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대는 또 다른 나였음을,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공연예술]

길 잃은 날 데리러 돌아갈 곳, 나의 여신님인 ‘또 다른 나’
글 입력 2020.02.18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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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연이라도 그날그날이 다르고, 이번 시즌과 저번 시즌이 다르다. 매일 변화하는 공연뿐만 아니라 같은 영화를 봐도 언제 보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지는 걸 보면, 작품의 변화보다는 변화하는 ‘나’로 인해 느끼는 것이나 와 닿는 부분이 달라진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공연을 봐도 매번 다른 감상을 곱씹으며 왜 그렇게 느꼈는지 추측해보는 것도 공연예술의 매력 중 하나다.

 

나의 경우에는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가 그렇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한국전쟁 중 무인도에 고립된 북한군과 남한군이 서로 등을 돌린 채 싸우다 ‘여신님’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 함께 화합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작품을 사랑해왔는데, 특히 군인들이 각자의 여신님을 떠올리는 에피소드에 크게 감동했다. 남한군 ‘석구’가 군에 징집되기 전 짝사랑하던 누나를 떠올리며 부르는 ‘꽃봉오리’, 또 북한군 ‘주화’가 동생과 함께 춤을 추며 꿈꾸던 시절을 떠올리는 ‘원 투 쓰리 포’의 아름다운 가사와 선율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나의 여신님은 누구일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누구인가 돌아보곤 했다.


“길 잃은 날 데리러 난 돌아갈 곳이 있어”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번 시즌 공연을 관람한 후에는 계속 이 가사가 마음에 남았다. 이 가사는 공연의 후반부에서 ‘동현’이 부르는 ‘돌아갈 곳이 있어’라는 넘버에 등장한다. 동현은 위협적인 북한군 상위인 ‘창섭’의 부하로, 나이는 어리지만 군인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온 인물이다. 극의 후반까지 동현은 그저 창섭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충직한 군인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동현은 이 넘버를 통해 목적을 잃은 채 ‘전쟁’이라는 주어진 책임만을 수행하다가 길을 잃은, 낯설어진 나를 마주했음을 고백한다.

 

이는 비단 동현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무인도의 여섯 군인 모두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이며,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이들이 여신님이라는 존재를 통해 ‘나’를 찾아 돌아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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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아이히만은 전체주의 체제에서 보편적인 판단 능력을 거세당한 채 폭력과 인종 학살에 순응하며 따른 ‘평범하고 충직한 관료’였다는 것이다. ‘창섭’과 ‘동현’,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북한군 ‘순호’와 여리고 다정한 ‘주화’, 영리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난 남한군 대위 ‘영범’과 마치 친동생처럼 영범을 따르는 부하 ‘석구’까지, 무인도의 군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군인들은 개인의 사유를 잃어버린 채 주어진 상황에 따랐고, ‘누구를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게 불안과 분노를 키워갔다. 둘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던 군인들은 ‘그저 살기 위해’ 자기 자신 외의 모두를 경계하며 신경을 곤두세운다.

 

 

“불타는 절망과 재가 된 희망

… 막연히 구원을 구걸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뺏는다

… 끝없는 불안은 증오로 변하고 길 잃은 분노는 내게로 달려와 나를 물어뜯는다

…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해도 더는 인간이 아니라 해도”

 

- ‘그저 살기 위해’ 중

 


군대라는 시스템을 벗어나 탈영하자는 형을 밀쳐내다가 형을 잃은 순호는 매일 밤 그 악몽에 시달린다. 창섭의 명령으로 배를 고쳐야만 하는 영범은 배를 고칠 수 있는 순호를 구슬리기 위해 ‘여신님’을 만들어낸다. 순호는 여신님을 위해 군인들의 부탁을 들어주며 배를 고치기 시작하고, 군인들은 여신님에게 푹 빠진 순호가 배를 빨리 고칠 수 있도록 모두 여신님이 보이는 척 제단도 만들고 규칙도 세운다.


