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순수에서 시작된 이기성 - 뮤지컬 "머더러" [공연예술]

글 입력 2020.01.0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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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남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나 먼저 살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적인 건 당연한 것 아닐까? 똑똑하게 행동하자는 말이 어떻게 실현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약한 자를 더 보살피는 것이 똑똑한 것일까 아니면 약자는 이미 약해졌으니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큰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 똑똑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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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에 갇힌 아이들은 어른이 구조하러 올 때까지 몇 안 되는 식량으로 살아간다. 인원수대로 식량을 나누고 발 구르는 소리로 구조 요청을 계속해서 보내는 등 서로 집단의 규칙을 정해 살아간다. 하지만 새끼 여우처럼 보이는 피투성이의 친구가 등장하면서 그들의 규칙이 깨지기 시작하고 순수에서부터 시작된 이기성이 발현된다. 

 

분명 그들의 선택은 선한 마음에서 시작되었고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다수가 살아남는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결과는 악행인 아이들 행동의 당위성은 충분했다. 그렇게 공동체가 분열되고 서로 싸우기 시작하는데 그 사이에서 악의 평범성을 만나게 된다.

 

 

 

악의 평범성



극의 등장인물들은 어린 아이들이다. 때 묻지 않고 순수하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던 아이들에게서 처음으로 이기적인 면모가 발현된다. 상황이 벼랑으로 치달을수록 더 심해진다. 뮤지컬 속 넘버들의 멜로디와 목소리는 동화같이 아이처럼 명랑하다.


하지만 가사를 주의 깊게 들어보면 무서워진다. 모두를 위해 희생한다는 당위를 부여하는 모습이 아이들에게서 나타나서 더 안타깝게 다가온다. 서로를 생각하며 배려하는 모습은 점점 없어지고 철저히 살고 싶다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아이들의 변화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

 

새끼 여우가 등장하자 앨런은 자기의 몫이었던 식량을 더 아픈 새끼 여우에게 양보한다. 선의를 위한 앨런의 행동은 어쨌든 그 공동체의 규칙을 깬 것이 되고 결국, 투명 인간을 정해서 식량을 주지 말자는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아이들 개개인을 보면 한없이 착하고 여리고 마음도 약한 아이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만나 규칙을 정하고 게임을 통해 다수를 위해 한 명쯤은 희생해도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는 그 상황을 보면 누구도 그들을 착하다고 볼 수 없다.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사람의 내적 갈등과 집단에서 발생하는 외적 갈등이 계속해서 진행된다. 극을 보면서 누가 맞는 것일까 생각해보며 내가 저 상황에 부닥치면 누구처럼 행동할 것인가 고심하게 된다.

 


 

아이들


 

 

새끼 여우는 아이들이 갇힌 공간에 먼저 있었던 연약한 아이다. 피투성이인 몸을 숨기고 있다가 아이들에게 발견되는데 잘 걷지도 못하고 말도 잘 못 하는 모습에 아이들이 새끼 여우라고 부르게 된다. 새끼 여우는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 앨런, 앤, 피터, 토미, 에릭 그들 모두가 정말 살아있는 존재였을까?


어쩌면 그 모두가 이미 그 가스 수용소 안에서 죽은 아이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목적지도 모른 채 무사유를 강조한 사회에서 이유도 모르고 열차에 타고 계속 걷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부모님을 만나러 가야 하니 씻어야 한다고 가스실에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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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국 죽은 아이들. 제복을 입은 어른이 부모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며 깨끗이 씻으라고 하는 동시에 아이들은 기뻐하지만, 저 멀리 비명이 들려온다. 옷을 벗고 행복하게 희망을 품으며 씻으러 갔지만 결국 끝은 죽음이다.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맛보게 하는 그 잔인함에 눈물이 흘렀다.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는 이 장면이 발을 구르는 아이들의 꿈일 수도 있고 가스실을 향해 간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일 수 있지만, 그에 상관없이 너무나 보기 힘들고 슬픈 장면이다. 어른이 만들어놓은 이 사회 때문에 변하는 아이들의 모습 때문에 극이 끝나고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무런 죄도 없는 수많은 아이가 가스실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간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나 무겁다.

 

그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며 결혼을 할 거라고 말하면서 결혼식을 하고 집을 꾸며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가득한 노래는 한없이 맑지만, 그조차도 어른들에 의해 망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하고 실행한다는 말도 안 되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수많은 살인과 악행을 저지른 그때의 진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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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제목인 머더러는 과연 누구일까. 새끼 여우를 죽인 것은 아이들일까, 누가 죽었을까, 누가 살았을까도 분명하지 않지만 머더러는 누구인지에 대해선 분명한 것 같다. 악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마음 한구석에 나도 모르게 놓인 그 악을 경계하고 난관에 부닥쳤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앨런의 선택도 충분히 이해가 가고 앤과 다른 친구들의 선택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더 어렵고 이 극의 결말이 해피엔딩인지 비극인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가스실에서 죽어간 친구들의 꿈이라면, 아니면 가스실에 갇혀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아이들의 실제 이야기라면, 새끼 여우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라면, 여러 가지로 극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든 더 이상 이런 아이들, 상황이 절대 만들어지면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진 속 행복해보이는 가족들처럼 앤, 토미, 앨런, 피터, 에릭, 이름 모를 새끼 여우까지 모두가 각자의 포근한 꿈 속에서 가족들과 만났기를.

 


[이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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