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다시, 문장으로 - 문장의 일

글 입력 2019.12.0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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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면 지구 반대편으로 나오게 되는 것처럼, 읽기와 쓰기의 고독이 지닌 깊이가 나를 반대편에서,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게 했다. -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101쪽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 나오는 이 문장을 좋아한다. 왜 글을 쓰는지, 혹은 글쓰기의 매력은 무엇인지 묻는 말에 대한 낭만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글쓰기는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자기표현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소통과 자기PR을 강조하는 오늘날에는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어도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늘어나고 있다.

 

언젠가부터 서점에서는 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인기를 끈다. 다양한 필자들이 각각의 책에서 자신의 글쓰기 비법을 전수해주겠노라고 유혹한다. <문장의 일>도 크게 보면 이런 범주에 속하는 책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글쓰기 책들이 글쓰는 습관을 기르는 법이나 글의 소재를 정하는 법, 글 쓰는 태도 등 글쓰기라는 행위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문장의 일>은 글쓰기의 형식, 그중에서도 형식의 기본 단위라 할 수 있는 문장에 집중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언어는 현실을 형성한다. (중략) 언어가 현실을 형성한다는 것은 문장이 세계의 한 조각에 부여하는 질서가 수많은 가능한 질서 중 하나라는 의미다. - 62쪽

 

 

<문장의 일>에서는 우리가 지금껏 글의 내용에 신경 쓰느라 뒷전에 두었던 문장을 글쓰기의 첫 단추 삼는다. "언어는 인식의 시종이 아니라 인식 자체"(69쪽)라고 이야기하는 저자에게 문장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 그 이상이다. 그에 따르면 한 사람이 만드는 문장은 그의 생각, 더 나아가 그를 둘러싼 현실을 창조해낸다. 세세한 문장 하나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일단 쓰라'는 조언에 익숙한 나에게는 신선한 접근이었다. 생각조차 문장으로 한다는 것을 떠올리니 좀 더 이해하기가 쉬웠다. 우리는 문장을 지음으로써 세상을 각자의 방식대로 이해한다. 현상으로서만 존재하는 현실에 인과관계가 생기고 맥락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문장은 일종의 '논리 관계의 구조'로 볼 수 있다.


좋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문장의 형식을 눈여겨 봐야 한다. 문장의 내용은 무한할지라도 형식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종속 형식의 문장과 병렬 형식의 문장을 대표적인 문장의 형식으로 들며 각각에 해당하는 문장 중 특별히 훌륭한 문장들을 소개하고, 그 문장이 왜 뛰어난지를 설명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한 문장을 가지고도 페이지 한 장을 넘어서는 설명을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책 서두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연히 '생각'이다. 내가 (당연히) 강조한 형식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것이 그 자체로 가리키지는 않는 '어떤 존재'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내용'이다. 형식의 존재 근거는 내용의 상술, 조명, 강력한 표현이다. - 166쪽

 

 

물론 형식을 강조한다고 해서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글이 글쓴이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전제는 다른 글쓰기 책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저자는 글의 형식을 충분히 숙지한 다음에는 결국 내용 차원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하며 풍자 형식의 문장과 첫 문장, 마지막 문장 쓰기를 이야기한다. 눈과 손에 익은 형식에 어떤 내용을 채워 문장을 완성할 건지는 글 쓰는 사람의 역량에 달렸다. 많은 경험과 연습이 필요한 부분이다.

 

*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고 나서 서평을 쓰려면 첫 문장을 쓰기가 두렵다. 이번 글을 시작할 때는 리베카 솔닛의 훌륭한 문장을 방패 삼았다. 글쓰기 책을 읽을 때마다 글쓰기는 늘 어렵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흰 종이 또는 흰 바탕을 마주할 때면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리고 묻게 된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썼던 거지?"


어릴 때는 쓰는 일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했다. 그런 가치는 흔히 떠오르는 '작가'의 아우라에서 비롯되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세상사를 초월하여 외딴 곳에서 혼자 이야기를 뚝딱 만들어낸 것 같은 이미지 말이다. 그 때의 나에게 이야기를 창작하는 작가는 신처럼 생각되었다. 크고 나서 보니 그런 작가에게조차 쓰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작가가 아니더라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은 차고 넘친다.

 

뭘 하든 어느 정도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하는 세상이고, 동시에 누구나 쓸 수 있는 세상이다. 글을 쓴다는 게 특별하게만 느껴지던 어린 시절을 지나, 지금의 나는 좋든 싫든, 자의 반 타의 반 무언가를 계속 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내 글쓰기에는 어느새 더 잘 써야 한다는 강박만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 강박이 나를 문장 앞에서 무심한 사람으로 만든다.


저자가 집요하게 문장을 기록하고 분석한 이 책을 읽으며 문장을 사랑하는 마음, 감탄하고 들여다보는 마음을 발견했다. 어쩌면 문장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글이라는 매체에 담긴 저자의 애정과 믿음이 드러난다. 그러니 이 책은 문장, 즉 형식에 대한 책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글 쓰는 태도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나 역시 문장 하나에 감탄하고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어서 공책에 일일이 손으로 써 내려가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너무 먼 옛날처럼 느껴지지만 <문장의 일>을 읽으며 그 기쁨을 떠올려본다. 강박을 내려놓고 다시 문장으로 돌아가보고 싶다. 도구로서의 문장이 아니라 그 자체로 창조력을 가진 '원천'으로서의 문장으로.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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