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확실함 앞에서 [문화 전반]

영화 『버드맨』과 단편소설 「몬순」
글 입력 2020.03.1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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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만날 때, 그 안의 ‘불확실성’은 항상 나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확신을 주지 않는 희미한 이야기나 등장인물의 모습은 나를 생각하게 한다.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상상들은 내가 그 작품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 때가 많았다.

 

편혜영 작가의 단편소설 「몬순」은 제목처럼 확실하게 증명되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계절에 따라 방향이 정반대되는 몬순은 결국 이 소설의 전체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영화 『버드맨』 속 주인공 리건은 자신의 관념 속 존재인 ‘버드맨’에게 시달린다. 영화 속 이야기에는 계속해서 객관적 진실이 사라지고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며 심지어 결말까지 모호한 모습을 보여준다.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불확실함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들이 안타까우면서 행동이 이해되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나를 발견하기도 하면서,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단편소설 「몬순



곧 단전이 시작되는 아파트에 태오는 아내 유진을 홀로 두고 ‘댄스’라는 바로 향한다.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이 완전한 태오의 시선으로만 서술된다. 태오는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를 잃었을 때의 일을 생각하며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추적해간다. 그리고 ‘댄스’에서 유진이 일하는 과학관의 관장을 만나게 된다.

 

온전히 태오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는 태오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태오는 아이의 죽음에 대해 계속 유진을 의심한다. 유진이 아이를 낳는 것은 실수였다고 했던 일이나, 아이를 애정 없이 바라보던 표정 또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금방 털어버리는 것 등의 유진의 행동을 관찰해서 나온 나름의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나 또한 태오가 유진을 의심하는 것도 커다란 비약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관장과의 대화에서는 조금 다른 결론을 가지게 된다.


태오는 관장과 대화를 하며 은근슬쩍 ‘그날’에 대한 진실을 끌어낸다. 몇 번을 은근슬쩍 묻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실한 답을 들으려는 듯이 아이가 죽은 날, 아내가 이곳 바에 와 관장을 만나지 않았냐고 직접적으로 묻게 된다. 그리고 태오는 아니라는 답만 듣게 된다. 태오가 믿는 것은 진실이 아니었고, 분명 단정하고 확신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진은 분명 아이가 죽은 날 바에 오지 않았고,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이 부정확한 확신에 이끌려 바에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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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 단전이 되었을 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을 때도 태오는 그냥 나가버렸고 혼자 바에 앉아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사실이 아닌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관장을 떠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둠이 아닌 밝은 빛에서 유진의 얼굴을 보며 말하는 것이 두려운 태오였다.

 

단전이 끝날 시간이 넘었는데도, 아파트는 몇 번인가 불이 켜지고, 꺼지길 반복한다. 태오는 아파트에 들어가지 않고 물러서서 그것을 바라본다. 둘의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 될 수 있을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도 확신할 수 없어 보인다.


 

 

영화 『버드맨



영화는 공중부양 하고 있는 리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전개 내내 리건의 초능력과 같은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나열한다. 처음, 감상자는 리건이 정말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버드맨’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중반부에 오면 그가 한 모든 초능력이 리건의 상상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계속해서 비현실적인 리건의 상상을 현실과 교차해서 보여준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희미하게 한다. 리건이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옮긴다든가 날아오르는 등의 장면들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컷을 끊지 않고 그대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리건의 망상일 뿐이다. 초능력으로 방 안의 전구를 깨고 액자를 부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 괴성을 지르고 내던지며 저지른 일이었다. 하늘을 나는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사실은 택시를 타고 온 것이었다.


버드맨. 그는 리건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는, 히어로물 같은 자극적인 영화를 계속 찍으며 돈과 명성이나 얻길 바라는 마음이다. 무대 대기실에서 포스터 속 버드맨은 리건을 내려다보고 있다. 버드맨 없는 리건 톰슨은 아무것도 없는 배우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리건은 필사적으로 버드맨을 벗어나려 한다. 연극을 성공시키면 리건은 ‘버드맨’으로의 연예인이 아닌 ‘진짜 배우’가 될 수 있다. 고로 연극은 리건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리건은 자신의 명성을 위한 공연 실적과 사람들의 평가, 신문 기사에 굉장히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 안의 버드맨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연극적 성공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들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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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실수로 인해 프리뷰를 망치고 버드맨에서 극복하지 못한 리건은 꽤나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노숙을 한 다음 날 아침, 그에게 버드맨이 말한다. 철학은 필요 없다고. 버드맨의 너가 최고라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든 세상의 위, 바로 이곳이 네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리건은 버드맨의 말을 받아들이고 바로 공연에 들어간다.

 

공연 1막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2막의 마지막 장면에서 리건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자신의 얼굴을 진짜 총으로 쏜다. 일순간 굉장히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마치 제 안의 버드맨을 뱉어내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난 존재하지 않아. 난 여기 없어.’라는 말을 하면서.

 

그리고 리건의 연극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병실에서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는 리건의 모습은 ‘버드맨’ 같다. 리건은 버드맨의 허물을 벗듯이 얼굴의 붕대를 푼다. 그리고 옆에서 변기에 앉아있는 버드맨에게 말한다. ‘잘 있어, 그리고 꺼져.’ 리건은 그렇게 버드맨에서 벗어난다.




불확실함 앞에 선 나에게, 당신들에게



영화 <버드맨> 안에는 객관적인 진실이 없다. 리건은 버드맨으로서의 성공을 외면하면서도 매몰되어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쏜다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는데, 운 좋게 살아난 듯 보이지만 결국 죽음을 택한다(사실 이 죽음까지도 확실치 않다). 연극에 대해 리건은 자신의 삶이 연극의 내용과 어딘가 굉장히 닮아있음을 느끼고, 평론가는 연극을 보기도 전에 악평을 쓸 것을 다짐하며, 어떤 관객은 ‘버드맨이 연극도 잘하네.’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진정한 예술과 할리우드 속 자극적인 예술, 그 예술들에 대해 평론이 미치는 힘, 이상적인 것에 대한 매몰. 그 모든 것들이 희미한 경계선으로 합쳐져 있는 영화다. 평론은 결국 누군가의 의견일 뿐이고, 예술의 진정성을 어느 것을 기준으로 나눌 것이며 리건은 결국 행복을 찾게 되었는가. 많은 질문이 떠오르는 영화이고 이 질문들은 감상자 각자의 주관적 해석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


「몬순」 속 유진과 태오의 사이는 단전된 아파트, 불이 꺼진 마루와 같다. 아이를 잃은 후, 이제 그들은 빛을 받으면 물결처럼 반짝거리는 베이지색 커튼을 볼 수 없었다. 소설 속 ‘그날’에 대한 불확실함은 태오와 유진과의 관계에까지 미친다. 태오가 유진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자신의 상상과 모호함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유진과의 대화가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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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건의 대기실 거울 속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빛난다.’ 리건은 자신의 거울에 이런 문장을 꽂아놨지만, 그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리건은 타인의 판단에 시달린다. 이 문장은 리건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설정한 어떤 이상을 좇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혼자 미쳐버리는 게 다 무엇인가. 어차피 세상은 모두 자기만의 해석을 가지고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불확정적이다. 불확실함 앞에 서 마주할 용기가 있음에 충분하다.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빛난다.

 

 

[진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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