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내’인 것이 질렸습니다. 떠나렵니다. - 연극 "체홉, 여자를 읽다"

글 입력 2020.01.27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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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표 사러 왔어요


 

세 명의 여성이 마이크 앞으로 나온다. “표 한 장 주세요. 가장 빠른 거로요.”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진 이들이 기차표를 산다. 같은 벤치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면서 그들은 어색한 듯 시선을 마주친다. 곧 조명은 잠시 꺼지더니 첫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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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약사의 아내', '아가피아', '나의 아내들', '불행'이란 제목이 붙은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체홉하면 떠오를법한 인간에 대한 관조적인 시선, 그럼에도 놓치지 않는 유머 감각을 반복되지 않게끔 다양한 상황으로 지루하지 않게 풀어냈다.

 

에피소드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약사의 아내'는 늦은 밤, 남편이 자고 있는 사이 군 장교들과의 짧은 만남을 보내는 약사 아내의 이야기다. 한밤의 외도로 지루함을 떨치는 여성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가피아'에서는 점잖은 아내 아가피아가 동네 한량 사프카에게 매력을 느낀다.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던 도중 갑자기 일탈을 벌인다.


'나의 아내들'은 7명의 아내를 살해한 라울 시냐브로다가 자신이 왜 아내들을 살해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극이다. '소피아'는 남편의 친구와 위험한 관계가 되기 직전의 여성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점차 불륜을 넘어 홀로 일어서는 과정을 그려낸다.


 


기차를 타는 사람들과 타지 않는 사람들



극은 모두 기차역 주변에서 일어난다. 기차역 주변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와 그의 아내. ‘약사의 아내’ 속 약사는 나이가 들어 젊은 아내의 성적인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다. 아내는 외도로 자신의 욕망을 풀고자 했지만, 자신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아가피아’ 속 점잖은 아내인 아가피아는 마을 한량인 사프카와 비밀스럽게 만나지만 다시 그를 일상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남편이 돌아오는 것을 보여주는 기차의 불빛이다.


기차를 타고 직장에서 돌아올 남편을 위해 아가피아는 아내의 의무를 다한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아가피아는 돌아가지 않고 나름의 일탈을 벌인다. ‘불행’ 속 소피아는 자신이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애를 하는 한 남성에게 계속 마음이 간다. 바람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마음은 욕망으로 점점 불타오른다.

 

결국 세 여성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들이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했을까? 세 여성들은 모두 남편에게서 도피했다. 그러나 다른 남성과 함께하지 않았다. 그들의 욕망에 불을 지핀 것은 남성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자유를 위해 떠나는 것은 혼자다. 결국 그들은 불륜 때문에 도망갔다기보다는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억압된 현실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떠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곧 떠날 것을 기차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모든 일은 기차역과 관련이 있다. 약사의 아내는 기차역 주변에서 떠나가는 열차들을 보면서 자신도 떠날 것을 소망했을 것이다. 아가피아는 기차로 집에 돌아오는 남편과 정반대로 열차를 타고 떠난다. 기차역 주변에서 자신에게 열렬히 사랑을 표현하는 남성을 만나는 소피아는 결국 그의 손도 뿌리치고 기차에 오른다. 기차는 그들의 주변에 맴돌고 있었다.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모두 그들의 자유 의지였다. 다른 남성과의 불륜은 촉진제였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그것만이 아니었다.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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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홉, 여자를 다시 읽다>는 굉장히 유쾌하다. 또한 불륜이라는 불편한 소재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성에게 결혼 제도란 무슨 의미일지 다시 고민하게 했다. 극은 여성의 욕망과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렇기에 보고 나면 통쾌해지는 연극이기도 했다. 연극 속 사랑은 여성을 눈 멀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더욱 또렷하게 볼 수 있도록 했다. 자유를 위해 일단 떠나고 보는 그들에게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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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원작자인 ‘안톤 체홉’은 러시아의 사실주의 대표 작가로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대해 논하고,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체홉, 여자를 읽다>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특히 배우 박준규가 연기한 7명의 아내를 살해한 ‘나의 아내들’이 다른 세 극과 대비를 보여주면서 시대는 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여성 등장인물들은 결혼 제도 속에서 모두 답답함을 느낀다. 그리고 답답함이 각기 다른 모습들을 띠고 있으며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면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나의 아내들’은 당시 현실은 어땠는지 보여준다. 남편은 별 것 없는 이유들로 아내들을 쉽게 질렸고 이는 살해까지 이어졌다. 예를 들어 노래를 하루 종일 부르는 아내가 짜증이 나서 그를 살해한다. 혹은 아는 것이 많은 아내에게서 지식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지겨워서 살해한다. 이는 곧 당시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고가 팽배했던 러시아 사회를 다시 보여주면서 세 여성의 이야기와 효과적으로 대비된다.

 


 

기차는 떠났다.


 

연출가 홍현우는 “보통 우리는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지만, 대부분은 욕망을 자제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이 연극의 주인공들을 통해, 나의 욕망에도 솔직해져 보기도 하면서 다양한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으면 한다.”고 작품 참여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흔히 불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 여성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때 남성의 불륜보다 더욱 억압적인 방식으로 자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홍 글씨>에서 주인공에게 계속 간통을 뜻하는 글자를 붙이게 하고 다닌다는 것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체홉, 여자를 읽다>는 그 어떠한 도덕적인 가치 판단이 들어가지 않는다. 주인공들 스스로 불륜은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고 해서는 안될 일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고 자제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점이 극의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여성의 욕망에 대해 여성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연극.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고 싶다면 <체홉, 여자를 읽다>를 추천한다.


 

[연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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