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번 더 문을 열고 음악을 들려다오 [사람]

글 입력 2020.03.04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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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보험설계사가 보험을 들기 전에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아주 세세하게 그려보라고 했다고 한다. 눈을 뜨고 아침에 일어나서의 풍경. 나에게도 어렴풋한 그림은 있다. 서재나 좋아하는 장소에서 글을 쓰고 내 이름으로 낸 책을 보고 미소를 짓는 사람. 강아지와 눈을 맞추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 무엇보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멋진 사람. 지금보다 테크닉도, 감정도 잘 살려서 표현하고, 음악을 즐기는 사람.


대학을 졸업하고는 졸업한 선배들이 활동하는 사회인 오케스트라에 가는 게 꿈꾸던 그림이었다. 재학생일 때는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렜고 부족한 실력에 가도 될지 긴장을 잔뜩 했다.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쁜 것도 잠시, 지금의 나는 1년간은 합주에 나가지 않은 상태다. 몸이 안 좋기도 하고 마음이 안 좋기도 하고. 개인적인 난국이다. 선배들이 있고 사회인으로 이뤄진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미지가 깨졌다. 20대의 풋내기 어른이 아닌 '진짜 어른들'이 있는 곳에 가면 그런 일은 없으리라고 기대했다.

 

 



 

처음 들어간 중앙동아리. 처음 보는 사람들, 처음 해 본 악기와 오케스트라, 연주회. 학부생으로 발 디딘 오케스트라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처음엔 너무나 좋은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한 시절도 있었는데, 제대로 된 착각이었다. 신입을 많이 챙겨주기보다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방관적인 마인드, 우리말이 서툴거나 말수가 없는 사람에게는 무관심한 사람들, 미투의 시대가 왔다면 큰 일 났을 얼굴과 몸매 평가, 음담패설을 일삼던 선배, 남녀가 조금이라도 친해 보이면 무슨 사이냐며 피곤한 소문을 퍼뜨리던 사람들, 이 사람 저 사람 좋아하는 마음이 LTE급으로 바뀌던 사람들, 고백을 확인이 아니라 통보로 일삼고 네 탓이라며 책임을 전가하던 사람들.


나를 재단하고 평가하고, 변덕스럽게 내던지는 사람들이 괴로웠다. 날카로워지고 작아졌다.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유가 있었겠지 생각도 해봤다. 결국 자신이 먼저이기 때문이었다. 상처 받기 싫어서, 내가 원하는 사람이나 뭔가를 얻기 위해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참다가 답답해서 털어놓으면 사람들은 그제야 몰랐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곤 했다. 병 주고 약 주고, 누워서 절 받는 기분이었다. 그 작은 곳에서 서로를 싱싱한 횟감이나 안줏거리로 만드는 걸 보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다. 그게 무슨 일이든, 얼마나 사소한 것이든. 여기저기 사적인 이야기를 퍼뜨리기 싫어 말하지 않았더니 이미 자기 좋은 대로 사람들한테 해놓은 이야기가 귀로 돌아왔다. 어느 동아리든 비슷하다고 전해 들었지만 그렇게 위안이 되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졸업을 할 때가 되어서야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하나둘 그때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서야.


*


지금까지 동아리에서 악기를 두 번을 바꾼 건 그만두지 않기 위해서였다. 알토 색소폰에서 테너로, 테너에서 바리톤으로 넘어간 건 혼자 있고 싶어서였다. 저음을 좋아했고 마침 자리가 비어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처음 그만두고 싶었을 때, 악기를 챙겨 집에 왔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는 너무나 즐겁게 대화를 하다가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오면서부터 느껴지는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다. 공기가 답답해 견디기 힘들었다. 이곳은 잊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악기를 오래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걸려서, 아직 들어주기도 별로인 내 악기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억울한 데 내가 떠나는 게 오기가 생겨서 다시 돌아왔다. 고민한 지 한 달 만의 결론이었다.

 

다시 동아리방의 문을 열 때는 당당하게 들어왔다.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은 무관심했고 다행이었다. 왜 돌아왔냐고도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왜 그만두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듯이. 물론 당사자는 나 때문에 그만두는 거냐며 지레 찔려 물어봤다. 나는 아니라고, 그렇게 믿고 싶은 것처럼 답했다. 그렇다고 말한다고, 그렇게 듣는다고 마음이 편해지진 않았을 테니까. 이후엔 겉도는 친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내 모습 같아서, 나처럼 만들기 싫어서 그 친구들 옆에 붙어있었다. 한국말이 서툴거나 원체 조용해서 혼자 있는 친구들. 그 친구들은 좋은 사람이었다. 놓치기 아까울 만큼. 이야기를 나눠보니 동아리에서 그 친구들도 많이 쓸쓸했다고 했다.


