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관객이 영화를 지배하는 법 [영화]

: 관객의 선택이 곧 영화가 된다.
글 입력 2020.02.19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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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 우리는 주인공을 욕하곤 한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로 시작하여,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주인공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어떤 일종의 연민으로도 이어진다. 예를 들면 공포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꼭 가지 않아도 되는 위험한 선장, 집에 들어가고 좀비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열면 좀비 때가 있을 만한 곳을 호기심에 열어보곤 한다. 뭐 그러다가 꼭 한 명 죽고 후회하더라. 그런 주인공의 모습이 영화 속에 담기면 관객으로서는 답답할 뿐이며 그들을 멍청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으스스한 산장,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죽지 않아도 되었고, 좀비 때가 있는 곳을 열지 않았다면 자신의 친구가 좀비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 또한 가정법의 영역일 뿐이다. 하지만 한 영화의 스토리 안에서 사유하는 관객은 가정법으로만 그 영화를 공감할 수밖에 없다. 결국,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모두 후회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영화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감독이 작품에 관객에게 선택 권한을 주는 영화부터 관객이 주인공의 선택을 이끌 수 있는 영화까지 영화의 스펙트럼은 점차 넓어지고 있으며 이야기 제공이란 영화적 한계를 넘어서는 영화적 소통의 현장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여러 가지 결말 중에서 관객이 원하는 결말을 선택할 수 있는 영화의 시작은 바로 자코 반 도르말(Jaco Van Dormael) 감독의 ‘미스터 노바디(Mr. Nobody)’란 작품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2092년 세포의 개발로 그 누구도 죽지 않는 세상이 된 사회에서 118살의 노바디가 인류 사회에서 마지막으로 늙어 죽는 인간이 된다. 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해 달라고 부탁을 하자 그는 자신의 인생사를 고백한다. 영화 ‘미스터 노바디’는 삶의 연속된 선택 속에서 그 선택의 결과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에 대한 정보 없이 보게 된다면 영화 중반부에서 이 영화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혼란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초반의 아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엄마를 따라갈 것인지 아빠를 따라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들이다. 선택들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송두리째 바꿔버리나, 그 삶에서 자신이 왜 이토록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생각하다가 결국 자신의 삶 속 수많은 선택 가운데에 이때부터 자신의 삶은 잘못된 것 같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9가지의 인생을 보여주지만 결국 그 사람이 산 인생은 하나의 삶으로 마무리가 된다. 나머지 8가지의 삶은 살 수 없는 것이다. 주인공은 망각의 천사에게 인도를 받지 못했다. 자신은 그 선택을 내렸을 때 자신에게 어떠한 삶이 펼쳐지는 자기 삶의 결말을 모두 알고 있다. 결국 자신의 삶 속의 결말을 알고 그가 선택한 1가지의 방법 속에서 결국 그가 행복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 그는 최장 시간상 사람으로 가족이 되었다. 아니 인류에서 마지막으로 죽는 인간이다. 결국 그가 1가지를 선택했다는 것은 다른 삶 속에서 짧지만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혼자 마지막의 인류가 되는 것을 선택한 것과도 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삶의 연장이 최후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영화는 불편한 영화의 흐름 속에서 흘러간다. 기존의 영화와 같이 그저 시간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영화가 아닌 이야기의 처음, 중간, 결말 등의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을 담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는 이야기는 대체로 시간의 순서로 흘러가지, 역행하거나 아니면 퍼즐로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나마 이야기의 순서가 변할 때는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끝이다. 결국 이 영화는 영화 자체의 순서가 퍼즐 조각과 같이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모르는 순서로 흘러가기 때문에 관객에게 지속적인 불편의 감정을 준다. 관객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9가지의 삶을 계속해서 봐야 하고 그 가운에서 결국 어떤 삶이 좋은 것인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모든 인생은 의미가 있다는 영화적인 결말은 9가지 인생을 아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에 대한 회의을 느끼게 한다. 이 영화가 인생의 선택지에 관해서 서술하고자 했다면 이 영화의 시작점은 118살이 된 ‘노바디’의 입장에서 영화가 서술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9살의 어린 꼬마의 입장에서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으로 이야기가 돌아오는 것이 더욱 옳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자기 삶의 모든 결말을 알고서 결국 9살로 이야기가 돌아왔을 때 당신이 주인공이라면 결국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영화적인 메시지와 연출과도 일맥상통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영화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나의 오류이지만 좋은 영화를 볼 때는 나쁜 점을 뽑아내려고 하고, 좋지 않은 영화를 볼 때는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 나의 습관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평을 한 것이다. 삶을 다루는 영화의 특성은 관객에게 지속적인 교훈을 주려고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보고 관객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인생을 교훈에 맞게 인생을 편집하고 관객이 그 교훈만을 느끼게 만드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그런 실수를 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엔딩은 물론 상징적인 멘트를 이용해서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는 하였지만, 영화의 플롯이 기존과 같은 방향이 아닌 작품에서 일종의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적어도 관객이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를 만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멘트와도 같았다. 감독은 이 영화의 대본을 7년이나 작성했다고 한다. 결국 7년간에 그가 담고자 한 것은 기존 영화와는 다른 플롯의 서사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그 이야기를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영화 자체에 기존의 것을 바꾸려고 하는 감독의 의도 자체에 이 영화는 칭찬을 받아 마땅한 영화이며 영화의 큰 구고 또한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낸다는 것에서 단순한 인생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꽤 잘 만든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다.

