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하실의 판타지, 영화 '기생충'

글 입력 2019.12.23 10:1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크기변환]movie_image.jpg

 

 

개봉한 건 오월인데 이제서야 봤다. 수상도 많이 하고, 호평이 자자해서 무척 기대한 작품이다. 막상 보고 나니 기대한 만큼의 강렬함은 없었고 영화가 끝난 뒤 언짢은 감정만 남았다. '기생충'에 대한 평론을 읽으며 실망감을 달래려 했지만, 평론가들이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분석이 두통을 일으켰고 나는 더 우울해져서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기생충'의 평화로운 도입과 절망적인 마지막의 대비를 생각하면 현실로 시작한 영화가 비현실적인 상징으로 끝난 게 아쉽다. 빈부격차에 대한 우화라지만, 우화의 정의에 따르자면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 나는 여기에 무슨 풍자나 교훈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가 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에게 기생하길 원한다? 빈과 부라는 사회 계층 문제를 두 시간 십 분 동안 완벽하게 보여줄 수도 없을뿐더러, 부유층은 이 갈등의 고리에서 유유히 빠져나간다.

 

'상승과 하강'이라는 서사 구조에 상승은 없고 하강만 있다. 적당히 복작거리게 살던 기태네 가족은 박 사장네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끝도 없이 굴러떨어진다. 영화 중반에 공포 영화처럼 나타난 가정부 부부와 함께 기태 가족은 박 사장네에게 돈 없는 벌레들, 기생충이 된다. 박 사장의 집이라는 공간에서 기태 가족은 하나의 범주, 상징으로 기능한다.


빈부 격차에서 빈을 맡고, 하위 계급으로 뭉뚱그려지는 기태 가족의 위치는 끝도 없이 내려가는 계단 밑에 있다. 박 사장네 집을 지상으로 설정해서 시선을 자꾸 밑으로 내려가는데, 이건 정상의 기준이 박 사장 가족으로 맞춰졌다는 뜻이다. 부유층이 기준이기 때문에 저 사람들이 얼마나 부자이냐가 아니라, 당신들이 얼마나 못났는지 계속해서 강조한다.


 

[크기변환]movie_image (1).jpg


 

기태 가족은 박 사장네만큼 세련되지도, 여유롭지도, 점잖지도 않으며, 퀴퀴한 반지하 냄새도 난단다. 나로서는 냄새 좀 나는 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다 저마다 집의 냄새를 품고 있는 법이다) 기정이 한심스럽게 '반지하 냄새'라고 말하면서 기태 가족의 삶이 조금 더 구질구질해 보인다. 결국 영화는 박사장의 집 안에 기태 가족을 밀어 넣으며 빈부 격차란 무엇인지 말하려 한다.자본 없이 부잣집의 선을 넘은 기태 가족의 결말은 잔인하다. 구워삶기 좋은 일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들을 파국으로 이끌고 간다.


기태 가족을 향한 징벌적 서사는 보는 관객을 (특히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가난에 대해 말하는 것 같지만, 영화에서 가난은 부자를 욕망하게 하는 결핍의 상황일 뿐이다. 지상과 지하, 정상과 비정상, 선과 악,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이 부/빈이라는 계층 구분과 얽힌다. 긍정적 이미지가 불공정할 만큼 한쪽에 몰려있다. 선량한 부자들은 가난을 볼 일이 없기 때문에, 가난은 지하에 숨어 있다. 봉준호가 그리는 가난은 범죄 친화적이고, 냄새나며, 불행하고, 서로 증오한다.

 

이런 식으로 적나라하게 가난을 다뤘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 사실 돈이 없다는 건 정말 좋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 가난에 미덕 같은 건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할 수 있으면 최대한 자기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왜 이 시선의 무게를 한쪽만 짊어져야 하는가? 하위 계급을 욕할 이유는 차고 넘치는데 (무계획적이다, 사기를 친다, 사람을 죽였다...) 상류 계급을 욕할 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다.


박 사장의 죄라면 순진한 아내를 두고 냄새에 좀 예민했던 것뿐이다. 죄없이 피해받는 역할을 할 만큼 상류 계급은 결백한가? 기태 가족은 빈부 격차에서 '빈'을 상징하느라 난데없이 가정부 부부랑 피 튀기는 싸움을 하는데 왜 박 사장네 가족은 아무 상징 없이, 부유층의 단란한 일상만 보여주는가?


 

[크기변환]movie_image (2).jpg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는 더 이상 노동하는 만큼 얻는 게 아니다. 빈부 격차란 누군가는 나보다 훨씬 못산다기보다, 누군가는 150만큼 일해서 100을 버는데 누구는 80을 일해서 150씩 벌어간다는 것이다. 분배의 불평등이 빈부 격차를 낳는 중요한 요인이다. 박 사장이 저 건물을 사기 위해 최저시급에 맞춰 봉급을 받았으면 저렇게 기름때가 흐르는 얼굴로 집에 입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원인을 많이도 지적한다. 계획이 없다. 열정이 없다. 날로 먹으려 든다... 그런데 박 사장은 왜 부자인가? 왜 박 사장은 당당하게 상대방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으며, 왜 벌레 하나 없는 반짝이는 집에서 발 뻗고 잘 수 있는가? 노력했으니까? 똑똑해서? 도덕적이어서? 다 우스운 소리다. 빈부에 대한 논의는 사회 구조의 불평등 문제를 짚지 않고는 제대로 얘기할 수 없다. 그 원인을 개인에게 돌릴 수 없다.

