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결혼 이야기"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글 입력 2020.01.21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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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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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해 꿈꾼 적은 없다. 굳이 따지면 한 번쯤은 해볼 만하지 않을까? 평생 흔들리지 않고 혼자 살 때보다 둘 이상일 때 조금 더 든든하지 않을까.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나눠먹고 대화를 좀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찌감치 행복한 가족이나 행복한 결혼생활도 믿지 않았다. 결혼식이 해피엔딩으로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았다. 둘이서 여행만 가도 한 번은 싸우는데 결혼이 그렇게 좋기만 할리가. 결혼을 계약처럼 연장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가족과 결혼에 대해 충격적이지만 슬픈 사실을 한 가지씩 깨달았다. 가족은 생각보다 그렇게 화목하고 평화롭지 않다. 잘 사는 집이든 못 사는 집이든 어느 집에나 속 썩이는 사람이 있고, 콩가루가 솔솔 날리는 듯한 분쟁이 있기 마련이다.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다. 결혼에 대해 놀랐던 점은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보다 결혼을 생각하는 그때 마침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배우자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결혼에 수많은 조건이 있다면 사랑 역시 그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사이에 사랑이 있다면 좋고, 사랑이 없으면 정으로 산다고 하더라. 그래도 반평생을 함께 할 텐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을 해버리냐고? 막상 결혼의 압박이 들어오는 나이가 되니 이해는 된다. 결혼을 하라는 주변의 눈초리나 말소리는 지겹다. 그렇다고 혼자 살자니 혼자만 사는 삶은 자신이 없다. 해치워버리듯 해도 비난하지 못하겠다.

 

