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삶은 없다 [영화]

영화 <차이나타운>
글 입력 2020.03.13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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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주의

 

 


 
 
영화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일상, 드라마, 스릴러, 공포, 코미디, 액션, 스포츠, 판타지 등등. 영화 타이틀을 검색하면 꼭 붙어 나오는 분류 방식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직관적이지 못하다. 중심 소재나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 밑에 나열된 줄거리까지 읽어야 약간 감이 잡힌다. 때로는 줄거리마저 명확하지 못하다. 물론 영화를 보기 전에 꼭 스토리라인이나 분위기를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영화의 어떤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만든 카테고리라면 그 몫은 다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장르 구분을 새롭게 하고자 한다.

두 번째 장르는 '자립하는' 영화. 배고파서, 심심해서, 힘들어서, 졸려서 '죽겠다'라고, 우리는 입 밖으로 죽음을 쉽게 뱉는다. 물론 세상을 진심으로 뜨고 싶은 마음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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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이야기할 영화 <차이나타운>의 주인공 일영은 후자의 상황에 놓인다. 영화는 그 상황을 환상으로 보여준다. 현재의 자신이 어린 시절의 자신과 모로 누워 마주한다. 일영이 있는 어둑하고 비좁은 트렁크 안은 어린 일영이 있던 캐리어 안과 닮았다. 둘인 듯 하나인 공간에서 둘인 듯 한 사람이 만났다. '그때 죽었어야 했어.' 과거의 자신이 아주 덤덤하게 중얼거린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현재의 자신은 어린 자신의 물음 같은 말에 휘둘린다. 그보다 더 어린아이처럼 소리 지르고 위협한다. 삶이 바닥을 치고 지하까지 뚫고 내려갔다고 느낄지언정 일영은 후회를 거부한다. 살면서 느꼈을 기쁨, 고통, 아픔, 외로움, 설렘, 괴로움, 상실, 성취, 그리고 피가 섞이지 않아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안에 살던 그들을 잊기 싫은 걸까. 그들은 일영에게 어떤 영향을 주던 어떤 존재였을까. 이제 무리에서 일영의 가까이에 있던 두 인물을 살펴본다.
 
 
 
네 쓸모를 증명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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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과 '엄마'는 묘한 관계이다. 엄마는 어떤 문제에 일영을 빠트리고, 일영은 주어진 조건이나 제약이 어떻든 간에 문제를 헤쳐나가야 한다. 엄마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쓸모 있는 사람을 곁에 둔다. 폭력적인 성향이 강하더라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으면 기꺼이 자식으로 키운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손아귀에 있었다면 엄마의 영역 밖으로 나가기는 어렵다.

서커스를 예시로 들어본다. 서커스의 공연 중 일부는 사자, 코끼리, 호랑이 등 여러 동물과 위험한 묘기를 선보인다. 인간처럼 소통할 수 없는 동물을 인간의 입맛대로 바꾸기 위해서는 훈육이 필요하다. 함께 공연하는 인간을 해치지 않고 명령에 복종하도록. 정확히는 해칠 엄두도 못 내게 하여야 한다. 코끼리 같은 경우, 새끼를 데려와 말뚝이나 기둥에 묶어둔다. 겁을 먹은 새끼 코끼리는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나 연결된 사슬을 끊고 도망칠 만한 힘이 부족하다. 매번 시도하고, 매번 실패한다. 이렇게 실패가 학습된 코끼리는 충분히 성장한 후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몸집이, 힘이 얼마나 커졌는지 확인할 생각도 못 하고 그저 굴복한다. 엄마를 따르던 다른 아이들은 독립하고, 나이를 먹고, 권력이 생겨도 감히 대들지 못한다. 학습된 공포는 객관과 이성을 잃게 한다. 숱한 경험에 알아서 꼬리 내리던 자식들만 있었기에 엄마는 몇십 년 동안 엄마로 불릴 수 있었다. 일영이 엄마에게 쓸모 있었던 이유도 비슷하다.
 


너는 잘하질 않거든.

잘하려고 하지도 않아.

그래서 데리고 있는 거야.



