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따뜻한 이야기가 그리운 날이면 -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삶을 사랑한 화가, 모지스의 자서전
글 입력 2019.11.2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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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서양 영화나 만화에서 따뜻한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을 많이 보았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손주들 손에는 따뜻한 핫초코가 하나 들려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의 책을 읽다 보면 내가 꼭 손주가 된 기분이다. 평화롭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핫초코를 마시는 어린아이.
 
할머니는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름의 유래부터 어릴 적 눈에 시럽을 뿌려 먹었던 추억, 첫 생일의 기억, 가정부 생활, 사랑에 빠진 경험과 결혼. 모지스는 결혼 후에도 쉼 없이 일했다.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감나무를 흔들던 사람이었다. 버터를 만들거나 우유를 짜서 팔고, 감자 칩을 판매하기도 했다.
 
나이가 든 뒤엔 소일거리 삼아 자수를 했고, 자수가 힘들어지자 붓을 들었다. 80세에 개인전을 열었고, 100세에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그런 모지스가 익명의 손주들에게 말한다. "인생에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온 드레스는 빨간색이 아니라, 붉은 벽돌색이나 갈색에 가까웠습니다. 나는 무척 실망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결국 내가 생각했던 빨간 드레스는 영영 못 입고 말았지요.

 

살다 보니, 실망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지스의 인생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실망한 일에 아쉬워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는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흘려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맞이한다. 흥분해서 소리를 높이거나 화를 내는 적도 없다. 그러면서도 벌컥 화를 내버리는 게 앙심을 품고 꽁해 있는 것보다 나을 때도 있다고 조언한다. 꽁해 있다 보면 자기 속만 썩어들어가니 말이다. 어려운 철학이 아니다. 굉장한 진리도 아니다. 하지만 모지스의 말은 독자를 따뜻하게 만들고 깨달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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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물론 나에게도 시련이 있긴 했지만 그저 훌훌 털어버렸지요. 나는 시련을 잊는 법을 터득했고, 결국 다 잘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려 노력했습니다.

 

 

온라인에는 항상 맛집을 추천하는 글이 올라와 있다. 올라온 글의 수만큼이나 하루에도 무수한 사람이 정보를 찾는다. 주변에 음식점이 널려있어도 아무 곳이나 가기보다 한 번 더 찾아보고 맛있다는 곳에 들어간다. 영화를 볼 때나 여행지를 정할 때도 비슷하다. 전반적으로 실패를 두려워하는 분위기다.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소한 선택을 할 때도 신중해진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만, 돌다리를 두들기기에 급급해 건너지 못하면 나아가지도 못한다. 비단 문화생활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다칠 게 두려워 몸을 사리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모지스의 일생은 그런 이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어차피 안 될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결국 다 잘될 거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분명 모지스의 인생은 현대 사회인의 인생과 차이가 있다. 자동차가 존재하기도 전에 태어나,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먹었던 사람과 미세공기와 자동차에 익숙해진 우리의 삶이 똑같다고 말하긴 힘들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월등히 좋다고 할 수도 없다. 평범한 일생을 적은 글은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의 일생을 적은 글을 읽을 때보다 심리적으로 가까워진다. 같은 조언을 해도 더 쉽게 수긍한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며 늘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해내고 싶었다는 말에 새로운 일을 할 힘을 얻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실제로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성공을 거둔 모지스의 일생은 나에게도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희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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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게 이미 늦었다고 말하곤 했어요. 하지만 지금이 가장 고마워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꿈꾸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젊은 때이거든요. 시작하기 딱 좋은 때 말이에요.

 

 

한국에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이제 다 컸네, 늙었네’처럼 나이를 비관하는 말이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다 컸으니까 스스로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중학생 때는 정말 어른이 된 것 같다. 사회초년생은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늙었다고 걱정하고 미래를 불안해한다. 지금 새로운 일을 하면 너무 늦은 거 같고, 앞으로 무얼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은 기분이다. 세뇌처럼 들은 말에, 지금이 가장 젊은 때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불안이 가중된다. 늘 과거를 후회하지만 그럴수록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제2의 할머니는 비록 책이라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인자하게 웃으며 나이에 대한 불안을 다독인다. 20대에 전공을 바꾼다 해도, 40대에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고 해도 ‘내’ 인생에선 가장 빠른 시간이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이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 매정하게 흐른다. 그 흐름 속에서 가장 이른 시간은 이 순간이다.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76세에 본격적으로 붓을 들어 전시회를 열었던 분의 말이니 믿음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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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스는 책 내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 독자에게 당신도 할 수 있다, 혹은 바지런히 살아야 한다며 교훈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교훈을 얻는 사람은 얻은 대로, 아닌 사람은 아닌 대로 놔둔다. 어떻게 공부해야 하며 살아야 하고 쉬어야 한다 등 많은 지침서에 지쳐 있던 독자에게 덤덤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의 책은 하나의 쉼터가 된다. 번역자가 ‘마지막으로 번역 과정이 노동이 아닌 휴식이 될 수 있게 해준 모지스 할머니, 그녀에게 가장 큰 감사 인사를 올리며 마칩니다.’라고 말한 이유를 십분 이해한다.
 
지친 하루, 해가 쨍쨍해도 마음에는 비가 오는 날, 따뜻한 이야기가 그리운 날, 핫초코 하나를 사서 이 책을 읽어보면 어떨까. 심신을 달래고 용기가 가득 채워져야 비로소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평온한 모지스의 이야기와 그보다 더 평화롭고 다정한 그림이 마음을 지키는 부적이 되어줄 것이다.
 
 
[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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