과거와 확연한 차이점은 요즘 결혼은 과거만큼의 인내심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지 않아도 된다. 헤어져도 된다. 이혼 역시 나쁜 것이 아니다. 의무감으로만 지속했던 결혼이야말로 나쁘다는 인식이 확고해졌다. 이혼하는 시기는 인내심이 어디까지 발현되었느냐 정도의 차이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서, 혹은 자리를 잡고 나서 황혼에 이혼하거나 졸혼을 하는 경우도 많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헤어질 수 있다. 나조차도 정말 밥맛 떨어질 때면 엄마는 아빠랑 왜 결혼했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러게 말이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의외로 그래도 가장 중요한 순간 결정을 내릴 때는 아빠와 가치관이 비슷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래서인가. 정말 중요한 50%만 맞으면 나머지는 맞추면서(혹은 어차피 맞추지 못할 테니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살라던 말씀이. 그게 엄마의 결혼 철학이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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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이야기" 속 니콜과 찰리는 변호사 없이, 소송 없이 '둘만의 원만한 합의'로 이혼하기를 꿈꿨다. 바람대로 되면 좋았겠으나 애초부터 둘의 입장 차이는 너무나 명확했다. 나도 모르게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고 공감되는지 살펴보게 되었다. 둘의 감정이 극도에 치달았을 때 말다툼을 보고 확실해졌다. 찰리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그의 희생이 적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도 니콜은 찰리에게 저주를 퍼붓지는 않았다. 찰리의 말에 말문을 잃은 건 니콜만이 아니었다. 헨리만 괜찮다면 병에 걸리거나 차에 치여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니. 내가 당신을 더 사랑했다는 니콜의 말에 그게 LA에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반응은 맥빠졌고, 같은 극단 메리 앤과의 외도에도 그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졌다. 결혼 생각도 없고, 나에게 바라는 게 많은 당신 때문에 내가 수많은 유혹을 젊은 나이부터 얼마나 피하느라 힘들었는지, 당신이 나를 먼저 거부했으니 바람이 아니란다. 유혹에 관해서라면 니콜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찰리는 이기적이다. 본인이 아프다는 이유로 끝까지 가버린다. 총알이 살을 뚫고 나서도 회전을 하면서 몸속에 파편을 남기듯이. 후벼파는 것 이상의 말을 쉽게 하더라. 그가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하지 않았다면 고개를 저으면서 그를 선택했던 니콜을 처량하게 바라봤을 것이다. 누가 봐도 상처받은 눈이면서 미안하다며 찰리를 꼭 안아주는 그녀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게 사랑인 걸까. 내가 상처받아도 그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는걸, 그 말을 하면서 본인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고 안아줄 수 있는 게. 사랑을 하기엔 나 역시 너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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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영화를 봤다. 찰리를 정말 이해할 수 없을지 궁금했다. 물론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은 없다. 찰리는 내 남편이 아니니까. 다시 보니 한 가지가 눈에 띄었다. 그는 왜 뉴욕을 놓을 수 없었을까? 뉴욕이 집이고 자신의 가족은 '뉴욕'의 가족이라고 무척 강조한다. LA는 왜 안 되는 걸까. LA의 변호사와 그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공간도 넓고 살기 좋다는데도, 니콜의 가족을 좋아하면서도, LA에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심지어 그가 사랑하고 상처 주고 싶지 않았던 니콜이 원하는데도. 뉴욕이 대체 그에게 뭐길래. 'LA'의 가족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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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이 변호사 노라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찰리는 이혼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니콜의 의사를 좀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말이다. 니콜은 LA에서 살고 싶었고 다양한 장르에 참여하는 배우이자 감독이 되고 싶었다. 지금처럼 '찰리의 극단'에서 '찰리가 가장 아끼는 배우'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화나 드라마, 연극 등에서 종횡무진하고 싶었다. 남편의 외도에 상처받은 사이 마침 LA에서 하는 드라마가 기회처럼 찾아왔다. 찰리의 응원을 기대했건만 그는 쓴소리만 뱉었다. 그가 LA에 잠시라도 살려고 시도했다면, 그가 함께 극단에서 공동 감독을 맡아 공연을 준비했다면, 니콜에게 네 생각은 어떤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말을 했더라면. 수많은 가정법 중 하나라도 있었다면 니콜은 결혼을 유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찰리의 이야기는? 니콜은 찰리와의 이혼을 피할 수 있었을까. 니콜이 '찰리의 아내'로 살기로 체념하는 것 말고, 찰리가 막무가내로 뉴욕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고, 그를 설득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영화를 살펴봐도 찰리의 이야기는 니콜의 이야기만큼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찰리도, 그의 변호사도 그런 이야기를 터놓지 않았다. 그러니 다만 추측할 뿐이다. 니콜이 찰리에 대한 장점에 썼던 것처럼 그는 아무것도 없이 뉴욕에 와서 자수성가했다. 누구보다 뉴요커 같다. 직업적인 명성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 집이 생겼다. 뉴욕은 그의 마음의 고향이다. 알콜중독에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와 좋은 기억이 없는 어머니와 태어난 고향은 뒤로했다. 그는 소중한 니콜과 아들 헨리, 인턴마저 가족 같은 극단 사람들을 만났다. 좁고 경적소리가 넘치는 뉴욕에 스스로 가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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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입장에서 LA는 어디까지나 니콜의 고향일 수밖에 없다. 찰리의 뉴욕은 흔들려도 이상할 것 없이 뿌리가 얕다. 10년을 넘게 산 니콜은 뉴욕보다 LA를 그리워하지만 찰리에겐 10여 년 된 뉴욕이 전부다. 그 뉴욕엔 편히 볼 수 있는 부모님, 형제 같은 혈연이 찰리에겐 없다. 은연중에 니콜과 그녀의 가족을 보면서 LA의 넓은 공간만큼이나 휑한 공허함을 느꼈을 것이다. LA에 있는 니콜과 헨리는 찰리가 없어도 자연스럽다. 헨리를 너무나 쉽게 LA에, 니콜의 손에 맡긴다면 그는 그의 부모님과 그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고 그는 그런 부모의 모습이 자신에게 남아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그가 힘들게 만든 가족이 무너졌을 때조차 그는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게 아무것도 없이 뉴욕에 와서 자수성가한 뉴요커가 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는 이기적이다. 그래서 솔직하지 못한 채 마음에 담아둔다. 대체로 진심과 좋은 말은 담아두었을 것이다. 니콜이 자신을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뉴욕을 떠나면 이 가족이 부서질 것 같은 걱정도, 그녀의 연기를 비평하지만 감동받았던 마음도.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을 거부하고, 사랑하는 배우가 자신을 떠나 LA로 난생처음 활동을 하러 간다니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 가 버려. 갈 테면 가. 그러고도 당신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은 누굴 만나도 불행할 거야. 그녀가 떠나가 버리기 전에 먼저 이혼하자고 하진 않았을까? 둘 중에 이혼을 먼저 이야기한 건 찰리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이혼하자는 말을 먼저 꺼내도록 니콜을 몰아붙였든지. 초반에 이혼 준비로 성질을 내고 눈물을 보이는 니콜의 모습에 비해 침착한 찰리를 보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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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둘은 이혼했다.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좋은 사람, 좋은 부모인지 시험받았다. 추억은 무능과 부도덕의 증거가 되었다. 찰리는 조금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니콜이 늘 잘라주던 머리는 이발소에 가서잘라야 하고, 빨래방에서 빨래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는 3800km를 날아 뉴욕에서 LA로 와야 헨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양육권도 45:55의 비율로 손해를 봤다. 영화의 끝 무렵이 되어서야 그는 '살아있는 것(Being Alive)에 대해 노래를 불렀다. 나를 필요로 하고, 상처 주고,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혼자가 아니라.