 

박 사장네는 자신들의 집을 '정상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사람을 고용한다. 박 사장 가족은 자신들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타인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폄하당하면서도 참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성실함에 부자들이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기생충은 누가 봐도 기태 가족이 분명하다. 충숙이 기태를 바퀴벌레 같다고 하는 장면이나, 포스터를 살펴보면 기태 가족은 분명 박 사장의 기생충이다. 빈부 격차에 대해 말한다고 하지만, 누가 봐도 가난의 처절함과 불행만 강조하는 이 영화는 기만적이다. 부자는 악할 것 같지만, 사실 악한 건 가난이고 부자는 선하다는 식의 클리셰 비틀기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당연히 부자는 착하다. 그래서 어떡하자는 건가? 착하다고 해서 무죄는 아니지 않은가.


부자는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다. 부자들은 카메라 밖에서 찍히는 사람들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다. 순진하게 관조하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자격은 부유층에게만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비난할 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부자를 욕할 말은 항상 부족하다. 그 말은 이 사회가 부를 윤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깨끗할 것. 교양있을 것. 선을 지킬 것. 가난한 사람들은 이를 지킬 수 없는데, 그러면서도 부자들이 이를 지키는 훌륭한 인물들로 보일 수 있게 노동력을 제공하느라 자신을 소모한다.

 

영화 '기생충'은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적나라하게 한국 사회를 보여준다는 많은 영화가 그러듯이 적나라함 말고는 딱히 남는 게 없다. 그마저도 카메라는 훔쳐봐도 항의할 수 없을 약자들을 골랐다. 돈 없는 것만으로도 열 받는데 이 영화가 전 세계에서 호평받는 걸 생각하면 더 짜증 난다. 깡통에 동전 던져주듯이 미디어는 빈곤을 다룬다. 빈곤은 불행해야 하고, 처절해야 한다. 그 정도가 아니면 관심 가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빈곤의 원인에 대해서 개인의 문제 이상으로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가난이 문제가 아니다. 누가 집도 없이 반지하에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왜 어떤 사람은 500채 이상의 집을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시선은 밑으로 내려갈 게 아니라 계속 위로 올라가야 한다. 왜 운전기사가 말 한마디에 잘리는 게 당연한 세상인가. 몇 년 동안 일한 가정부가 사모님 말에 보따리 싸고 쫓겨나면서 항의도 못 하나. 부는 항상 노동의 문제를 숨긴다. 정상적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부유층이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기태는 가장으로서의 고충을 나누려 하다가 박 사장에게 선을 지키라는 경멸의 눈초리를 받는다. 바로 전날 수해에 온 집이 물바다가 되어 미칠 지경인 사람은 사는 게 다 이런 거지 하며 박 사장과 동질감을 느끼려 하지만 박 사장은 그럴 이유가 없다. 이 선은, 신분제가 없는 사회에서 신분제를 원하는 사람들이 짓는 구분이다. 기태는 가정부 남편과의 살육(계급 갈등)에서 벗어나려는 박 사장을 찔렀기 때문에 영영 지하실에 갇히는 운명이 되었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이 결말이다. 기태는 평생 지하실에 갇혀야 한다. 아들 기우는 그를 구하기 위해 자수한다거나,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대신 신분 상승을 해서 아버지를 구하겠단다. 이런 결말은 무력감을 극대화할 뿐이다. 풍자라면 웃겨야 하는데, 나는 하나도 웃기지 않다. 기태가 지하실에 갇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확실한 결말을 위해서? 빈부 격차에 확실한 결말이라면, 닫힌 결말이고 그건 현재 진행형 문제에서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단 것이다.


영화는 가난을 극대화하는 데는 과도한 설정을 '영화적 허용'이라며 원하는 대로 사용하다가, 마지막에서는 이게 현실이라는 듯 기태에게 지하실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이게 현실이라니?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영화는 자기가 원하는 이야기를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서사의 도구다.

 

기태는 지하에서 나올 수 없는 게 아니다. 감독과 영화를 평가할 많은 사람들이, 기태가 지하실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회는 가난이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고, 매혹적인 불행의 무게를 계속 짊어지기를 바란다. 결국 이 영화는 부유층을 위한 잔혹 동화에 불과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공이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해 몸과 마음이 괴롭지' 않다.

 

 

 

김나은 태그.jpg

 

 



[김나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06183
 
 
 
 

등록번호 : 경기, 아52475   |   E-Mail : artinsight@naver.com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20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