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이루는 것들

기다림은 그로써 모든 가치를 다한다.
글 입력 2020.02.2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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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기다림의 경험은 존재한다. 기다림이란 겉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 적극적이고 동적인 행위이다. 주변의 시선과 상관없이 기다림이 얼마나 가치있는 모습인지를 영화 터미널에서는 잔잔한 웃음과 함께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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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과 무시의 사이.


 

미국으로 오는 비행중에 자신이 속한 국가 크라코지아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무정부 상태가 되어 빅터는 뉴욕 공항 터미널에서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그는 이 기다림이 9개월이 되도록 계속될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것은 공항 터미널 고위 관리자인 딕슨도 마찬가지다. 빅터에게 이도저도 못하게 된 심각한 상황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빅터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또 일방적으로 전달한다. 딕슨은 빅터와 소통하려는 적극적 의지 없이 간단한 생필품과 함께 빅터를 터미널로 밀어넣는다. 딕슨의 행동은 애매하기 그지없다. 빅터를 심하게 인격모독하지 않았고, 법적으로 합당안 행동을 한 것 뿐이지만 그의 무심한 행동은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무시의 행동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의 무심함은 빅터가 터미널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경계로, 빅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협박으로 커져나간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단 하나의 위법적인 행동도 하지 않고 제 할일을 다하는 딕슨보다 터미널을 누비면서 온갖 너저분한 일을 벌이고 다니는 빅터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우리가 현실에서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무심과 무시, 또는 그 사이의 두려움과 불쾌함을 우리는 그에게서 발견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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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에서 얻은 충만함.


 

빅터는 처음 뉴욕 공항에 떨어졌을 때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그런 그가 공항 제일가는 인싸가 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간단하다. 그는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었다. 제공받은 식권을 잃어버린 빅터는 무언가 먹을 것을 사기 위해 공항 곳곳에 놓여진 카트를 모아서 쿼터(0.25달러)를 모은다. 자신이 들고온 관광책자 영어판을 구매해 밤이 되면 영어를 공부한다. 공항안에 있는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이 그와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 되고 그런 그의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사람이 생기기 시작한다.


넘어진 사람을 돕고 자신을 필요로하는 사람의 요청을 들어주면서 터미널 안에서 빅터는 애정과 믿음을 키워나간다. 공항의 공사장에서 능력있는 직원으로 (비공식적으로) 채용되어 안정적으로 돈까지 벌게된다. 큰 야망이 아닌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금전, 편안한 환경,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두루 충분하게 갖추게 된다. 이는 딕슨과의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결국 딕슨도 빅터가 공항을 나갈 때 슬쩍 눈감아 주게 된다. 아무것도 없던 빅터가 두손 가득히 공항을 나서게 되기까지 나는 속으로 나도모르게 많은 응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We all wait. 기다린 당신에게 박수를.


 

빅터가 자신의 국가 크라코지아의 전쟁이 끝나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뉴욕에 발을 디디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무엇이 그의 기다림의 종착점이 었을까.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 빅터가 뉴욕에 오려고 했던 이유가 한 재즈 음악가의 사인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에 적잖이 실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실망했던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항상 작은 것에도 의미를 찾는 사회에 신물이 나있는 상태였다. 무슨 행동을 하든 번지르르한 목적이 있어야 하고, 보여주기 위한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꼈다. 그런 나조차 빅터의 행동에 가치를 메기고 멋대로 실망해 버린 것이다.


9개월의 기다림 끝에 빅터는 원하던 음악가의 사인을 받고 공연장을 나온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빅터는 택시를 잡아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박수갈채와 환호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만의 목적을 이루고 삼삼하게 돌아가는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각자가 이루려는 것의 가치는 자신만이 판단할 수 있고, 또 그것을 통해 자신이 가장 당당해 질 수 있다는 것. 영화를 감상하면서 빅터의 기다림을 든든하게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라 느꼈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감정의 폭포를 지나간다. 기다리는 동안 많은 것들을 잃기도 하고 뜻밖의 것을 얻기도 한다. 기다림의 크기 만큼 결과가 크지 않은 때도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기다림을 시작한다. 지금의 기다림이 또 다른 설렘의 기다림이 될 때까지.

 

 

[추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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