 

‘미스터 노바디’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국 그는 118살 이후의 죽지 않는 사람들에게 과연 뭐라고 기록이 될 것인가. 그의 인생을 설명하는 대에서 결국 그는 그저 인류에서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기록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그의 8가지 인생 스토리에 사람들이 과연 관심을 가질까 하는 것은 영화에서 나오지 않는다.

 

영화는 굉장히 창의적인 매체이다. 다른 예술에 비해서 접근성이 좋은 장르이다. 그런 만큼이나 감독, 저자의 역할이 중시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야기의 서사에서 관객을 계속해서 밀어내는 연출은 자시의 이야기가 객관적으로 관객에게 다가가기를 원해서 하는 것이지만 이 영화는 오히려 관객을 밀어내기보다는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가지고 왔어야 하는 영화가 아닌가란 생각을 한다.

 


 


영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는 영화 ‘미스터 노바디’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관객을 참여하게 하는 영화다. 두 영화 모두 결국 선택에 대한 내용이고, 그 선택의 무게에 대한 내용이다. 영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에 앞서, 블랙 미러는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영국 SF 드라마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변화된 과학으로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 디스토피아적인 주제관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이다. 이번에 만들어진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는 드라마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오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직접 참여하게 만드는 인터랙티브 영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영화 ‘미스터 노바디’와 같이 모든 결말의 엔딩을 보여주고 어떤 삶이 좋은가를 선택하게 하는 영화가 아닌 관객이 직접 게임과 같이 주인공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게 하면서 영화의 결말을 직접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도 결국은 정해져 있는 플롯에 따라서 영화가 진행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영화의 초반에서 말한 것과 같이 주인공의 행위에 나라면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텐데라는 사유에서 벗어나 결국은 자신이 선택한 것의 최후를 맞이하게 되므로 그 엔딩이 좋든 싫든 허무하든 아니든 그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인터랙티브 비디오를 경험하는 것은 대부분 영화가 아닌 온라인의 주로 게임과 같은 곳에서 진행이 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일종의 실험과도 같은 기능을 한 것이다. 영화 ‘블랙 미러’는 미래 사회의 과학의 발전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연출 기법을 사용함으로 영상이라는 한계에 국한되지 않으려는 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블랙 미러’는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린다. 미래에는 어떤 식으로 변화되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모습이 생길까에 대한 그런 비관적인 모습을 담았다면 이 영화는 1984년에서 보이는 과학의 발전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결국 본래 드라마 ‘블랙 미러’에서 추구하였던 부분과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의 일종 충돌이 생기게 된다. 드라마 ‘블랙 미러’의 전 편을 보았기에 그런 느낌이 강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이 영화는 단순히 드라마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과 드라마 블랙 미러의 팬층을 이용하는 상업적인 영화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블랙 미러’는 다양한 미래 사회를 보여주지만, 그 미래 사회로부터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과연 우리 사회는 다른냐고 질문을 던지는 구조였다. 반면에 이 영화는 과거에서 우울하고 그 우울함의 선택이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만들어지고,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과 우리 시대의 과학적인 격차로 인해서 이 영화에서 생각하는 과학의 디스토피아적인 사유를 현실로 가지고 와서 사유하지 못하게 된다.

 

영화는 굉장히 획기적인 선택을 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안에서 관객에게 선택의 책임을 전가했다는 이유가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영화 스토리가 부실할 수밖에 없는 핑계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영화 ‘미스터 노바디’는 영화적인 플롯이 복잡하고 그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의 삶은 굉장히 단편적이지만 기억을 지우는 천사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하지만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관객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모두를 위한 예술이다. 접근성이 낮으며 2시간의 시간과 볼 장소만 있다면 영화는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어디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영화의 장점이자 영화의 단점이기도 하다. 관객은 자주 접할 수 있는 만큼이나 까다로워졌으며 새로운 것을 원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 영화다운 것을 버린다면 그것은 영화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일까. 새로움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영화다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도 결국 영화인으로서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박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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