무언가를 잘하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애쓴다는 의미다. 일영은 엄마가 어떤 일을 주었을 때 그것에 열과 성을 다하지 않는다. 그저 목표 달성을 위해 행동할 뿐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엄마에게 안전한 존재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지도, 망치지도 않고 정해진 길을 따른다. 사람을 다루고 사람으로 돈을 버는 일은 위험이 많다. 그 상황에서 일영처럼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중간에 있는 사람이 엄마에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영에게 사슬을 끊고 맞설 목표가 생겼다. 낭랑한 목소리와 밝은 미소로 빚진 돈을 받으러 온 자신을 살갑게 맞이하고, 섬세한 손놀림으로 파스타를 대접하고,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남자. 일영에게는 가슴이 일렁일 정도로 낯선 상황이었을 것이다. 다정한 말씨와 행동이. 처음 보는 것에 대한 궁금함이 따스한 눈빛을 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라고, 저도 모르게 마음을 연다. 차이나타운에서는 나누지 못한 애정 어린 시선을 대신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설렘이 일영을 스쳤을지도 모른다.

엄마에게는 일영의 변화가 바람직하지 못하다. 텅 빈 눈동자가 빛을 내며 본연의 쓸모가 사라지려고 한다. 엄마는 바로 내치지 않는다. 일영의 마음을 흔들던 원인을 제거한다. 이쯤 되면 다른 자식들처럼 꼬리를 내리겠거니 하며. 그러나 몸을 사리지 않고 오히려 대항한다. 대항의 끝은 파국이다. 나름의 평화를 유지하던 차이나타운이 의미를 잃는다. 그곳의 통솔자는 엄마다. 결국, 엄마가 모든 것을 망친 원인이 된 셈이다. 일영과 통화를 하며 엄마는 문득 느낀다. '내가 쓸모가 없었네.' 쓸모없는 것은 가치 없다. 그래서 엄마는 일영의 첫 번째 선택을, 그의 칼날을 깊이 받아들이며 말한다.


끔찍할 때는, 웃어. 웃어야 편해.


 
 
웃어야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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쏭은 자주 웃는다. 장난스럽게, 유쾌하게. 분노, 짜증, 기쁨, 불안 등 자기표현이 가장 많은 인물이다. 소재의 묵직함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가 어두운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밝은 축에 속하지도 않는다. 가벼운 캐릭터가 있어도 분위기가 그렇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 그의 밝음이 세상 물정 모르는 해맑음은 아니라는 방증이니까.

일영이 사라지고 그와 관련된 모든 관계가 붕괴한다. 그중 하나가 쏭이다. 일영과 끊기로 약속했던 약에 다시 손댄 때에도 그는 웃는다. 약 기운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웃음으로 무마하는 것이다. 웃음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화가 나든, 슬프든, 기쁘든 일단 입을 옆으로 잔뜩 벌리고 입꼬리를 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일단 웃음을 터뜨리면 몸은 착각한다. '아, 내가 기분이 좋구나' 하고. 흔히 큰 충격을 받았을 때 헛웃음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감정에서 빠져나올 간단한 방법이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깔깔거리던 쏭. 욕을 중얼거리는 입 틈새로 웃음이 비죽비죽 튀어나온다. 그러나 쏭의 얼굴에는 웃음만 담겨있지 않다. 울분이 맺힌 눈은 거울을 통해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신 또한 마주한다. 웃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우습게.

 
 
삶의 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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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건의 결과이자 원인, 일영. 그의 삶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없었다. 지하철 보관함도, 캐리어도, 남자의 죽음도 영역 밖의 일이었다. 남자는 죽기 전에 일영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탄생은 선택할 수 없어도 삶은 선택할 수 있다고. 그러나 일영에게는 해당하지 않은 말이었다. 그가 남자를 보호하고, 엄마에게 거짓말하며 대적했던 사건은 그의 의지라기보다는 충동이었다. 개인의 의지 없이 명령만 따르던 그에게 엄마는 결정권을 준다. 죽이느냐, 죽이지 않느냐. 괴로워하던 그는 선택한다. 엄마를 죽이기로.

엄마는 일영의 전환점이자 일영에게 새로운 삶을 두 번이나 선사한 존재다. 일영이 할 일도 남겨 놓는다.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엄마의 후계자, 엄마의 자식. 생의 마지막까지 지하철에서 보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영은 이제 터를 잡고, 사람을 부리고, 엄마의 역할을 대신한다. 환상이든 회상이든 일영이 차이나타운 가족의 단란한 한때를 그렸다는 것은, 정말 가족 같은 사이가 되길 바랐다는 것이다.


죽지 마, 죽을 때까지.


 
이 한 마디를 품에 안고 일영은 차이나타운에서 엄마가 준 일을 하며 살아가겠지. 일영도 엄마처럼 사람을 부릴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어떤 이름으로 불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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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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