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음 생엔 엄마가 친정엄마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

글 입력 2019.12.3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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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안 낳아도 좋고 결혼 안 해도 좋겠다. 요즘 같아선."

 

엄마의 입에서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언젠 빨리 결혼을 하라더니 어쩐 일이야. 마음이 가벼워야 하는데 그 말을 듣고 더 무거웠다. 그날도 엄마는 새벽같이 100일도 되지 않은 쌍둥이 손녀를 돌보러 가셨다.

 

"내가 애를 왜 그렇게 갖고 싶어 했는지 모르겠어. 너도 결혼할 거면 아이는 잘 고민해서 가져. 결혼 안 하고 취미 즐기면서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면서 재밌게 살아도 좋겠다."


작은언니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놀랐다. 언니는 몇 년 동안 아이를 무척이나 갖고 싶어 했다. 엄마도 언니도 아이가 잘 생기지 않는 원인이 언니에게 있지 않다는 것에서는 약간 안도했지만 어쨌거나 안 생길수록 더 갖고 싶어 지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 그렇게 고생 고생하면서 가진 아이를 가지고 나니 새로운 고생이 시작됐다. 병원에도 자주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고 불안정해서 한동안 입원을 했다. 형부는 좋은 사람이다. 같이 병원도 잘 가고 힘든 내색 없이 그 과정을 함께 했다. 하지만 형부도 일을 하러 가야 하니까 결국 혼자 두 아이를 뱃속에 가진 언니는 엄마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예정일이 다가올 때까지 방을 함께 쓰던 한두 달간 언니는 부푼 배를 안고 끙끙 거리며 잠을 잤다. 아이를 가질 준비를 할 때부터 음식도 많이 가려서인지 여행하고 맛집을 탐방하는 유투버를 보는 게 언니의 대리만족이었다. 당장은 시원한 맥주를 먹고 싶고, 디저트도 먹고 싶고, 어디 놀러도 가고 싶지만 아마 애기들이 좀 클 때까지는 어렵겠지 하면서. 그런 언니가 애를 왜 그렇게까지 갖고 싶어 했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원하는 걸 가져서 생기는 공허함이라기보다는 정말 의구심에 가깝게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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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귀엽지, 귀엽고, 귀여운데(한숨)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조카가 태어났다고 하면 정말 귀엽겠다는 말을 먼저 한다. 어떻게 귀엽지 않겠나. 보송보송한 얼굴이며, 조그만 손과 발, 초롱초롱한 눈동자. 세상에 처음 태어난 그 작은 친구를 보고 있으면 먼저 세상에 나온 내가 잘해 줘야지, 건강하게 잘만 컸으면 좋겠다 싶다. 하지만 축하와 칭찬을 들으면서도 못된 이모라서 마음이 불편하다. 정말 귀엽지만 정말 힘들다. 30분만 보고 있어도 깨닫게 될 것이다. 조카에 대한 환상이 있는 친구들에겐 꼭 그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한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처럼, 아기는 귀엽지만 함께 하는 건 결코 귀여움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전하고 싶었는지도.


나는 고생을 논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고작 선물이나 용돈을 주는 이모에 불과하니까. 내가 하는 고생이란 건 가끔 집에 일찍 오는 것 정도다. 진짜 고생은 엄마와 할머니의 몫이다. 엄마와 친정엄마. 그 귀여운 조카들을 보면서 날이 갈수록 피곤에 찌들고 일상을 잃어버린 엄마를 보는 게 힘들다. 엄마는 이미 할 일을 다 했다. 딸 셋을 기르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증조할머니도 모셨다. 근데 졸지에 큰 손녀와 쌍둥이 작은 손녀들까지. 우울할 틈이 없다고 하는 말조차 마음이 아프다. 아이를 안느라, 드느라 온몸이 아프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거기다 모유가 잘 안 나오는 언니를 위해서 돼지 족을 고아 먹이기도 하고 반찬을 만들어 가신다.


큰 조카가 어연 세 살. 쌍둥이 조카가 태어나기 전까지 큰 조카는 엄마와 함께 했다. 큰 조카도 많이 컸다고는 하지만 언니가 일하는 동안 며칠은 집에 와 있어야 한다. 우선순위가 바뀐 것뿐이지 세 조카 중에 할머니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엄마와 나는 자조적으로 애 보는 일이 직업이었으면 돈이라도 많이 받았을 거고, 주말에는 수당이 높기라도 했을 것이라는 대화를 하곤 한다. 직장은 주 5일을 기준으로 쉬지만 육아는 주 7일 불규칙적인 풀타임 업무라면서.


