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캔버스 위에 한 겹씩 쌓아 올리는 햇빛과 바람, "고흐, 영원의 문에서"

"그림은 이미 자연 안에 있어. 꺼내 주기만 하면 돼"
글 입력 2019.12.3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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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예술가의 죽음을 들었다. 작년, 작품으로 상을 받으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그였다.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고자 했던 그의 목소리는 이제 들을 수 없다. ‘늘 깨어있던 그들, 너무 일찍 잠들다’라는 기사 글이 마음을 찌른다.


기사 아래 달린 누군가의 말은 이제 총알이 되어 날아든다. ‘그러게, 자기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어?’ 총알이 박힌 마음이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한다. 예술가의 재능을 질투한 이들이 쏜 것일까, 스스로가 쏜 것일까, 아니면 지독한 가난이 그것일까. 안갯속에서 날아온 총알의 발신지는 희미하다.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이 먹먹하다.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작품보다 더 잘 알려진 것이 그의 이름이지 않을까.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으니 제발 떠나가지 말라는 외침에 답이라도 하듯, 많은 이들이 그가 겪어온 삶에 귀 기울인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위로한다. 설령 그것이 그의 마음에 박힌 총알을 녹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가 스스로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타살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추하고 기분 나쁜 그림이다.’ ‘요즘은 아무나 다 화가가 된다고 하지.’ 수많은 가시들이 박혔던 그에게, 총알이라는 더 큰 고통은 잠시 가시를 잊고 숨 쉴 틈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 줄리언 슈나벨 감독은 희미한 발신지 대신 여전히 살아 흐르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 속에서 꿈틀거리는 그것을 계속해서 말하고 보여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 자신의 길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는 누구보다 용기 있었던 사람. 잠들었지만 여전히 깨어있는 이들의 목소리에 계속해서 귀 기울인다. 흐르는 그 목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주변에 있는 안개도 언젠가 맑게 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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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고흐의 그림에 영향을 준 화가는 렘브란트 같은 네덜란드의 옛 거장들이다. 거친 붓 스타일이나 음영이 뚜렷한 그림을 볼 수 있는데,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에서 그것이 잘 드러난다. 어두운 오두막 같은 공간의 작은 식탁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다. 빛이라곤 천장에 달린 석유램프 불빛 하나가 전부인 곳에서 그들은 함께 감자와 차를 나눠 먹는다.


공간을 뒤로 넣어 공간감과 세밀한 묘사를 표현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램프 불빛에 따른 탁월한 음영 표현으로 사람들의 표정, 행동으로 시선을 이끈다. 인물이 입은 옷의 세월의 흔적과 손과 얼굴 곳곳에 새겨진 주름은 진득하면서도 단단한 삶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그림에 담고 싶다는 그의 열망이 새겨진 것이기도 했다.

 

그 후에 그린 <구두 한 켤레, 1886>에서도 이러한 음영과 삶의 주름이 잘 드러난다. 영화에서 줄리언 슈나벨 감독과 미술팀은 재현이 아닌 재해석을 목적으로, 완벽한 모작이 아닌 제작팀만의 스타일이 담긴 그림을 탄생시켰다. 그가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오고, 무섭도록 몰아치는 바람에 문과 창문이 쉼 없이 삐걱거린다.


작은 집은 싸늘하다. 구두를 벗고, 움직이는 그의 붓질을 가만히 보여 주는 화면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꽤 오랫동안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에 묘한 편안함과 먹먹함이 교차한다. 화면을 통해 훔쳐보는 그의 작업 속에 내 마음도 몰래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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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프랑스 파리와 아를로 넘어오면서, 그의 그림에는 다양한 색채가 담긴다.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해나갔다. 영화의 쉼 없이 흔들거리는 화면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게 한다. 빛을 따라 걷고, 눈 속 가득 빛나는 것들이 들어찬다.


빈센트 그가 그토록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이 이런 것인가, 추측해본다. ‘관객이 영화를 보는 동안 빈센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잔잔한 빛에서 그가 느꼈을 바람의 부드러움과 따뜻한 냄새가 살랑거리는 듯하다.

