행복해하는 걸 볼 수 있었던 건 1년에 딱 두 번, 컬렉션이 끝날 때뿐이었습니다. 기립박수를 보내는 청중들의 환호 속으로 걸어나갈 때죠. 그런 기분이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그날 밤, 혹은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완전히 잊혔어요.”

 

      

피에르와 이브의 관계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은 예외 없이 분명해 보인다. 이브, 이 우울한 천재는 늘 현실을 버거워했고 가슴 한가운데에 뚫린 시커먼 구멍을 메워줄 어떤 것을 찾아 끝없이 방황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자기 자신조차 분명히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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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이브 생로랑과 그의 모델

 

 

통제가 불가능할 만큼 반복해서 고독과 슬픔 속으로 빠져들곤 했던 이브는, 확실히 무자비한 연인이었다. 이브를 슬픔과 우울에서 구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시도했지만 결국 불가능하다는 걸 안 피에르는 결국 그것이 이브의 인생임을, 누구도 그것을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영역에 결코 침범하는 법이 없었죠……(나는 이브를) 그냥 받아들이게 된 거죠.”

 

피에르의 이 말 앞에서 나는 그저 존경과 박수를 보낼 수밖에.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것뿐이고, 단지 이거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는 이브 생 로랑의 삶을 조망하는 영화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브보다는 피에르 베르제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치, 사회, 예술, 비즈니스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도대체 이 남자는 잘하는 게 왜 이렇게도 많으며 어떻게 프로필을 정리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또는 지키고 싶은 가치를 위해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했던 피에르. 그에게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영화는 피에르 베르제가 거센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뒤를 돌아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언제나 나를 가슴 떨리게 하던, 삶의 온갖 풍파를 겪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 깊은 눈을 마주하며 나 역시 생각에 잠긴다. 삶이란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끝까지 밀어붙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해 보이는 과정이라는 생각.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우리는 결국 어떤 것은 끝까지 사랑하고 또 어떤 것과는 죽을 때까지 불화하며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


당신은 지금 누구를,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피에르 베르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이 하나다.



[이세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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