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배우, 가족, 진실에 관하여 -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영화]

글 입력 2019.12.1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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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까뜨린느 드뇌브에 대한 사견(私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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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화를 좋아하지만 매니아라고 할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끔 프랑스 영화를 보며 나도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싶다, 하는 실천하지 못하는 로망만 몇 십 년째 가지고 살 뿐이다.


이 로망은 올해 8월 재개봉한 뮤지컬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관람한 후 더 크게 마음에 자리 잡았다. “쉘부르의 우산”은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보았던, 프랑스 영화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해준 작품이며 동시에 내가 프랑스어에 로망을 갖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영화 속 여주인공이었던 까뜨린느 드뇌브는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프랑스 배우였다.

 

드뇌브가 프랑스 작은 항구 도시 쉘부르에서 우산 가게 딸인 주느비에르 역할로 분해 연인을 향해 사랑스럽게 미소 지으며 첫 등장하는 장면은 항상 볼 때마다 화면 속 설렘과 행복한 기분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연인과의 행복한 순간, 이별의 슬픔 등을 표현하는 감정 연기와 노래를 완벽히 소화하는 모습은 우아하면서도 매력적이었고 그렇게 나는 그를 프랑스 영화에 로망을 가지게 해준 배우로 기억한다.

 

시간이 꽤 흐른 후, 다시 그의 이름을 보게 된 것은 “미투” 운동에 관한 그의 입장이 담긴 어느 기사에서였다. 드뇌브는 “미투”운동에 대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며 남성에게 유혹할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라고 언급했고 이에 대중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내게도 그의 말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지 않는,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이었지만 한편으로는 40년대에 데뷔해 프랑스를 넘어 유럽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명성을 얻으며 커리어를 쌓기까지 그가 겪어야 했을 것들을 떠올리면 마냥 날선 비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쉘부르의 우산” 속 주느비에르만을 기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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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 못하게 그를 다시 보게 된 건 최근 어느 영화 소개 TV 프로그램에서였다. 가족의 형태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져온, “어느 가족”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을 맡은 “파비안느의 진실에 관하여”의 주인공으로 분한 그는 실제 자신처럼 프랑스를 대표하는 중년 배우 파비안느를 연기했다. 영화를 소개하는 짧막한 영상에서보이는 파비안느는 어쩐지 연기라기보다는 드뇌브 자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계속 본인을 “여배우”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그 생각은 더 강해졌다.

 

직업과 관련된 단어에서 남성, 여성의 구분을 없애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동시에 “여배우”라는 단어를 지양하자는 목소리가 커지는 현시점에서 나는 “여배우”야, “여배우”는 그럴 수 없어,라며 단호하게 말하는 영화 속 중년 "여배우"를 보며 프랑스에는 더 이상 스타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던, 실제 배우의 모습이 겹치는 듯했다. 단순히 극중 가상인물이 아닌, 실제 배우의 모습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일까. 그런 호기심이 나를 극장으로 이끌었다.


 

 

어느 중년 “여배우”와 그 가족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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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높이 고개를 들어야 겨우 그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높고 견고한 벽에 둘러싸인 저택에 중년 배우 파비안느가 살고 있다. 자신의 회고록 발간에 관해 인터뷰를 진행하는 중, 파비안느의 딸 가족이 집을 방문한다. 기자가 파비안느의 사위를 보고 “사위분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그 배우셨군요?”라고 질문하자 “배우라고 불러줄 정도는 못되죠.”라고 답하는 부분에서 파비안느의 냉정한 성격이 드러난다.

 

대외적으로는 회고록 발간 축하를 위한 방문이었으나, 딸 뤼미르는 회고록 내용을 미리 보내주지 않은 엄마가 못 미덥다. 꼼꼼히 회고록을 읽어본 후, 뤼미르는 어린 시절 엄마가 자신을 데리려 학교로 오곤 했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회고록에 적었다는 것에 설명을 요구한다. 이에 파비안느는 “나는 여배우야, 항상 진실을 말하지는 않아”라고 답하고 영화는 이어지는 그들의 설전을 통해 모녀간의 이러한 갈등이 처음이 아님을 보여준다. (파비안느의 회고록 제목이자 이 영화의 원제는 “La vérité(진실)”이다.)

 

그 무렵, 파비안느는 SF 영화에 출연하고, 병 때문에 우주에서 생활하며 몇 년 주기로 지구에 돌아오는 엄마를 그리며 나이가 든 78세의 딸을 연기한다. 회고록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한 줄도 없다는 것에 불쾌함을 느끼고 그만둔 매니저를 대신해 뤼미르는 촬영장에서 파비안느의 매니저 역할을 맡는다.


영원히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엄마, 그런 엄마를 기다리는 딸을 연기하는 파비안느, 그리고 그 연기를 지켜보는 파비안느의 딸 뤼미르.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모녀는 이전과 다른 관계로 나아갈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결국 모든 가정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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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올해 개최한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의 초청작으로 선정되었다. 기자간담회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설정을 처음부터 정해 두었으며 파비안느를 연기한 까뜨린느 드뇌브가 현역에서 활동하는 배우이기에 까뜨린느라는 배우의 측면을 곳곳에서 조명해 다양하게 묘사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드뇌브의 미들네임이 파비안느라는 점에서도 실제 배우와 극중 역할을 일치하려고 한 감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감독의 말대로, 영화에서 파비안느는 뤼미르의 엄마이자, 뤼미르의 딸 샤를로트의 할머니, 영화 촬영장에서는 누군가의 딸 역할로 연기하며 각 역할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모녀의 관계가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파비안느의 매니저와 애인, 전남편 및 사위와 손녀와의 이야기가 함께 이어지며 각 인물과 얽힌 관계에 따른 파비안느의 다양한 모습도 영화는 소홀히 하지 않는다.

 

파비안느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은 배우이거나 배우와 관련된 일을 한다.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파비안느의 딸 뤼미르도 배우의 꿈을 꾸었지만 결국 꿈을 포기하고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엄마와 다른 동료 배우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부분도 영화 속에서 언급된다. 에단 호크가 연기한 뤼미르의 남편 행크 또한 미국에서 조연 역할을 전전하는 배우이다. 모녀의 갈등의 시작 또한 파비안느의 배우로서의 삶에서 비롯되었고 갈등이 완화되는 과정 또한 그의 연기를 뤼미르가 지켜보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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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엄마, 나쁜 친구여도 좋은 배우인 게 낫다”라고 말하는, “여배우”로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자신의 저택을 둘러싼 벽보다 더 견고한 성벽을 쌓아올린 파비안느, 그런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동경하는 딸 뤼미르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분명하게 진실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음을, 내가 진실이라 여기고 있던 기억은 사실 온전히 믿을 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이는 꼭 어느 프랑스 배우의 가정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파비안느가 걸어온 “여배우”의 인생만큼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자신만이 꿈꾸는 것을,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어려움을 감수하고 이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독함을 느끼곤 한다. 오로지 자신만의 여정이며 때론 가족도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는 때론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서로의 진실 또는 진심과는 다른 오해를 쌓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영화는 파비안느와 뤼미르 모녀, 그리고 주변 인물들 간의 이야기를 잔잔히 풀어내며 관객에게 말한다.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꼭 한 쪽이 자신의 세계를 허물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존중하며 함께 나아갈 수는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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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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