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 [영화]

글 입력 2020.02.16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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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시대는 신분이나 명예 같은 것들로 서열을 매겼다. 태생적 지위로 위계가 확정됐다. 혁명이 발생했다. 다수가 혁명에 동조했다. 혁명의 구체적 성분을 몰라도 됐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 같은 감각. 나를 억압하는 것들에게서 해방되는 것 같은 감각, 그것만으로 혁명에 동참할 수 있었다. 봉건 질서는 무너졌다. 천부인권설이 도입됐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다는 구호였다. 서열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금방 새 체계가 생겼다. 봉건 시대의 신분, 명예가 차지하던 위상을 이제 돈이 대신했다. 가시화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위계는 돈의 유무에 따라 재편됐다.

 

서구는 소설의 기원을 <돈키호테>로 간주한다. <돈키호테>는 봉건 질서가 붕괴하고 자본을 통해 새로운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을 모두 기록했다. 당대의 현실을 반영했다. 그래서 기원이라 간주된다. 소설은, 좋거나 싫거나 천박하거나 법석이거나 현실을 구체적으로 관찰한 기록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것. 시는 소설과 결이 다르다. 시는 언어 본연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구사되는 양식이라 치부된다.

 

소통은 마음과 감정의 교류가 전제되는 행위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소통한다. 그것으로 내 마음과 감정을 타인에게 드러낸다. 유대를 형성한다. 언어는 타인과 관계 맺는데, 관계를 넘어 집단을 이루는데 유효하게 작동한다. 언어는 동시에 관계를 해치고 집단을 붕괴한다. 그것은 종종 오해를 촉발한다. 악의를 유포한다. 언어는 감정의 진폭과 여진, 내가 느끼는바 모두를 반영하기엔 지나치게 협소한 그릇이어서다. 의도와 무관하거나 실상과 판이한 언어를 잘못 구사해 타인의 마음을 해친다. 당신을 사랑하는 감정을 겨우 ‘사랑한다’라는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음 또한 언어의 비극이다. 언어는 한계를 내포한다.

 

시는 이 한계를 극복하려 시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의 목적은 하나다. 언어와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 내 마음 혹은 내가 감각하는 바가 당신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위해선 보통의 언어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쉬이 부서져 당신 마음에 가 닿지 못한다. 때문에 시인들은 시를 쓴다. 시가 문학 양식 중 가장 유장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건 그래서다. 김선우 시인은 ‘문학과 사회, 운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시는 어쩌면 소설과 유사하다. 현실을 영위하는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구석에 도사린 어둠을 마주한다. 상처를 호소하는 개인, 부조리한 것들, 앙상한 시스템으로 이뤄진 사회를 대면할 수밖에 없고 시인은 시 언어로 그것을 복원한다. 내가 목도한 것이 감각으로 각인되도록. 그리고 시를 읽는 당신에게도 오롯이 전달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시를 쓴다. 김선우 시인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 말한 건 이런 맥락처럼 보인다.

 

소설과 시가 문학의 전부는 아닐 테다. 주류는 될 테다. 구병모는 인터뷰에서 ‘문학은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탄생하는 것’이라 말했다. 구조 혹은 인간에게 상처 입은 이 들이 즐비하고, 환부를 보여줘도 어떻게 진단할지 여념일 뿐 상처 입은 자의 고통에 연민하지 않는 시대다. 그래서 불만의 음량은 이제 넋두리의 차원이 아니다. 동정하는 이들이 있지만 결국 그들이 느끼는 동정의 성질이란 ‘나와 무관하고, 앞으로도 무관할 거다’란 감각 정도다. 구병모가 포착한 ‘현실에 대한 불만’은 이 지점이다. 구석에 처박힌 이들이 어떻게 불만을 제기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사회나 시대가 어떻게 무시하며 경계하는지 언급한다. 문학의 본질은 앞서 구병모가 말한 내용과 가깝다. 내 생각과도 일치한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 또 현실을 반영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시간은 변화를 동반하여 흐르고 변화는 고통을 내포한다. 사회는 시간이 누적되며 변했다. 지금도 변하고 있다. 때문에 아픔이나 고통이 종말된 사회는 있을 수 없다. 문학이 기록이자 새로운 언어라면 이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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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포스티노>와 문학적 순간