이 싸움에서 결과적으로 니콜이 이긴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솔직했고 더 많이 사랑했고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하지만 니콜의 눈빛 역시 종종 촉촉해진다. 니콜이 읽지 못했던 편지를 찰리가 읽었을 때, 'I'll never stop loving him, even though it doesn't make any sense now'라는 문장을 들었을 때. 서로를 축하하고 싶지만 예전처럼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을 때. 찰리가 UCLA 전임으로 오게 되어 한동안 여기 머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의 표정은 쓸쓸했다. 이혼하기 전엔 왜 그럴 수 없었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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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나 판사에게는 지지부진한 한 사건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결혼 이야기든 당사자에게는 며칠 밤낮을 해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다. 헨리라는 아들을 둔 찰리와 니콜 커플의 이야기는 그래도 사랑이 있는 결혼이었다. 보기 좋았다. 서로의 장점을 읊는 장면으로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이 반대라서 보완해주고 있어서 보기 좋았다. 진흙탕 싸움을 하지 말자던 사람들이 진흙탕에 빠져들어 이혼을 하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뭘 모르고 어리석어서 진흙탕에 발을 담근 게 아니다. 서로 약점을 아는 사람들끼리 일부러 급소를 건드리면서 상처를 내는 다툼. 그 말이, 그 행동이 이렇게도 쓰인단 말인가? 놀라진 않았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건 그들이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이다.


마음은 칼질하듯 날카로운 단면으로 잘리지 않는다. 사람과 시간이, 사랑이 남아있다. 다만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함께 할 필요는 없다는 깨달음도 남았다. 당신을 사랑하는 수백 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단 한 가지 감당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누구와도 헤어질 수 있다. 당신을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 원하는 삶에서 멀어질수록 마음 한 켠에서는 엉켜있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새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부른다.


"결혼 이야기"를 보면 결혼에 대한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결혼은 이래서 해볼 만하고, 이래서 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이혼 역시 그래서 희망찬 행동이기도 하고 절망스러운 밑바닥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할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많다. 결혼은 사랑 하나만으론 충분하지 않은 이야기다. 아직도 절절한 둘의 눈빛과 별개로 그들은 이혼서류에 서명했다. 그들이 수많은 결혼의 위기를 넘겼음에도 이번에 정말 이혼을 했다는 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풀린 신발 끈은 묶어주지만 같은 방향을 볼 수 없고 나란히 걸을 수 없다. 잔잔한 오보에 소리에 서로에게 등진 채 자신이 갈 곳으로 걸어가는 찰리와 니콜을 보면서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 떠올랐다. 둘에게 들려준다면 아마 눈이 빨개진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 노래를 찾을 때의 마음으로.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 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 김광석 <사랑했지만>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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