필요한 물건을 사드리고, 마사지를 끊어 함께 받고 오기도 했지만 결국 그건 상황을 개선하거나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잠깐 완화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진통제 정도. 엄마는 우울하거나 힘들 틈도 없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2년만 지나면 더는 아이를 봐주지 않겠다는 그 말을 할 때마다 2년만 버티자면서 참고 있다는 걸. 자기도 쌍둥이는 처음인데 언니도 애 젖 먹이는 것도 두 명이라 힘들 것 같다면서. 언니 친구 중엔 친정엄마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가 손목이 상해서 영 못 쓰는 친구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 집만 그런 건 아니고 주변에 다른 집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퇴근하고 올 때까지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맡긴다. 아이가 없지만 상황이 비슷해서 한참 하소연이 섞인 대화를 나누다가 농담조로 '다음 생엔 엄마한테 친정엄마는 하시지 말라고 해야겠다'라고 했더니 그분 역시 '하하, 그러게 말이야'하면서 웃었다. 엄마도 아빠도 혼자서 아이를 기르긴 벅차다. 시어머니는 거리가 멀어서, 혹은 자신의 일정이 있어서, 혹은 '시'어머니라서 아이를 돌볼 때 후순위가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쓰면 돈이 많이 들고 내가 원할 때 무조건적으로 맞춰줄 수도 없고 구하기도 쉽지 않다. 결국 남는 건 친정 엄마다. 친정 엄마도 거절한 말한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아이를 함께 맡는다. 딸 혼자서 힘들 거라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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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를 잘 부탁한다,

건강하게 크자 쌍둥이 조카들!

 

 

큰 조카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겨울 왕국 엘사 원피스를 사주었더니 왕관을 쓰고 아주 신이 나서 돌아다닌다. 작은 손발이 저렇게 길쭉하게 자라서 이제 말도 제법 통하고 신기하다. 아마 지금 이 쌍둥이 조카들도 이모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그새 자라서 용돈과 선물을 바쳐야 할 날이 다가올 것이다. 젖병 소독기는 탄생 기념 선물이고 당장 돌이 되면 또 큰돈이 들어가야겠지. 이모 노릇하기도 꼭 쉽지만은 않다. 돈 없는 이모는 조카들에게 별 볼일 없다.

 

못되고 겁 많은 이모인 나로서는 엄마와 언니의 저 한마디가 아니었더라도 날이 갈수록 무섭다. 멋모를 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면 모르지만 저렇게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고 나니 더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물론 신기하고 이해가 되는 부분도 생긴다. 저걸 낳고 내가 미역국을 먹었다니! 하는 말을 큰언니에게 들었을 때의 그 기이한 기분처럼 내가 날 닮은 아이를 낳아 기를 때도 그 말을 꼭 하게 될 것만 같다. 부모들의 자라나는 약간의 욕심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갓난아기일 때는 건강하기만 했으면 좋겠다가도 그렇게 클수록 이것저것 했으면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생기게 된다고 가족들을 놀렸다. 언젠 건강하기만 해 달라더니 말이 잘하네 못하네 하며 조카에게 뭐라 한다며. 끊임없는 아이 자랑 삼매경에 빠지는 부모를 보더라도 예전보다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겠다. 부모가 아이로 인해 희생한 수많은 시간과 선택이 있기에. 아이는 아이 그 자체로서 개별적 존재이면서도 부모의 노력이자 꿈이기도 하다.


세 조카들이 외할머니의 노력을 잊지 않도록 커가면서 반복학습으로 잘 입력해주려 한다. 큰 조카의 3년, 작은 조카들의 2년은 다 너희 외할머니랑 함께 했다고 사진과 영상을 물증 삼아 뒷받침도 해줄 것이다. 마음이 출렁거린다. 연애도 선택, 결혼도 선택, 아이도 선택인 시대가 되어서일까. 


결혼은 했다가도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쳐도. 아이는 낳았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뱃속에 넣을 수도 없는 일이다. 혼자 살거나 둘만 사는 일은 지금 좋고 나중엔 좀 허전한 선택이고, 세 명 이상이 사는 일은 지금은 고되고 나중엔 좀 복닥복닥 허전하지 않은 선택이 되려나. 언니들 아이도 맡았던 엄마에게 내 아이도 부탁드리기엔 너무 곁에서 고생하는 걸 많이 봤기에 고민이 더 깊어진다. 아이란 이렇게 작고 소중하고 귀엽고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존재.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로 고민은 접어두자.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일단 오늘 큰 조카가 오는 날이니 연말맞이 나이스한 이모인 걸로.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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