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번만 더 날아보자 : 버드맨(Birdman) [영화]

글 입력 2020.01.13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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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드맨(Birdman) 포스터

 


영화를 다 본 후 키보드에 엉성하게 구부러진 열 개의 손가락을 얹기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오랜 생각을 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따뜻한 이불을 덮고 혼자 가볍게 보려고 했던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내려올 때쯤 덮고 있던 이불과, 어두움 그리고 방 안을 꽉 채운 삭막한 공기의 무게를 못 해도 두 배는 무겁게 만들어놨다. 분명 엔딩이 어둡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왜 이런 느낌일까 곰곰이 생각하며 잠에 들었고 깊게 내재된 트라우마 같은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악몽 아닌 악몽을 꿨다.

 

 

시놉시스


슈퍼히어로 '버드맨'으로 할리우드 톱 스타에 올랐지만 지금은 잊혀진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그는 꿈과 명성을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도전한다. 대중과 멀어지고, 작품으로 인정받은 적 없는 배우에게 현실은 그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

 

재기에 대한 강박과 심각한 자금 압박 속에, 평단이 사랑하는 주연배우(에드워드 노튼)의 통제불가 행동들, 무명배우의 불안감(나오미 왓츠), SNS계정 하나 없는 아빠의 도전에 냉소적인 매니저 딸(엠마 스톤), 연극계를 좌지우지 하는 평론가의 악평 예고까지. 과연 '버드맨' 리건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별로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감히 평가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끝없이 뱉어내는 영화이기에 오히려 내가 이 영화를 완전하게 소화했느냐 또한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한 번 영화를 보고 진이 빠지니 영화를 두 번 볼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부분을 다시 보려 플레이어의 인디케이터만 열심히 움직였다. 그만큼 이 영화는 다방면으로 할 말이 많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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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테이크 촬영 기법


 

그중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촬영 기법에 대한 것인데, 버드맨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눈에 띄고 또 영향이 큰 것이 촬영 기법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과 주요 장면 뒤의 몇 개의 화면 전환을 제외하고는 이 영화에서 화면전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시각각 초점을 맞추는 인물과 배경이 달라지고, 변화하는 그 각도와 거리를 담은, 경이로울 만큼 아주 징하고 집요한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롱테이크라는 것은 잊은 채, 아니 어쩌면 화면전환을 사용하는 여느 영화들보다 더욱더 흡입력 있게, 영화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기법이 낯선 나에게는 버드맨이 버거웠다. 화면전환은 일종의 휴식 신호와 같아서 아주 짧은 그 시간에도 자연스럽게 머리는 '아 다음 장면 등장! 그러니 이전 장면을 잠시 넣어둬!'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2시간 가까운 이 러닝타임 동안 쉬지 않고 호흡을 따라가려니 흐름을 놓쳐 이전 장면은 본 적 없는 것 마냥 머릿속에서 증발해버리고, 그 탓에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같은 장면을 거꾸로 돌아가 다시 봐야 했다. 불가피하게 자체적으로 화면전환 처리를 한 것이다.

 

그 호흡의 속도 또한 느린 속도는 아니다. 긴장감 있는 드럼 소리가 이어지는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드러머는 스네어 대신 내 심장을 놓고 두들기는 것 마냥 그 긴장감에 휩싸여 화면 따라가기를 재촉하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영화를 보고 난 후 눈부터 시작해서 온몸 전체에 힘이 풀리고 지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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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이 리건에게


 

가부좌를 틀어 앉은 자세로 공중부양을 한 리건의 뒷모습으로 시작되는 영화. 그리고 그에게는 누군지 모를, 다소 음침한 분위기의 낮은 목소리를 한 남성이 말을 걸어온다.

 

 

"어쩌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지?

우리가 있을 곳은 이 시궁창이 아니야."

