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애착의 비가역성에 관해 – 연극 "듀랑고(Durango)"

"타인은 지옥이다." - 그런데 가족도 지옥이야.
글 입력 2019.12.29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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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가역적인 애정과 증오의 관계


 

부모와 자식 사이에 만들어지는 정서적 유대란 참으로 기이한 감정이 아닐 수 없다. 내 자식에 관한 아픔이라면 부모 입장에서는 당연히 알 법해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타인에 가까운 수준으로 서로를 파악하고 있기도 하고. 어쩌면 이 관계에서 전제되는 ‘당연함’이라는 상태, 그러니까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네 부모인데’, 혹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자식인데’ 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당연함 때문에 서로를 세상에서 잘 아는 동시에 가장 모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관계는 정말 신기하다. 한번 만들어지면 법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철회가 불가능한 비가역적인 관계다. 애정과 증오가 점철되어 복합적인 애착으로 발전하는 그런 관계다.

 

이들 사이의 관계만큼 애착이 깊은 관계도 찾기 힘들다. 이때 애착은 서로를 향한 따뜻한 애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애착이란 “인생 초기에 가까운 사람에게 강한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유대란 단지 사람과 사람 간에 만들어지는 인류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방과 부대끼며 살아갈 때 감정적으로 경험하는 “비이성적인” 상황 모두를 포괄한다. 이성적이지 않다는 말,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말은 굉장히 잔인하다. 우리가 세상에 던져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습득해야 하는 규범들은 이성이라는 말로 점철되어 있는 반면 규범이 적용되는 실제 상황들은 우리의 이성적인 기대감을 완전히 져버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 상황 중 하나가 부모와 자식 사이에 형성되는 비이성적인 애착 관계다. 앞서 말했듯이 이 관계는 한 번 만들어지면 철회가 불가능하다. 꼬리표처럼 스스로를 따라다니면서 부모라면 자식을 향한 애정과 강박을, 자식이라면 부모를 향한 애증을 평생토록 분출하게 만든다. 일 분 전에 싸움을 벌였어도 삼십 초 만에 증오를 미안함과 애정으로 바꿀 수도, 그 반대를 일으킬 수도 있는 비논리적인 상황이 평생 지속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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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완서 작가

 

 

 

2. 문학작품의 예시: 박완서, <엄마의 말뚝>


 

이러한 복잡 미묘한 관계를 잘 풀어낸 예시로 문학 작품에서는 박완서 작가의 <엄마의 말뚝>이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 작품에서, 말뚝이라는 단어에서도 비추어지듯 양자의 관계는 때때로 끊어 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개인의 정신적인 고통에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도, 역설적으로 개인으로 하여금 이성에의 명령으로 가득한 사회를 견딜 수 있도록 뿌리를 마련한다. 서로의 감정을 논리정연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관계에서의 모순과 고통을 심화시키는 원인이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언제나 이성적으로 살아갈 수만은 없는 인간에게 “예외”라는 쉼을 제공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서로는 남남이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라는 정서적인 연대로부터 서로가 서로 자신인 동시에 서로라는 모순적인 관계성을 획득한다. 서울에서 출세하는 삶을 꿈꾸는 어머니와 그 요구를 감내해야 하는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애착은 서로가 경험하는 고통과 쉼을 동시에 표현한다. 작가의 섬세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나’는 신여성으로 당차게 살아야 한다는 모친의 강박을 받아내야 하는 존재다. 모친은 ‘나’와 ‘나’의 오빠를 서울 문 안의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면서 그녀 자신부터가 서울이라는 혁신에 다가가고 싶은, 그럼으로써 자신을 얽매는 시골의 냄새를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이다. 서울 문 바깥에 존재하는 완곡동에서 서울 안으로의 진입을 꿈꾸는 ‘나’의 가정은 서로를 향한 연민과 공포, 애정으로 둘러싸이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어머니의 헌신은 ‘나’와 오빠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따뜻하고 안타까운 한편 그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었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이기적이다.

