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에로티시즘과 검열, 그 속의 여성 - 야한 영화의 정치학 [도서]

글 입력 2020.01.2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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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면 새삼 한국의 급격한 발전과 변화 속도에 놀라곤 한다. 오늘날의 영화관은 명절이면 온 가족이 갈 정도로 건전한 오락의 대표 공간이다. 그러나, 부모님 이야기 속 영화관은 사뭇 달랐다. 그 시절, 영화관은 학생들이 몰래 갔다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는 은밀하고 불건전한 공간이었다. 책을 읽기 전까진 '영화관'과 '불건전'이 참 낯선 조합이라고 생각했는데 191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야한 영화'를 다룬 이번 도서 <야한 영화의 정치학>을 읽으니 조금 감이 잡혔다.

  

강렬한 빨간색과 '야한'이라는 형용사가 주는 자극적인 느낌까지. 책장을 펼치기 전, 혹여 내용이 너무 자극적인 내용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작가는 시대별로 야한 영화의 역사를 살펴보며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재현되고 억압됐는지, 시대적 정책과 권력구도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때로는 소비와 욕망의 대상으로, 때로는 자유와 혁명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영화 속 에로티시즘을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설명하는 작가의 글을 따라가다 보니 편견은 금방 사라지고 몰입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 김효정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빌려둔 비디오테이프를 몰래 돌려보는 것으로 영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다. 집안의 반대로 야반도주하듯 미국으로 가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영화 박사를 취득하고 현재 여러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소개가 흥미로웠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야한 영화’ 혹은 에로틱 하위 장르들은 당대의 지배 담론과의 충돌 혹은 대항으로 잉태된 문화적 산물임과 동시에 억압이 생산의 근거로 기능했음을 예시하는 사료이기도 하다. 영화 속 섹스는 때로는 저항과 혁명의 기제로, 자유의 암시로, 그리고 삶과 죽음의 메타포로 쓰이며 성적 엑스터시의 재현 수단을 초월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야한 영화의 정치학> 책을 내며 中


  

책을 읽은 후, 첫 번째로 우리나라 성애 영화의 역사가 이렇게나 길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1910년대의 무성영화를 시작으로 알프레드 히치콕 등 현재도 영화계의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작품들이 이르게 나오기 시작했던 서양과 달리 한국 영화계는 1960년대 독재 정권의 통치 속에서 황금기를 맞이한다. 독재 정권 하에서 엄격한 검열과 문화 정책이 이 영화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몇몇 영화들은 검열에 통과하기 위해 의도적인 장면 삽입을 통해 성인물이라는 가면을 써 사회비판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것을 피하기도 했고, 근대화 정책에 맞추어 의도적으로 아파트 신을 삽입하거나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여성들의 삶을 그리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호스티스 장르'라는 것이 생길 정도로 많이 등장했던 시골 처녀의 도시 수난기 스토리였다. 이 영화들은 대게 젊고 순수했던 여성의 성적인 타락과 그에 따른 좌절이나 죽음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강력한 규제와 검열 속에서도 이렇게 노동계층이 나오는 영화가 지속적으로 세상의 빛을 보고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성인물의 외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호스티스 장르는 근대사회 속 노동계층의 아픔과 설움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들은 강간, 성 노동 등 남성의 성욕을 채워주는 수동적인 여성의 모습을 각인시키고 여성의 몸이 하나의 소비 대상으로 여겨지는 데에 지극한 공을 세웠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특히나 이런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매번 자신의 성적 타락에 고통을 느끼거나 외부적 압력을 받는 여성들이 자살을 하거나 사고를 당하는 개연성 떨어지는 결론들을 지닌다는 점에서 영화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입을 빌려 봄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지점들이 있었다.

 

또한, 항상 남성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강간을 '당하거나' 성적 욕망을 느끼는 것에 대해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는 여성의 수동적 모습들은 특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영화에서 더욱 부각되는 것으로 보였다. 시기적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더욱 성에 대한 이야기나 성적 욕망 표출이 금기시되었을 시기에도 서양 영화 중에는 가끔 집착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영화 중에는 <산불>이라는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이 처녀귀신으로 죽고 나서야 능동적으로 본인의 욕망을 표출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이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차이점을 정책뿐만 아니라 유교 사상 등에 근거해 형성되어온 우리나라의 전통적 관습 등으로 설명하는 저자의 관점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항상 영화 속에서 대상화되고 소비되었던 '여성'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그에 대한 표현과 시각이 변화하고 있다는 부분을 읽으며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책에 등장하는 영화 <안티 포르노>와 <피의 연대기> 등 2000~2010년대에 나온 작품들은 과거와 달리 높아진 인식과 페미니즘의 물결에 따라 과거와는 다른 모습들을 담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피의 연대기>는 거의 금기시되었던 생리에 대해 다루는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이는 세대와 인종을 넘나드는 여성들이 생리를 하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동안의 금기를 깨고, 여성들이 생리에 관해 얼마나 많은 선택들로부터 배제되어 왔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피의 연대기>는 생리대 브랜드에 대한 조사를 할 때 보았던 조사 결과가 기억나 더욱 관심을 갖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실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생리, 생리대 등을 '그날, 그것'과 같은 대명사로 지칭하고 중고등학생들은 친구들과도 마음껏 터놓고 생리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편이라고 한다. 여전히 많은 교육과 인식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일각에서는 이렇게 터놓고 생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다큐멘터리가 등장하고, 파란색 액체나 모호한 표현 등이 팽배했던 생리대 광고도 빨간 액체를 사용하고 '생리'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외에도 중고등학생들이 자유롭게 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한 파우치를 제작하거나, 부모 간, 친구 간 대화가 더욱 많아질 수 있도록 토크 등을 주최하는 등의 움직임들도 보며 앞으로는 성적 대상화된 '여성'이 주가 되었던 영화계에도 좀 더 다양한 시각을 담은 영화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에 저자의 에필로그에 더 공감되고 앞으로의 글들이 더 기대됐다.

 

 

따라서 이 책은 궁극적으로 여성의 몸과 성의 역사이자, 인간의, 혹은 가부장 중심의 문명이 그것들을 어떻게 이용했는지의 기록이다. 이 책에서는 조금 더 나은 역사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은 필자에게 서막일 뿐이다.

 

<야한 영화의 정치학> 에필로그 中


  


 

 

야한 영화의 정치학

 

 

저자

김효정 지음

 

쪽수

248pg

 

가격

22,000원

 

규격

52mm * 225mm

 

ISBN

978-89-98204-70-9 (93680)

 

출간일

2019년 12월 18일

 

출판사

카모마일북스

 

분야

정치사회>페미니즘>

예술대중문화>영화>영화평론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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