 

그곳에서 고흐와 고갱은 함께 작업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고갱은 기억과 상상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반면에, 고흐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이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카페 주인 지누의 초상화였다. 고갱은 인물 뒤에 공간을 넣어 원근감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뒤로 앉아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책상에 누워 잠들어 있는 사람, 당구대, 빨간 벽지와 그의 앞에 놓인 술병, 그리고 어딘가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은 공간이라는 맥락 속에서 인물을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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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고흐가 그린 지누는 다르다. 가만히 어딘가 응시하는 얼굴은 편안하면서 생각에 잠긴 듯 보이고, 노란색으로 덮인 배경은 인물에 오롯이 집중하게 한다. 고갱은 천천히 생각하면서 그려야 한다고 했지만, 고흐는 순간을 담아내기 위해 빠른 붓질을 선호했다. 고갱의 말처럼 물감이 두텁게 올라가고 붓질이 살아 있는 고흐의 그림은 마치 부조 같았다. 이 시기에 고흐는 <반 고흐의 의자, 1888>, <밤의 카페 테라스, 1888>, <해바라기, 1888>를 작업한다.

 

"그림은 이미 자연 안에 있어. 꺼내 주기만 하면 돼"

 

영화는 특히 아를 시절 고흐의 작업을 잘 담아낸다. 실제 고흐 역할을 맡은 웰렘 대포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기도 했는데, 영화 내내 3인칭보다는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언덕을 오르는 그의 숨소리와 함께 마치 실제로 풀 사이를 건너고 돌 위를 오르는 기분을 가져다준다.


촬영 감독이 실제로 밀밭에 3일 동안 누워있기도 하며, 무엇보다 고흐의 시각에 집중한 이들은 색다른 색채를 보여준다. 자연 속에 앉아 캔버스 위에 한 겹씩 쌓아 올리는 햇빛과 천연 광물 안료들의 색감은 그의 작업을 손으로 쓰다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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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떠나고, 고흐는 귀를 자른다. 그리고 도착한 병원에서 1인칭으로 보여주는 의사의 얼굴은 이상하게 왜곡되어 보인다. 의사의 시선은 고흐를 바라보면서도, 그 너머에 있는 나를 바라본다. 의사의 권유에 따라 생 레미 요양원으로 가게 된 고흐는 그곳에서도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이때 고흐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별이 빛나는 밤, 1889>과 <사이프러스 나무, 1889>가 탄생한다. 작은 선들로 이루어진듯한 그의 작업들은 이 시기에 몇몇 전시회에 초청받으며 이름이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다.

 

퇴원한 뒤 그는 오베르 쉬즈 우아즈라는 파리에서 가깝고 작은 시골 마을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편안했을까. 오베르는 밀밭과 자연 풍광이 좋아 많은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는 곳이었다. 사랑하는 자연을 담아내던 그는 오베르에서 80일 동안 머물며 75점의 작품을 그렸다. 그리고 그 75점을 마지막으로, 그는 그곳에서 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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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900여 점의 페인팅, 1,100여 점의 드로잉과 스케치 등 총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개처럼 막막하고 잡히는 것 하나 없는 곳에서도 빈센트 반 고흐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는 순간뿐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파리, 아를, 생 레미 요양원, 오베르 쉬즈 우아즈 등 실제 고흐가 머물렀던 장소에서 담아낸 화면들은 고흐의 마음을 잠시 헤아리게 한다. 그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고흐가 보았고,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일지, 영화라는 작은 공간 속에서 느껴보길 바란다.

 

“왜 당신이 화가라고 말하죠?”

 

“그림을 사랑하고 그려야만 하니까요. 전 늘 화가였어요. 그건 확실해요.”

 

“타고난 화가다? 그걸 어떻게 알죠?”

 

“노력해봤지만 다른 건 할 수 없어요. 뭔지는 모르지만 제 안에 뭔가가 있어요.”

 


[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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