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낮의 감성 [사람]

글 입력 2020.01.2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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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이 된 후로 느긋이 햇볕을 느끼는 게 사치가 되어버렸다.


아, 백수가 되고 싶다. 돈 많은 백수. 될 수 없다면 평생 학생이고 싶다. 학생 때는 그토록 사회인이 되고 싶었는데 말이다. 아니면 은퇴를 눈앞에 둔 사람이 되고 싶다. 몇 개월만 있으면 햇볕을 쐬며 돌아다닐 수 있고, 늘어지게 멍하니 있어도 되니까,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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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 들었다. 반차를 쓰고 병원으로 가는 길은 유독 추웠다. 높은 빌딩은 탁한 그늘만 만들고, 여름이면 시원할 테지만 겨울이니 그늘은 매서운 바람으로 양껏 센 척을 한다. 감기에 걸리니 그냥 세상만사 다 귀찮아진다.


그래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낮에, 집밥’을 먹었고, 약을 먹었다. 약 기운이 슬슬 올라오는 찰나에, 노트북 위로 내가 키우는 식물의 그림자가 뿅 하고 나타났다. 카레에 넣어 먹으려던 후추가 담긴 통도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 옆에 휴지도, 펜도, 칫솔도, 벽에도 노트북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이고, 좋다. 따뜻하다.


별안간 새벽 감성 아닌 한낮의 감성이 찾아왔다. 햇볕이 이리 따땃-했던가? 짙은 녹색 식물이 빛 머금고 옅은 연두색이 되는 것도 예뻐 보인다. 보일러를 튼 저녁의 내 방 온도보다 지금 딱 이때의 햇살이 더 포근하게 느껴진다. 거실에 둔 빨래 건조대 그림자도 아름답다.


바닥에 말려둔 커피 가루도 향긋하다. 약에 취했나, 정신을 못 차리네 싶다가도 해가 들지 않는 부엌 쪽으로 향하던 발길을 금방 돌려,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내 방 안, 커튼을 양옆으로 열어젖혔다. 와, 힐링 된다. 좋다. 역시 당연할 때는 못 느끼는 건 없어 봐야 알아차린다는 말이 이 말인가.


심리/정신학에서 자주 그러던데, 햇볕을 매일 몇 분 이상 만나야 한다고. 내 옆에 앉은 대리님은 한낮의 햇살을 만날 여유를 안 갖는 게 아니라 못 갖고 사는 거 아닌가…. 나도 그렇고,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정말 사치 아닌가. 돈으로도 못사는. 광합성 타임을 국가적으로 만들어 공표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이상한 헛소리를 해본다. 아니, 진짜 진심일 수도 있다. 그런 날이 오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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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가락에도 햇살의 따스한 느낌이 든다. 한낮의 태양이여, 눈 똑바로 뜨고 마주 보지는 못하지만, 고맙네. 태양이 하나인 것 치고는 존재감 한 번 대단하다 싶다. 저 동그랗고 허연 게 뭐라고 안 보이면 우울하고, 보이면 쾌청한지 신기할 따름이다.


사무실에 앉아있을 때는 지긋지긋하게도 안가는 시간이, 햇볕을 받은 탓에 드러나는 밀리미터(mm) 단위의 먼지들을 보고 있자니, 금방 지나간다. 집이 최고긴 해도, 일할 곳이 있다는 것 또한 좋은 것 같다. 놀 때는 일하고 싶고, 일할 때는 쉬고 싶은 간사한 나란 인간.

 

평생을 양껏,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만 싶던 과거 나의 날백수 때의 생각과는 달리, 아니, 서두에서까지만 해도 백수이길 원했던 나지만, 남들처럼 직장에서의 ‘생활’이란 걸 하다 보니, 일하는 것도 막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벌 수 있을 때 벌고, 쓰기도 하고, 이렇게 잠시 쉬는(반드시 필요한 반차 또는 월차!) 시간을 갖고, 소소한 행복을 가지며 사는 게 인생이지 하는 생각도 든다. ‘쉼’에 ‘여유’를 갖는 것의 중요성을 느낀 하루다. 거기에 광합성 타임이라면 더 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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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몽롱해지며 아른아른한다. 약발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내일도 똑같이 태양은 뜨겠지. 하지만 난 느긋하게 즐기지는 못하겠지. 흑. 그래도 한 ‘스푼’의 여유를 즐겼다고 내일에 대한 짜증이 한 ‘스쿱’ 덜어진 걸 체감한다.


여유가, 한낮의 감성이, 햇살이, 사람을 긍정적으로 만든다. 글을 쓰는 동안 바랜 햇볕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남향의 집에는 아직 볕이 길게 들 시간이지만, 내 방은 이내 멎었다. 아쉽지만, 내일을 기약한다. 지긋이 내리쬔 햇살에 기분 좋았던 오후였다. 감기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감기에 의한 쉼이었지만, 자의적이고 의도적인 쉼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날 좋은 때, 하루 또는 하루의 반은 햇살을 느끼고 여유를 느끼는 나와 독자가 되었으면 한다. 확실히 쉬니까 마음에 여유가 생기더라. 보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얼굴이 생각났지만, 거 햇살 한번 봤다고 넓은 아량도 생겼더랬다.

 

건물에 잠시 가린 햇볕이 다른 그림자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아쉬웠는데 잘 됐다. ‘멍하니 해를 머금고 구경하기’도 머릿속에 끄적끄적 기억해 둬야겠다. 심신안정이 필요한 날 써먹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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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휘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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