동아리에 남아있는 시간 동안 되새겼다. 마음을 비우자. 사람은 믿지도 말고, 기대해서 실망하지도 말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있자. 남은 건 악기와 연주회뿐이라고 생각했다. 말처럼 쉽진 않았다. 믿지 않아도 실망할 수 있었고 나도 모르게 마음을 썼다가 씁쓸할 때도 있었다. 여전히 동아리에 들어온 게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면서도 어리석은 일처럼 느껴진다. 다 함께 합주를 하고 연주회를 하면서 두근거리고 행복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심지어는 연주회가 끝나고도 즐겁지만은 않을 때가 생겼다. 익숙함 때문인지, 의지가 부족해서인지,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선뜻 답을 내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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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이다. 바로 이맘때부터 사회인 오케스트라를 쉬기 시작했다. 선배가 결혼을 한다며 청첩장을 준 뒤풀이 날 그 선배와 부딪혔다. 하고 싶은 말도 다 못 했고 말도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도 나는 그 선배에겐 이미 버릇없는 녀석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평소엔 잘 가지 않는 2차를 붙잡혀 가서는, 본인이 잘못 들은 말로 넌 옛날부터 버릇없다고 삿대질을 당했다. 아, 그 옛날. 기억한다. 재학생 때도 그 선배와 술자리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테이블에 있는 누구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굳이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지적을 한 그 선배가 야속했다. 이런 일을 다시 생기게 하나 봐라 다짐했던, 속이 상해 몇 날 며칠 괴로웠던 그날.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그렇게나 피하려던 일이 벌어졌다. 같은 선배,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었다.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속상하고 상처 받았다. 나도 모르게 눈이 그렁그렁 해져서는 무너지지 않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여기서 울면 정말 답도 없이 부끄러워지니까 버티자고. 그 사이에 이번에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누구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옆에선 미안하지 않아도 사과를 해야 할 때가 있다며 훈수를 들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른다면서. 눈이 마주치고도 영문을 모른 채 맥주나 한 입 먹어보라는 천연덕스러운 표정도 봤다.


그 순간 깨달았다. 예전에도 종종 느꼈던 기시감의 원인을. 이곳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이렇게 여러 명이 함께 앉아 있어도 나는 늘 혼자일 것이다. 다들 그런 사람들이었던 거다. 여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사람들. 내가 어느 날 말없이 떠나도 그러려니 할 사람들. 그런 무심한 사람들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내 말을 들어주길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그 기대만은 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붙잡고 버티고 있던 것들이 무너졌다. 이렇게 송두리째 무의미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꿈꾸던 미래가 헛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처음이었다. 거기까지만 하자.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


자리를 일어나려고 일으키는 몸이 쓸쓸해서 무거웠다. 이만 가볼게요, 하자 지휘자 선생님께서는 그런 말에 신경 쓰지 마라며 손을 잡아주셨다. 그 손이 야속했다. 무슨 말인지는 안다. 알지만 오늘만은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해해라, 신경 쓰지 말라는 말 대신 무슨 일이냐, 힘들었구나는 말이 듣고 싶었다. 집에 오는 택시에서 입술을 깨물다 방문을 여는 순간부터 펑펑 울었다. 너무 억울해서 나라도 속 시원해지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버릇없는 후배가 된 김에 선배에겐 장문의 글을 남겼다. 자세하게 설명하고 오해한 부분도 언급했다. 선배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잘 알고 나를 보기 불편하면 합주를 나오지 않을 생각도 하고 있다고. 그 장문의 글에 온 답은 미안하고, 합주 때 보자는 거였다. 그 선배가 내 글과 말이 너무 달라서, 글이 가식적이라고 했던 것 역시 기억한다. 선배에겐 그 글마저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 역시 선배의 답변이 진심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미안하다는 말보다 삿대질을 하던 눈빛이 뇌리에 선하다. 잘 맞지 않는 사람인 게 놀랍진 않다.