 

 

'우리'라며 리건에게 말을 거는 이는 누구일까,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생명을 가져서 말을 거는 것일까? 와 같은 궁금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목소리만 등장하는데, 그 대사들로 짐작하여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버드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후 위의 사진처럼 버드맨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 목소리는 엄밀히 말하면 리건이 리건 스스로에게 거는 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추측하건대, 이는 리건의 환청과 환상일 거다. 공중부양으로 시작해 염력까지 가진 것처럼 보이는 리건은 리허설을 하던 중 떨어진 무대 조명에 머리를 맞은 랠프의 일을 우연한 사고가 아닌 랠프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내내 리건은 염력을 쓰고 실제로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후에 화가 난 리건이 염력으로 방 안의 물건을 깨부수고 있을 때, 제이크의 시선으로 본 리건은 평범하게 양손으로 물건을 붙들어 망가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리건의 염력은 환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버드맨은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알게 모르게 손을 부여잡고 있다. 그렇기에 요소들 간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더 흥미로운 영화인데, 이는 영화 안의 연극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연극에서 닉 역을 맡은 리건. 한 여성은 "요즘 닉의 우울증이 심해서 걱정돼요"라는 대사를 던지고, 이처럼 환청과 환상은 리건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를 우울증 증상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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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의 책 이름. 그리고 버드맨 안에서 다루고 있는 연극 또한 이 작품을 각색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연을 하면서 실제 술을 마실 정도로, 연인과 무대에서 관계를 하자고 할 정도로 무대 위에서의 진실한 모습을 중요하시하는 마이크. 그리고 그런 마이크와는 전혀 반대의 모습처럼 보이는, 그의 연기에 담긴 진심과 무관하게, 무대 위에서 던지는 대사들이 마치 그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그의 모습과 잘 맞아 떨어지는 리건.

 

 

"나는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지.

난 당신이 원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어.

매일 다른 남자가 되려고 애를 쓰며 산다고!"

 

 

이 대사에서 당신은 극 중 파트너를 향한 말이었지만 동시에 세상의 수많은 시선들을 향한 말과 같다고 생각했다. 버드맨은 시즌3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흥행했으며, 그는 지금까지도 알아보고 사진 촬영을 부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무비스타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극중 버드맨이 리건에게 "넌 무비스타였어. 기억나?"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대중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대기실 거울에는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빛난다'라는 문구가 붙어있고, 이 문구가 무슨 소용이냐 조롱이라도 하듯 리건은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 연극을 위해 딸에게 주려고 남겨놓은 집까지 담보로 잡아 대출을 받을 생각까지 한다.

 

사람들이 봐주지 않으면 유명해질 수 없고, 유명하지 않으면 잊혀지고, 잊혀지면 존재가 사라진다. 리건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이러한 인물이 SNS 하나 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의문이 들기는 했으나, 그만큼 대중과 멀어졌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는 스스로 살지 않았고 타인에 의해 살았다. 살아 숨쉬는 그 존재의 증명은 결국 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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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에 대한 풍자


 

영화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켜 도저히 생각의 가지치기를 끝낼 수가 없다. 이리도 빽빽한 영화가 또 있을까. 그렇게 사방으로 뻗은 수많은 가지 중 하나.

 

무대 조명에 머리를 맞아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랠프를 대신하기 위한 배우를 찾는 장면. 리건이 제이크에게 묻는 모든 배우들은 히어로물 영화를 촬영 중이고, 방에 들어와서 튼 티비에서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맨 시리즈의 대성공에 이어 어벤저스에서도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기자들의 인터뷰 장면. 남기자가 철학자 바르트의 '과거, 신화나 서사시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가 지금은 빨래 세제 광고나 만화 주인공에 의해 만들어진다'라는 말을 인용하자 여기자는 "바르트가 누구죠? 버드맨 몇 편에 나와요"하고 묻는다. 그 말에 역사를 들어 설명하려는 남기자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이번에는 동안피부를 가지기 위해 진짜 자신에게 새끼 돼지의 정액을 주사했는지 묻는다. 우습게도 그 말의 출처는 트위터의 한 계정. 당황한 리건이 명확히 아니라고 의사 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부정했다는 내용을 싣기로 한다. 그리고 리건이 말한다.

 

 

"아니 아무 것도 쓰지 마세요.

왜 당신은 뭐라도 쓰려고 하는 거에요?"

 

 

기사의 사실 여부는 이미 뒷전이고, 누가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쓸 수 있는지 겨루기라도 하듯 돼지 정액, 퇴물 히어로 등 기자들은 정신없이 말을 건다. 이는 옐로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내가 아무렇지 않게 읽고 비판하는, 당연하게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그 수많은 기사들도 이렇게 만들어진 것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저널리즘의 비판뿐 아니라 대중에 대한 비판도 볼 수 있다. 모든 창작물은 주관이 들어가며 아무리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를 담았다고 해도 현실의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실은 간과한 채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정보에 대하여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대중의 모습. 그리고 "사람들은 피와 액션을 좋아하지. 말 많고 우울한 철학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라고 말하는 버드맨의 말에서도 볼 수 있듯 대중의 오락적이고 또 자극적인 대중문화의 선호를 비판한다.

