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단편소설 읽기 - 02. 모래로 지은 집_ 최은영 [도서]

보이지 않는 이면
글 입력 2020.03.08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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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마른 몸으로 울던 모래를 떠올렸다. 그날 모래의 말과 눈물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닫게 됐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p.180 / 《내게 무해한 사람》


 

얼마나 삶을 살아야,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모래로 지은 집>은 문자 그대로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이라는 불안정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동시에 화자의 친구였던 ‘모래’ (은아)가 만든 그녀의 마음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은 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산다. 언제 어디가 내려앉을 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곳. 때때로 사람들은 이 불안정한 삶의 기반위에 서서 삶을 살아내곤 한다. 아슬아슬한 생의 모래집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모양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어떻게 살아가야 한 때 빛나던 반짝임을 혹은 전혀 가져본 적 없는 반짝임을 생에 피워낼 수 있는 걸까?

 


나는 차갑고 방어적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 사랑만큼 불공평한 감정은 없는 것 같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p.181 / 《내게 무해한 사람》


 

‘나비'는 모래를 바라보던 자신의 시선이 '자기 방어적이고 차가웠다’ 말한다. 모래에게서 보이는 때묻지 않은 여유로운 흔적들은 그녀가 가진 여유로운 배경에서 나오는 (나비와 공무가 가지지 못했던) 특권이었다.


하지만 유리하게 타고난 조건에도 불구하고 나약한 그녀의 유약함은 녹록치 않은 현실을 독립적으로 살아온 나비가 유일하게 모래에게 부릴 수 있는 오만이었으며, 동시에 질타의 대상이었다. 친구로서 그녀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깊은 내면 어딘가엔 늘 그녀에 대한 반감이 자리했던 걸지도 모른다.


모래의 편지를 읽고 보지 못했던 진실의 이면에 닿았을 때, 나비는 자신의 오만에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한껏 보이는 외면으로만 판단했던 독단적인 마음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한 또 다른 마음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서른 다섯이고 그때의 일을 자주 떠올리지는 않는다. 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해본 적도 없다. 누구나 살면서 몇 개의 다리를 건너듯이, 그때의 나도 공무와 모래와 함께 어떤 길고 흔들리는 다리를 건넜는지도 모른다. 다리의 끝에서 각자의 땅에 발을 내디뎠고, 삶의 모든 다리가 그렇듯이 그 다리도 우리가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다리 위에서 우리가 지었던 표정과 걸음걸이, 우리의 목소리, 난간에 몸을 기댔던 모습과 함께.


p.181 / 《내게 무해한 사람》


 

시간이 흐르고 감정이 사그라들 때, 그저 감정의 그림자만 가슴이 아닌 머리에 기억으로 남게 될 무렵이 되면 우리를 이루던 그 순간들은 빛을 잃을 테다. 빛을 잃고 바래져 하나의 조각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사라진 다리의 잔상이 나풀거린다.


삶은 흘러가고 시간이란 약이 들어 기억으로 흩어지더라도, 순간은 순간 자체로 어딘가에 남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심지어 자신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입을 뗄 수 없다. 그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그 감정은 어디엔가 여전히 존재하기에. 사람들은 그저 한때 그것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는 것…


그 사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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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179)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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