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기억하고 이야기하기 [공연예술]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린 아이 '앨빈'과 어른인 줄 알았던 아이 '톰'의 이야기
글 입력 2019.12.1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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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뮤지컬 <레드북>의 가사이자,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인간의 개인적인 경험이 언어라는 형태로 만들어질 때 그것은 살아 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이야기가 모여 인간은 정체성을 가지며 삶의 의미를 찾는다. <레드북>의 안나는 자신을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 이야기하고, 자신의 상상과 이야기를 글로 쓰며 정체성과 삶의 방향을 찾는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읽고, “‘잊지 않음’으로 이루는 문학의 공동체”라는 글을 썼었다. 그 글을 통해 문학은 타인의 고통을 대면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전달하면서 독자들을 윤리적인 문학의 공동체로 만든다고 말했었다. 타인의 고통이 아니더라도, 이야기와 글은 개인의 경험과 시간을 살아 숨 쉬게 하며 그것이 계속 기억될 수 있도록 한다.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에는 이 ‘이야기하기’와 ‘잊지 않음’을 일찍 깨달은 ‘진짜 어른’ 앨빈과 ‘어른’인 줄 알았으나 앨빈이 죽고 난 후에야 이것을 깨달아가는 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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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의 불이 꺼지고, 배우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고요한 공간을 가르는 그 무거운 발소리를 듣기만 해도 그가 가진 감정의 무게가 느껴진다. 죄책감을 가득 머금은 발걸음으로 단상에 올라온 톰은 앨빈의 송덕문을 쓰려 하지만, 톰은 앨빈이 자신에게 어떤 친구였는지조차 쓰지 못하고 빈칸으로 남긴다.

 

앨빈이 왜 추운 겨울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는지, 자신이 무엇을 놓쳐버렸는지, 어디부터가 자신의 탓인지 몰라 괴로워하던 그때 앨빈이 나타나 말한다.  

 

“네 머릿속에 이야기만 몇천 개야~ 그냥 하나 골라 적어버려!”

 

톰은 놓쳐버린 그 순간을 찾아 송덕문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앨빈을 따라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 본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린 아이, 앨빈



앨빈이 여섯 살 때 엄마는 죽었다. 앨빈은 장례식장의 검은 정장, 진한 향, 꽃다발같이 작고 필요 없는 기억들만 선명히 남아있고 엄마의 기억이 자꾸만 흐려지는 걸 느낀다. 그럼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기에 남겨진 앨빈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사건을 겪은 후에도 멈출 수 없이 계속 살아가야 하는 앨빈은 엄마의 기억과 행복했던 순간들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을 것이다.

 

앨빈은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의 죽음이라는 큰 상실을 경험했고, 홀로 세상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인생에서 중요한 건 소중한 관계와 기억들을 계속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란 걸 일찍 깨달았던 것 같다. 앨빈은 어린 시절에 멈춰버린 특이한 아이가 아닌, 너무 빨리 자라 버린 어른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할로윈, 앨빈은 엄마의 옷차림을 하고 엄마의 유령이 되어 학교에 간다. 톰은 영화 ‘멋진 인생’에 나오는 클라렌스 천사의 분장을 하고 학교에 왔고, 선생님은 앨빈에게 톰을 소개한다.

 

“클라렌스 천사님, 이쪽은 앨빈 어머니세요. 천사님의 엄청난 팬이시랍니다.”

 

앨빈에게 톰은 마치 엄마가 보내준 천사였고, 앨빈은 이제 톰과의 기억들을 만들며 살아간다. 앨빈과 톰은 함께 책방에서 그들만의 책을 찾기도 하고, 레밍턴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함께 숨어들어 가기도 하면서 둘만의 추억을 가득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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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학생이 되자, 톰은 보통의 아이들과 비슷해진다. 톰은 앨빈에게도 평범하게 개성을 없애고 살자고 말한다. 엄마의 유령도 그만하고, 과거는 좀 묻어가며 살아야 인생이 편해진다고 했지만, 앨빈은 자신의 정체성이 엄마와 톰과의 행복한 기억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톰은 대학에 가기 위해 ‘나비’라는 글을 써서 앨빈에게 먼저 들려준다. 톰은 ‘나비’가 앨빈과의 추억으로부터 나온 것을 몰랐던 것 같지만, 앨빈은 ‘나비’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는 톰이 둘만의 추억을 글로 쓴다면 그 기억은 엄마의 기억처럼 자꾸 흐려지지 않고 톰의 글로 다시 살아나 계속 기억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앨빈은 톰이 대학에 가면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짐작하면서도 슬프고 담담한 표정으로 톰을 보내준다.

 

방학이 되어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톰은 글의 구성과 기술에 몰두한다. 그런 톰을 보고 앨빈은 톰을 밖으로 끌어내 새로운 추억, 이야기를 만들어 준다. 그것은 역시나 톰의 영감이 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앨빈의 미소 어린 표정은 마치 ‘진짜 어른’인 듯하다.