 

또 아무리 공들인 작품이라고 한들 비평가의 말 한마디로 브로드웨이의 연극이 하루 만에 막을 내릴 수도 있다. 영화에서의 비평가 타비타 또한 기사를 읽지도 프리뷰를 보지도 않았으나 벌써 '사상 최악의 악평'을 적어내릴 생각을 하고 있다. 리건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에서 말이다.

 

리건은 그런 타비타에게 '낙인을 찍지 않고는 이게 뭔지를 보지 못하니까'라고 말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비평가의 평가는 낙인이다. 우리는 또 한 번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그 조차도 누군가의 평가의 산물인, 신뢰성 있다고 '평가' 받는, 누군가의 아주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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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기 없어"


 

영화 자체가 워낙 모든 요소들 간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탓에 결말 또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 프리뷰에서는 모두 가짜 총을 사용했다. 빨간 총구가 다 보이는 가짜 총을 사용하는가 하면 발가벗은 채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상대를 겨누기도 했다.

 

무언가 결심한 듯한 리건은 본격적인 공연 첫날 장전된 실제 총을 들고 무대 위로 오른다. 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가짜 피주머니를 챙겨주는 스태프의 말을 무시한 채 발걸음을 옮겨 연기한 닉은 여태까지 프리뷰에서 리건이 연기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인물이었다. "난 여기 없어"라는 대사 한 마디를 끝으로 머리 쪽에 총구를 가져다 댔고 총성이 울려 퍼진 후 리건은 쓰러졌다. 첫 번째 해석, 바로 이 장면에서 리건이 진짜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내내 끊기지 않았던 시선이 끊기고 몇 차례 화면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병원, 그는 자살에 실패한 듯 보였다. 이 부분 또한 연극 속 닉이 자살에 실패했다는 것과 닮았다. 몸을 일으켜 화장실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의 모습은 마치 버드맨 같았다. 의도적으로 총상 부위를 코로 해서 그 가면과 유사한 형태를 그려내려고 하지 않았나 싶었고, 그 아이디어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더 이상 버드맨이 리건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 그저 변기에 앉아 리건을 한 번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둔다. 리건은 "잘 있어. 엿 먹어"라고 말하며 화장실에서 나와 하늘에 떠나가는 새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살아있음을 느끼기라도 하듯 눈을 감고 호흡한다. 아마 이 음악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잔잔하고 평온한 음악이 아닐까 싶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이 흘러나오고, 창문에 올라선 리건.

 

그 후 리건의 행위에 대한 서술은 없으나 샘이 돌아와 리건을 찾았을 때 리건은 그 자리에 없었다. 열린 창 밖의 아래를 보고 다시 하늘을 향한 샘의 시선에 담긴 감정은 어째 슬픔이 아닌 기쁨이다. 두 번째 해석, 이 장면에서 리건이 진짜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샘은 왜 웃음을 보였냐는 것인데, 그 해석 또한 다양하다. 이제서야 겨우 원하던 대로 유명해졌는데 자살을 해버린 아빠에 대한 원망에서 비롯한 해탈감에서 나온 웃음이라던가 아빠가 드디어 타인의 인정에서 벗어 자신의 모습을 찾아 훨훨 날아간 것 같아 기쁜 마음에서라던가, 샘 또한 리건과 같이 환청과 환상 증상이 있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던가 등 너무도 다양한 해석이 많다.

 

해석의 여지만큼이나 이야기할 것들이 너무 많은 영화 버드맨. 영화가 꼭 무언가를 전달해야 한다는 법도 없지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모르겠는 영화. 또 주관적인 의견으로 우울함 없이 볼 수 없는 영화인데다가, 그 여운이 다 가시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다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럼에도 한 번씩은 꼭 보면 좋을 것 같은 영화. 볼 때에는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보는 것을 추천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길고 길었던 영화 '버드맨'에 대한 이야기. 그 문학의 내용과 무관하게, 영화를 본 후 자연히 떠오른 이상 < 날개 >의 한 구절을 끝으로 그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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