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누가' 소리를 내었어? - 소설로 보는 층간소음과 계급의 문제 [문화 전반]

'누가' 가해자인가
글 입력 2020.01.12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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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쾅쿵쾅 층간소음



대학생의 로망에 대해 말하면 뭐가 있을까. 캠퍼스를 거니는 낭만과 원하는 수업을 듣는 자유로움, 새로운 인연과 CC(캠퍼스 커플)에 대한 기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자취’에 대한 로망 아닐까.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벗어나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것. 새로 감당해야하는 책임이 있겠지만,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해먹고, 휴식을 취하고, 원하는 삶의 방식을 고수할 수 있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자취를 꿈꾸는 이유이자 장점이다.


실제로 공간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다. 내가 경험하는 것은 모여서 ‘나’를 이룬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내가 경험하고 인지하는 배경이 되는 공간은 확장된 '나'이다. 인지와 경험의 영역이 곧 나를 구성하는 영역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특정한 공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공부할 때 집을 두고 도서관이나 카페를 찾는 것도 그런 이유가 반영된다.


사람들이 고시원 같은 단칸방을 기피하는 이유는 생활에서의 기능적인 불편함을 넘어 그 공간이 종종 우리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에 산다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 소음을 계속해서 들어야하고, 원하지 않는 인테리어와 낡은 건물 외벽을 마주해야하며, 때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화장실을 공유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층간소음 표지.jpg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방해받지 않으며 있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은 정말 중요하다. 내 영역이 침범 당한다는 느낌은 사람을 정말 힘들게 만든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는 층간소음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꼭 고시원이나 달동네 판자집이 아니어도 충분히 그렇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가는 아파트나 주택에서도 층간소음에 대한 갈등은 낯선 일이 아니다.


‘살인 부르는 층간소음’이라는 제목의 뉴스 기사도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층간소음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거나 법적 대응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커뮤니티 글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층간소음 보복용으로 전용망치, 골전도 스피커, 우퍼 스피커(저음이 강조되는 진동이 큰 스피커 종류)를 활용하기도 한다.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겪으면 층간소음에 대한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소음에서 계급으로


 

사실 난 예민한 편이다. 특히 빛과 소리에 신경이 쓰인다. 옆방에서 은근히 들려오는 말소리와 룸메의 코골이, 밝은 컴퓨터 화면을 못 견뎌한다. 이어폰을 끼지 않고 유튜브를 시청하는 친구의 핸드폰 소리를 견디는 것도 큰 스트레스다. “타인의 취향으로 조합된 플레이리스트”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공간이 나에게는 절실하다.


그런 내가 자취를 하지 않고 기숙사 4인실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사실 비용 때문이다. 나만의 공간을 얻는 댓가는 적지 않다. 학교 근처에서 나만의 방을 얻으려면 지금 살고 있는 기숙사의 4~5배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마저도 소음과 낯선 이들로부터 분리된 완전한 나만의 공간을 갖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 계급이다. 계급은 언뜻 사라진것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며 우리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계층 사다리 일러.jpg

 


“그녀는 그때 자신이 게급적 인간이라는 것을, 자신이 속한 계급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런 거였구나. 이웃의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없다는 거. 계급이란 이런 거였고 나는 이런 계급이었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더 많은 돈을 가져서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테니까. 더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은 더 좋은 골목, 더 좋은 동네에 살게 된다는 것이고 더 좋은 동네라는 것은 이웃의 소음과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동네일 테니까”



“내게도 권리가 있어. 남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권리가 말이다. ...중략....해방이라기보다는 차단될 수 있는 권리. 그런 게 있고 그것이 내게도 분명 있는 권리인데 그걸 확실하게 실현하려면 돈을 가지고 있어서 돈으로 그 권리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이라야 비로소 그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계급인 거야.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니지. 나는 지금 그게 아니고 아마 죽을때까지도 그게 아니다. 나는 그래 그거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계급...하고 그녀는 그 집에서, 어쩔 수 없게도 계급에 속하는 계급적 인간으로서의 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해당 내용은 황정은 작가의 단편집 <아무도 아닌>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 ‘누가’ p.123~124에서 인용했다. 황정은 작가 특유의 무게감 있는 분위기와 독특한 문장, 문제적인 주제의식들이 녹아있는 아름다운 소설책이다. 서점에서 신작이 나오면 이름만 보고도 망설이지 않게 만드는 작가님들이 나에겐 몇 있는데, 황정은 작가는 그 중 하나다.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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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의 문제는 단순히 불친전한 이웃에 대한 불평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타인의 취향으로부터 비롯된 소음에서 차단될 권리, 그것을 실현할 권리, 그리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돈과 계급의 문제로 확장된다. 계급의 문제는 세대를 거쳐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다리는 줄어들어 공고화 되고, ‘권리를 실현할 수 없는 계급‘끼리 살기 위해 서로를 밀어내고 할퀴며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닦아도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룩을 지우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누군가의 취향으로 조합된 플레이리스트로부터 차단될 수 없는 생활이(p.123), 돈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독촐해야하는 그녀의 직업이(p.128), 일자리를 잃은 동료와 연대하지 못하고 자기 자리까지의 거리를 계산해야 하는 현실의 녹록함이 마음에 얼룩을 새긴다, (p.129) 지워지지 않는, 얼룩.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정당하게 세를 내고 이 집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노인을 내쫒았다는 기분이 든다. …중략… 노인은 그 방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을 뿐이고 내게는 있었을 뿐. 그냥 그것뿐. 만사가 그뿐.” - p.127



그녀는 이사를 한 후, 우두커니 앉아있던 노인을 떠올린다. 여자가 들어오기 전 여기에 살았던 그 노인. 산속의 짐승이 자기도 모르게 늘 오가는 덤불에 길을 내듯 노인이 발을 끌며 오간 흔적이나, 매일같이 머리를 대고 앉아있었는지 바싹 마른 벽에 둥글게 남은 기름 얼룩을 보며 원인 모를 죄책감을 느낀다.


노인이 자신이 살던 터전에게 내몰리게 된 것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 무기력하게 멈춰있던 노인 스스로일까, 노인의 자리를 메꾸고 들어온 그녀일까.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를 사회 구석 한 켠으로 내모는 사회의 흐름일까, 그렇다면 책임은 시스템과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있을까 혜택을 받고 있는 기득권층에게 있을까 혹은 그것을 묵인하고 편승하는 모두에게 있을까. 시작은 어디이고 끝은 또 어디인가. 잘못된 것은 어디부터 어디이며, 노인은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걸까.

 

‘누가’ 가해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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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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