 

마리오는 백수다. 거리를 활보하거나 소일거리 정도에 몰두한다. 노동하여 자급자족 할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냐는 아버지의 추궁에 우체국에 취직한다. 용돈 수준의 급여를 받고 노동 규모 또한 작다. 섬 내 망명한 시인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임무가 태반이다. 마리오가 시에 관심 갖는 계기는 인기 시인 네루다와의 유대를 이룩하기 위함이다. 그가 시를 쓰는 계기 또한 좋아하는 여인의 마음을 현혹하려는 목적에서다. 마리오에게 시는 수단이었다. 목적이 있었고 시는 목적을 성취하는 데 기여하면 그만이었다.

 

마리오는 이성을 유혹하는데 시를 동원하지만 그 때부터 시의 본질을 감각한다.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바는 언어로 구체화되지 못한다. 마리오는 자기 마음을 좀처럼 언어로 치환하지 못한다. 언어는 어렵다. 제한적이다. 당신이 내 언어를 어떻게 번역하여 이해할지 알 길이 없다.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시를 배운다. 시를 통해 자기 마음을 언어로 온전히 전달하는 법을 고민한다. 이성의 마음에 드는 시를 구사하는 차원을 넘어서 내 마음과 감정을 언어로 공고히 하는 법을 자문한다.

 

네루다는 망명생활을 마무리하고 조국으로 귀환한다. 네루다가 강의한 내용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마리오는 시대의 문제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무구한 개인이었던 그는 시 쓰는 법을 고민하며 시스템의 폐해를 깨닫는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 공정함을 주창하면 도리어 역정이 돌아오는 사회에서 그는 사회주의자가 된다.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에 따라 위계가 매겨짐을 학습한다. 지배체제가 어떻게 개인을 착취하는지 깨닫는다. 사회주의자였던 네루다를 계승하고 추억하고 싶어 사회주의자가 된 것일 수도 있다. 노동자에게 착취의 구조를 알려주지만 노동자는 스스로의 자유의지임을 천명하며 마리오에게 일갈한다. 그 순간 마리오가 반박하지 못한 건 그가 네루다의 영향을 받은 어설픈 사회주의자라는 증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리오는 변했다. 시를 배우며 어설프더라도 시대를 관통하는 눈이 생겼다.

 

그는 사물이나 현상을 녹음한다. 네루다와의 추억을 소환하기 위한 목적 뿐 아니라 자기 사위의 세계를 좀 더 확실히 감각하고 싶다는 마음의 발로다. 그제서야 그는 진짜 시인이 된다. 세계를 더 정확히 보고 싶다는 마음은 시인이 매번 시를 쓰며 체감하는 바다.

 

마리오가 자기 시를 발표하기 전 죽음을 맞이하는 건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시를 써 세계의 견고한 어둠을 드러내도 사위는 금방 바뀌지 않는다. 시인은 그래서 고통스럽다. 자기 이상과 구체적 현실의 격차는 거대하고 주변의 인간들은 종종 구태여 어둠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는다. 시인의 이상은 실천될 수 없다. <일 포스티노>가 마침내 시인이 된 마리오의 죽음으로 서사를 갈무리하는 건 마리오를 비롯한 시인들의 시적 이상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인 셈이다.

 

문학과 문학적인 것은 다르다고 했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 산물이라면 문학적인 수행은 현실을 반영하고 세계를 직시하는 노력쯤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마리오가 사위의 현상을 녹음한 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기에 문학적 수행이 될 거다. 내가 그런 문학적 실천을 하며 문학적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는 겁쟁이기에 직시하려는 노력보다 이미 정착된 구조에 편입하려고 애쓰는 인간이다. 배가 침몰했을 때, 그는 ‘세월이 가면’ 노래를 개사해 ‘세월호 가면’으로 불렀다고 말했다. 나는 웃음으로 동조한 적 있다. 그는 역겨운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와의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농담으로 치부하고 웃음으로 동참한 나는 더 역겨운 인간이다. 문학은 관통과 직시의 다른 언어일테다. 나는 문학적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일 포스티노>는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마리오 같은 인간이 될 수 있을지. 나는 마리오는커녕 거기 부유했던 바닷물에도 이르지 못함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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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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