 

“꿈이 아파 잠들지 못하는 밤

작은 숨소리마저 아려와 그림자 뒤로 숨고만 싶은 밤

… 보이지 않아도 만질 수 없어도 내 안에 숨 쉬는 여신님을

… 미움도 분노도 괴로움도 그녀 숨결에 녹아서 사라질 거야

 

- ‘여신님이 보고 계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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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란한 생활에 익숙해진 군인들은 점점 여신님에 각자의 소중한 이들을 투영한다. 석구는 짝사랑하던 누나를, 주화는 끔찍이 아끼는 동생을, 창섭은 북에 홀로 남아있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전쟁으로 가려진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풀어낼 때 그 인물 홀로 무대에 서게 하지 않는다. 인물이 자신의 여신님을 떠올릴 때, 나머지 군인들은 코러스로 함께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며 석구와 함께 석구의 누나를 애절하게 바라보고, 주화의 동생과 함께 춤을 춘다. 때문에 이들이 여신님이라는 상상에 점점 빠져드는 모습과 서로를 국가에 속한 군인이 아닌 한 ‘사람’으로 공감하며 정을 쌓아가는 모습이 더욱 설득적이다.

 

극 내내 창섭의 뒤를 쫓으며 본인의 이야기는 꺼내 놓지 않던 동현도, 여신님을 통해 ‘재가 된 희망’에 다시 불을 붙인 군인들을 보며 자신의 여신님을 떠올린다. 전쟁이 발발하자 동현의 가족은 남한으로 떠났고, 인민군에 남은 동현에게는 가족과 이별하던 장면이 악몽처럼 되풀이된다. 결국 동현은 가족을 찾아 남으로 가기 위해 창섭에게 간절히 허락을 구하지만, 창섭은 극구 반대한다. 순호도 여신님 곁에 남아 북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자 창섭은 여신님 제단을 부숴버리고, 화목했던 무인도는 다시 냉랭해진다.

 

여신님에 가장 회의적이었던 동현은 무대에 홀로 주저앉아 ‘돌아갈 곳이 있음’을 다짐하며 망가진 여신님 제단을 다시 쌓아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다. 다른 인물들도 다시 무대에 나와 지키지 못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못다 한 많은 말들을 나누기 위해, 각자의 여신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노래한다.


 

“주어진 길만을 따라서 달려온 그 끝에는 낯선 내가 서 있다

길을 잃은 줄도 모르고 달려온 그 끝에는 낯선 내가 서 있다

나아갈 수도 도망칠 수도 없어 외면했던 마음 그 마음을 찾아

… 길 잃은 날 데리러 난 돌아갈 곳이 있어

 

- ‘돌아갈 곳이 있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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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돌아갈 곳이 있다’고 외치는 와중에, 끝까지 순호는 보이지 않는다. 순호는 동떨어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여신님에게 ‘널 믿는 척하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비관한다. 그런 순호에게 여신님은 전쟁과 싸움 너머에 누가 있는지를 보라고 말한다. 트라우마로 인해 현실을 회피해왔던 순호는 전쟁터 속에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가슴 속 쌓여온 진실’을 마주한다.

 

순호의 여신님은 바로 ‘또 다른 나’였다. 다른 인물들의 여신님 또한 '소중한 누군가'이기도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또 다른 나’일 것이다. 순호는 전쟁이라는 눈앞의 상황 때문에 외면해 왔지만, 자신의 내면에, 또 그들의 내면에 여신님, 즉 타인을 위하는 마음과 희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순호는 여신님을 믿고 트라우마의 두려움을 이겨내어 군인들에게로 돌아간다.


 

“저들을 봐요 왜 저토록 힘겹게 싸우고 있는지를 봐요

저들을 봐요 그 너머에 있는 당신의 사람들을 봐요

… 우리가 함께 한 날들을 잊지 말아요

이 모든 시간의 의미를 그대가 찾을 수 있다는 걸

이제 겁내지 않아요 그대는 또 다른 나였음을

 

- ‘보여주세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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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를 공격하러 온 정찰선을 돌려보내기 위해 무인도의 군인들은 다 함께 힘을 합친다. ‘누구를 위해’와 ‘여신님이 보고 계셔’가 변주되는 마지막 넘버 ‘누구를 위해 리프라이즈’에서 군인들은 서로를 위해, 여신님을 믿으며 나아간다. ‘나’를 괴롭히던 길 잃은 분노는 외면해왔던 사랑의 마음인 여신님을 만나 사라졌고, 이제 군인들은 그 마음을 기억하고 믿으며 서로를 위해 연대한다.

 

전에는 나의 여신님,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이가 누구인지에만 초점을 맞췄었다. 지금은 시야를 조금 더 넓혀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나의 마음, 또 다른 ‘나’인 여신님도 기억하려 한다. 혹여나 차가운 현실에 길을 잃은 나의 분노가 나를 삼키려 하지는 않는지 경계하려 한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과 희망이 어딘가에서 보고 있음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사유하며 상상하려 한다. 그 상상의 힘을 믿으며 희망 속에 살아보려 한다.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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