자책을 많이 했다. 한번 당했으면 됐지 왜 또 반복했을까, 애당초 왜 그 뒤풀이를 갔을까.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이 일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은 늘 그게 고민이었다. 그날의 술자리도, 필요할 땐 침묵하고 필요 없이 돌고 도는 말을 하던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하던 시간도. 졸업과 동시에, 직장인이 되어서 종지부를 찍었다 생각했던 일도. 나 혼자에게만 끝나지 않았다. 마음에도 역치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덜 부딪힐 줄 알았고 부딪혀도 덜 흔들릴 줄 알았다. 예전보다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런 일에 상처 받는 마음 역시 지긋지긋했다. 내가 과민반응인 건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맞다. 한 명 정도 없다고 절이 돌아가지 않을 리 없다. 일단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마침 교정을 위해 들렸던 곳에서는 오래 무거운 악기를 매고, 들고 다녀서 어깨 목이 망가졌다며 악기를 쉬라고 하셨다. 미련했다. 그 길로 사회인 오케스트라 합주를 나가지 않았다. 이제는 그만두는 법을 잘 안다. 말없이, 혹은 몸이 좋지 않다고 하면 된다. 그 사이에 거짓도 없다. 작별 인사를 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잊혀진다면 나의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눈으로 확인하면 잔인하겠지만, 그럼에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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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이 지났을 때쯤, 학부생 오케스트라 파트에 사람이 없다고 합주에 불려 나갔다가 지휘자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몸이 어디가 좋지 않은 거냐고 여쭤보셔서 말씀드렸다. 20-30살은 족히 더 많은 선배는 나를 불러 몸이 괜찮냐고 하시면서 혹시 그날 있던 일이 관련이 있냐고도 물어보셨다. 생각해보니 시점이 그렇다면서.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몸이 아파서 그만두는 게 주된 이유지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하지 못했다. 네가 없으니 심심하다, 다 지나가면 별거 아니라고 신경 쓰이면 자기 옆에만 붙어있으라는 말에 울컥했다. 파트 후배도 몸이 괜찮은지 걱정된다며 전화를 했다. 사실은 그 선배 때문이 아니라 무관심한 사람들이 더 야속했고, 그 사건 때문이 아니라 여태까지 8년간 누적된 상처가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서 그랬던 거라고는 이야기하진 않았다. 애초에 붙잡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않았으니까. 예측이 빗나갔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놀랐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걱정하는 목소리에 마음이 뭉클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사회인 오케스트라에 바로 돌아가진 않았다. 아직도 발걸음을 내딛기엔 고민스럽다. 사람들은 여전히 오해를 한다. 부딪혔던 선배가 나오지 않는 날 합주를 오라고 한다. 그것 때문이 아니다. 모두에게 생긴 거리감을 여전히 사람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여전히 나만 별거 아닌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나가면 별 일 아닌 일이, 남들도 다 겪는 일이라 해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겪고 있고, 나의 시간이 지나가는 중인 게 다를 뿐이다. 내가 이상하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해받지 못해도 그게 나이기 때문에 부정할 생각도 없다. 과민하다고 해도 좋고 별거 아닌 일에 쫌생이처럼 군다고 해도 상관없다. 별별 일이 많은 걸로 치면 누구보다 그리 뒤지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나는 혼자라는 생각에 빠지곤 할 것이고, 문제는 있을 것이다.


음악도, 사람도, 오케스트라도 닿을 수 없는 짝사랑을 하는 느낌이다. 오케스트라에 들어오려고 한 해를 꼬박 고민하던 과거의 나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 모든 일을 견딜 수 있겠냐고 물어보고도 싶다. 나보다 여기서 더 아픈 사람이 있을까 하다가 아, 한 사람 더 있겠구나 했다. 지휘자 선생님. 적어도 나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분. 선생님은 당황스러울 때 술자리에서 "나 지휘자야~"라고 하시곤 한다. 그렇다. 명색이 지휘자라는 이유로 쉽게 그만두지도 못하고, 오해를 받아도 티 내기도 힘들고. 나이 차이가 나면 그것 때문에 서먹해서 오해가 생기고, 나이가 비슷하면 또 이해관계나 자기주장 때문에 선생님과 부딪히고 혼자 고민이 많으셨겠지. 머릿속을 스쳐가는 사건도 몇 개 있고. 위치가 위치인지라 안티가 제법 많았다. 선생님이 걱정되면서도 잘 버티실 거란 확신도 있었고, 선생님을 든든하게 지지할 만반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모른다. 침묵 속에 안타까움과 응원이 있었다고 할지언정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나 역시 그때 선생님에게 한 마디 건넸어야 할지도 모른다. 선생님 역시 이곳에서 늘 혼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셨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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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오랜 세월 자발적 노예라는 이야기를 듣는 같은 색소폰 파트의 선배에게 어느 날 물었다. 선배는 이렇게 바쁜 틈을 내서 지금까지 연주회를 하는 원동력이 뭐냐고. 선배의 답은 지휘자 선생님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님 덕분에 악기도 배우고 감사한 일이 많다고. 나 역시 선생님께 감사한 게 많다.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순간마다 선생님 덕분에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해보자 싶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뻐근하고 눈물이 고이는 일이 많은데도 한 번이 늘 나를 잡았다. 그날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나가던 그날 잡아주신 손도 그런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지휘자라서가 아니라, 어른이어서가 아니라, 같은 마음을 느껴본 한 사람이어서일지도 모른다.


글을 쓰면서 너무 힘들었지만 후련하다. 무뎌지긴 글렀다. 그만두려고 고민했을 때마다 당당하게 문을 열었던 순간처럼 지금의 내게는 약간의 시간과 패기가 필요하다. 부딪히는 건 피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나를 싫어하며, 다른 일부만 나를 붙잡아주는 사람들이다. 상처를 받아 날카로워지고 작아졌지만 나와 정말 맞지 않는 지점, 건드리면 치명상을 입는 지점을 알게 되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할 때, 말과 행동이 다를 때, 오해와 소문에 시달릴 때가 그랬다. 아직 모르겠다는 말을 가장 많이 썼다 지웠다. 마음에 안 들겠지만 답은 알고 있다. 나를 붙잡아준 지휘자 선생님, 선후배들이 있어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적당히 무관심하고 적당히 집요하다. 그러니 한 번 더 문을 열어보자. 그렇게 수많은 문을 열다보면 흐릿하기만 했던 멋진 중년의 색소폰 연주자가 서있을 것이다. 아직은 영영 그 문을 닫고 작별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애당초 답 없는 짝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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