 

‘나’와 오빠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사랑과 보호 안에서 성장하며 효성을 드러내지만 그녀의 히스테리를 완전히 감당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에 명백하게 타인의 시선에서 그녀를 바라보기도 한다. 이는 ‘나’가 성장하여 성인의 시점에서 어머니를 간호할 때, 특히 환각을 경험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질 때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유언을 수행하려고 하는 유일한 인물로, 마지막까지도 그녀에 대한 애착을 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남들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을 어머니의 이름을 되뇌며 “어머니의 함자는 몸 기(己)자, 잘 숙(宿)자여서 어려서부터 끝까지 맑을 숙자가 아닌 걸 참 이상하게 여겼었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어머니를 향한 미련에 가까운 애착이 비석의 말뚝처럼 박혀 있음이 드러난다.

 

세 개의 시리즈로 연재된 본 작품을 이 글에서 완벽히 다루리란 불가능할뿐더러, 그것이 이 글의 목적도 아니므로 작품에 대한 소개는 여기서 마치고자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부모 자식 사이의 이러한 비가역적인 애착 관계에 관심을 가져 왔고, 어떻게든 그 비가역성을 서사적으로 풀어내고자 노력해왔다는 점이다. 연극 <듀랑고>도 그런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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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묻어 놓았던 상처들을 폭로하면서


 

시놉시스를 읽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아버지와 그 밑에서 태어난 두 아들의 이야기. 자식들의 어머니가 떠난 지 십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각자가 묻어 놓아야만 했던 상처들을 폭로하는 이야기. 시놉시스에 따르면 아버지인 ‘부승’은 정리해고를 당해 혼란스러운 감정을 안고 두 아들과 콜로라도 주에 있는 듀랑고로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아무래도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해고 통보로부터 경험한 패배의 감정을 포함해서 배우자 없이 자식 두 명을 부양해온 십여 년의 세월동안 내면에 쌓였던 외로움과 내적 고통, 갈등과 같은 감정들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듯하다.

 

두 명의 아들은 어떨까. 직접적으로 두 아들이 개인적으로 어떤 일들을 겪으며 상처를 묻어 왔는지는 시놉시스에서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각자의 아픔을 숨긴 채 이들은 차를 타고 길을 떠난다”고 명시했다는 점에서 두 명의 아들 역시, 아버지가 쌓아온 상처의 무게만큼이나 각자의 내면에 제각기의 상처들을 모아 곪아 터지기 직전까지 숨겨왔음을 보여준다. 결국 듀랑고에 갈 수 있는 표를 구하지 못하는 대목에서 세 명 각자의 울분이 마침내 폭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저 시놉시스만 읽었을 뿐인데도 연극이 우리에게 보여줄 감정의 골이 상상 이상을 깊다는 걸 추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끝내 서로에게서 분노를 거두고 서로의 슬픔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는 결말을 맞이한다고 암시되어 있기에, 의외로(?) 평화로운 연극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느 쪽이든 인물들이 관객을 향해 내면에 존재하는 상처들을 마음껏 폭로하고 내뱉을 것이므로, 그 감정들을 주워 담을 수 있을 정도의 깡은 탑재하고 가야겠지만 말이다. 이것이 내가 본 작품에서 기대하는 요소 중 하나기도 하다. 제발 인물들이 비가역성으로 연결되어 있는 서로를 향해 가감 없이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길 바란다. 그렇게 마음껏 자신이 상처받은 만큼 상대방에게 상처를 돌려주고, 울분을 토해내길 바란다. 언제까지고 관계가 주는 ‘당연함’으로 인해 말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것만이,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결국 일상의 굴레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면, 비가역적인 관계의 비가역성 때문에 서로를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 속성을 때로는 악용하는 대범함도 필요하다. 다름 아니라 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다. 네가 다라고 믿는 내 모습이 다가 아니고, 사실은 네가 전혀 알지 못하는 아픔들을 내가 숨기고 있었을 뿐이라는, 발악에 가까운 비명도 지를 줄 알아야 관계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비명을 질러도 관계는 깨지지 않고 오히려 견고해진다. 우습게도 서로를 절대 놓을 수 없다는 이상한 애착 때문이다. 2020년의 연극 일지를 장식할 첫 연극이다. 여러모로 삐뚤어진 기대를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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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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