 

 

 

어른인 줄 알았던 아이, 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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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책방을 완전히 물려받게 된 앨빈은 산더미 같은 서류에 둘러싸여 소중한 기억들이 또 자꾸만 흐려지는 걸 느꼈을 것이고, 톰에게 ‘나도 너처럼 어른이 되어 가나 봐’라고 말한다. 세상이 말하는 어른이 되는 게 두려웠던 앨빈은 톰에게 가지 말라고, 크리스마스 때까지만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때의 톰은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어느 정도의 명예를 얻으며 ‘어른’의 세계에 진입했었고, 그 세계에선 미래를 바라보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앨빈과의 이야기들은 자꾸 잊었다. 자신의 글이 어디서 나오는지, 자신이 무얼 원하고 좋아하는지까지도 다 잊은 톰은 자신의 언어를 잃었고,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도 인지하지 못한 채, 톰은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낮아져 가는 자존감에 한없이 시달렸다.

 

그래서 톰은 앨빈의 부탁을 듣고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더 걱정한다. 그리고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앨빈에게 도시로 오라고 제안한다.

 

앨빈은 다시 톰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톰은 손바닥 만 한 동네에서 떠나지 않는 앨빈이 ‘꽉 막힌 인생’ 같아 보였지만, 앨빈에게 중요했던 건 그 동네가 아니라 기억들이었다. 그래서 앨빈은 클라렌스 천사 톰과 함께 아주 흔쾌히 동네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톰은 몰랐다. 앨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세상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녔다. 보통 ‘어른’이라 함은 돈과 명예를 좇아야 한다고 들어왔기 때문에 과거는 과거일 뿐, 다 지나간 것이라 생각하고 미래만 바라보면서 달렸다. 그래서 결국 앨빈에게 오지 말란 말을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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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극을 보는 우리들은 앨빈보단 톰에 가깝게 살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있어서, 너무 나의 모습 같아서 톰을 질책할 수가 없다.

 

“모두 어릴 적 친구는 잊잖아요.”라고 절규하는 톰과,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도 그 감정에 휩싸여 외롭게 떨리던 친구의 손 같은 건 전혀 보지 못한 톰을 ‘나쁜 놈’이라 비난하면서도 왜인지 마음 한편이 씁쓸하다.

 

앨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앨빈은 톰에게 송덕문을 부탁한다.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없었던 톰은 한 시인의 말을 인용해 송덕문을 쓰지만, 앨빈은 ‘너한테 써달라고 했잖아’라고 대답한다. 앨빈이 원했던 건 톰의 언어로 쓰인 글이었다.

 

톰이 더 이상 둘의 이야기를 글로 쓰지 못하자 앨빈은 한없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앨빈은 ‘진짜 어른’이기도 했지만, 너무 빨리 자라버려서 상처가 많은 아이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래서, 혹은 톰에게 기억이 되고자, 혹은 천사 클라렌스를 만나고자 앨빈은 다리에서 뛰어내린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게 다야’, 기억과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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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앨빈이 ‘왜’, ‘무엇 때문에’ 뛰어내렸는지를 찾고 싶어 한다. 그것이 사회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치 뉴스처럼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그랬는지를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톰에게 앨빈은 원인, 인과관계 같은 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한다. 그건 네가 보지 못한 것이고 그 보지 못한 것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는 공연 내내 톰의 기억과 이야기를 상징했던 책과 종이들을 가리키며 ‘이게 전부’라 말한다. 보지 못한, 알 수 없는 ‘왜’는 생각할 필요 없다. 톰이 기억해야 할 것은 앨빈이 어떤 친구였는지, 그리고 앨빈과의 추억들이다.

 

이어서 앨빈은 사실 이 기억들이 끝이 아니라 말한다. 이 기억들, 앨빈의 삶의 이야기를 톰이 계속 해서 기억하고 ‘글’이라는 매개로 숨을 불어 넣어준다면, '호수에 돌멩이 치는 물결같이 멈추지 않고 시간 넘어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위로한다.

 

그렇게 앨빈은 톰의 몫을 남겨놓고 떠났다. 톰의 몫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게 다야, 이게 전부야.

참 아름답지 않니.

 

네가 소중히 간직한 이야기.

잘 둘러봐.

네가 찾던 이야기.

잘 봐.

전부 여기 있잖아.

그래 알아. 뭔가 아쉽지.

정답을 바랬겠지.

 

흘러간 틈새에

놓친 순간 속에

커다란 비밀이 있는 게 아냐.

 

둘러봐, 우리의 평생의 이야기

이젠 숨 불어넣어 줘.

 

우리의 수많은 기억과 추억에

새 생명을 주는 거야.

 

수천의 순간

이야기로

지워지지 않고 영원토록

웃음과 눈물로 톰과 조지 함께

그려줘.

 

근데 잘 봐 톰,

사실은 이게 끝이 아니야.

호수에 돌멩이 치는 물결같이

멈추지 않고 시간 너머 남아.

네 몫이야,

내 삶의 이야긴 다.

네 것.

둘러봐, 톰. 네 거야.


-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중 'This is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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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톰은 계속 쓰지 못했던 ‘눈 속의 천사들’을 완성한다. 둘만의 추억이 ‘눈 속의 천사들’이라는 글로 재탄생하는 순간, 눈을 맞으며 서로를 바라보는 톰과 앨빈은 정말 두 쌍둥이 천사 같아 보인다. 앨빈은 이제 톰의 기억과 글 속에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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