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욕망’을 재밌게 풀어내다 - 체홉, 여자를 읽다 [연극]

글 입력 2020.01.2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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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의 아내', '아가피아', '나의 아내들', '불행'이란 제목이 붙은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체홉하면 떠오를법한 인간에 대한 관조적인 시선, 그럼에도 놓치지 않는 유머감각을 반복되지 않게끔 다양한 상황으로 지루하지 않게 풀어냈다. 에피소드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약사의 아내'는 늦은 밤, 남편이 자고 있는 사이 군 장교들과의 짧은 만남을 보내는 약사 아내의 이야기다. 한밤의 외도로 지루함을 떨치는 여성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가피아'에서는 점잖은 아내 아가피아가 동네 한량 사프카에게 매력을 느낀다. 두 사람은 비밀스런 만남을 이어가던 도중 갑자기 일탈을 벌인다.


'나의 아내들'은 7명의 아내를 살해한 라울 시냐브로다가 자신이 왜 아내들을 살해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극이다.

 

'소피아'는 남편의 친구와 위험한 관계가 되기 직전의 여성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점차 불륜을 넘어 홀로 일어서는 과정을 그려낸다.


 

 

솔직한 여자들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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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한 몸이고요,

딸도 있고요.

정말 이 모든 사실이 아무렇지 않아요?


 

이 연극에선 ‘불륜’이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그리고 불륜의 주체는 여자들이다. 여자들의 불륜은 대사를 통해 과감해지고 솔직해진다. 이때, 울려 퍼지는 기차 소리와 어두운 조명이 그들의 행동에 은밀함을 더해준다. 그래서 이 연극에서 ‘불륜’이란 가장 솔직하면서 비밀스러운 행동이다.

 

나는 극 중 주인공들이 각자의 욕망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점이 재밌었다. ‘약사의 아내’의 경우 어느 새벽 처음 본 군의관에게 반한다. 그는 일말의 죄책감 혹은 망설임 없이 군의관에게 설레는 감정을 곧바로 표현한다. 아가피아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곤 있지만, 죄책감만 있을 뿐 사프카에 대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사프카의 절친한 형이 보는 앞에서 사프카와 애정을 나누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반면 소피아는 ‘불륜’을 대함에 있어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다. 소피아는 일리인에게 자신이 유부녀이자 자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재차 말하면서, 일리인과 좋은 친구 사이임을 확인한다. 이처럼 그는 일리인을 좋아하지만, 남편과 자식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일리인에게 선을 긋는다. 하지만 소피아는 자신의 행동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는 남편에게 불륜을 인정하곤 홀로 기차역으로 떠난다. 결국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진 못한 것이다.

 


 

나의 아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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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세 번째 에피소드인 ‘나의 아내들’에선 7명의 아내를 죽인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는 다른 에피소드들과는 다르게 한 남자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 조명한다. ‘살인’을 주제로 한 내용인 만큼 극이 무겁게 흘러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주인공 ‘라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아주 코믹하게 풀어낸다.

 


‘저는 쾌락, 즐거움, 즉흥성 따위로 아내들을 독살하지 않았습니다. 그 작고 허약한 존재들에게 모르핀과 인이 발린 성냥을 권한다는 게 어디 쉬운 줄 아십니까?’


 

라울이 아내를 죽인 계기는 다양하다. 노래 부르는 아내의 모습이 싫어서, 지적이지만 가르치려는 아내가 숨 막혀서, 사사건건 집착하는 게 싫어서 등 ‘과연 살인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이유들이다. 하지만 이 극은 ‘살인’보다 남자가 여자를 떠난 이유에 초점을 맞추면서, 스릴러를 희극으로 전환시킨다.

 


 

늦은 밤 그들이 기차역에 모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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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다른 이야기로 펼쳐지던 4개의 에피소드는 결말부가 되어서 하나로 합쳐진다. 극의 주인공인 약사의 아내, 아가피아, 소피아, 라울은 늦은 밤 기차역에 모인다. 한 의자에 앉아있는 네 사람의 모습은, 그들이 어떠한 연유로 기차역에 왔는지 짐작케 한다.


누군가는 지긋지긋한 삶이 싫어서, 또 누군가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해서, 어떤 이는 자신의 죄책감을 훌훌 털어버리고 과거를 잊고 싶어서 기차역에 왔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라울이 기차역으로 온 이유 또한 어쩌면 일말의 인간적인 죄책감과 과거 청산의 욕망이 한 곳에 어우러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 극은 새로운 공간으로 연결해주는 ‘기차’를 이용해, 주인공들에게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을 암시한다. 기차를 타고 떠난 이들이 이후 어떠한 삶을 살아낼지 궁금하다. 아마 욕망의 발현을 때로는 한껏 드러내고, 때로는 한껏 숨기면서 살아갈 것이다. 욕망을 가장 솔직하면서도 은밀하게 다루는 평범한 우리처럼.

 


[황채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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