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금 많이 사적인 이야기 [사람]

향을 향유하다.
글 입력 2020.03.13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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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좋아하던 라일락, 아파트 베란다에 키우던 로즈마리, 이유도 모르게 좋던 지하주차장 냄새, 짧게 통학할 시절 부지런히 맡던 새벽 내음, 어린 시절을 통틀어 모든 내 과거는 향으로 기억되어있는데 왜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향을 향한 여정’을 결심했는지 궁금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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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합반이었던 고등학교 특성상 체육 시간만 되면 공부하던 교실은 간이 탈의실로 탈바꿈했고 체육 시간 후에는 항상 땀 냄새로 가득 찼다. 여름날 더욱 심해진 냄새로 고통받으며 교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있을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내 앞을 지나간 친구의 뒷모습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불쾌한 냄새로 가득 찬 공간을 짧게나마 정화해준 섬유유연제 냄새. 그 향이 내 코앞에 머물다간 몇 초. 그 찰나의 순간, 나의 짝사랑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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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3월 뉴욕에서의 그 날


 

시간은 흘러 또 다른 사랑으로 이어진다. 13시간의 시차와 약 7,000마일의 거리는 표면상으로 이별을 만들어냈지만, 서로의 미련으로 연락은 이어지던 상태였다.


그렇게나 먼 뉴욕인데 어떻게 미국 오기 바로 전, ‘너를 닮은 흔치 않은 향’이라며 선물했던 향수를 뿌린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갈 수 있었을까.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사이임에도 미친듯이 그 아이 아니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웠다.

 

*

 

나중에는 발을 동동 구르며 후회할 만한, 너무나도 사적인 이야기로 긴긴 서론을 늘어놓은 이유는 그만큼 ‘향’은 나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너무나도 특별한 무언가이지만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주변 친구들한테 이미지에 맞게 향을 추천해주는 정도, 그저 그 정도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방에, 명확히 알아내는 사람은 분명 흔치 않다. 나아가 이를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 연결할 수있는 사람은 더더욱 흔치 않다. 불행히도 나는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여타 수 많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나를 자체 분석해낸 결과,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못하는, 그런 참을성 없는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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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하고 분필을 좋아했던 꼬마 아이는 단순한 연상기법으로 영어 선생님을 꿈꾸었지만, 현실적인 시각을 갖게 된 고등학교 학생은 꿈을 포기했다. 가슴 뛰지는 않더라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막아주던 방패막이 사라진 후, 방향성까지 잃어버렸다. 해가 갈수록 친구들은 하나둘 자기한테 맞는 직무를 찾아내고 소위 스펙이라는 것을 쌓으며 빠르게 미래를 대비해가는데, 나는 그대로였다.

 

이미 늦어버렸다는 패배감으로 두려움이 극도로 치닫던 작년 여름, ‘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들어오세요.’ 라는 문구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곳에서 지금의 미래를 그렸다. 이미 많은 향으로 뒤섞여버렸지만, 분명 좋은 그 특유의 향에 둘러싸여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에 부러움과 질투를 느꼈다. 그리고 ‘이제서야’ 무언가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처음 매장에 들어섰을 때 맡았던 그 향을 이제는 온몸에 입힌 채 퇴근한다.


“향”.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코라는 감각기관을 이용해 맡는 일련의 신체과정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거부감이 드는 기체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모든 추억과 사랑 그리고 꿈이다. 스물다섯의 나는 올해야 이 여정을 시작했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이 여정은 진행 중이었다.



“모든 일에 있어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를 걱정하지 말고,다만 내가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할 수 있을지, 그것을 걱정하라”


- 정조 / 홍재전서 175권 中

 

 

 

짧은 코멘트


 

처음, 첫 문단을 쓸 때까지만 해도, 이 글을 쓰려는 의도는 이랬다. 대학 시절 아니 평생을 통틀어 찾은 꿈의 방향성에 대해 합리화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너무나 많았고, 잘 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포부 넘쳤던 초반과 달리, 키보드 커서는 수백 번 깜빡이고 글은 이어지지 않았다.


마감 전날이 되어서야 겨우 글을 마쳐본다. 담담하게 작성하려던 처음의 다짐과는 정반대로 너무나도 시끄럽고 어지러운 글이 된 것 같아 염려스럽다. 참고로 나는 기분이 가라앉거나 불안할 때 방 안에 향을 잔뜩 뿌리는 습관이 있다. (부모님은 매우 싫어하신다) 웃기게도 글을 저장하기 직전, 나는 무의식적으로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또다시 병을 들어 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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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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