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우리가, 대기를 나눠 마시는 방법 [도서]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 싶을 때마다 펼쳐볼 책
글 입력 2019.11.28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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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서로가 외계인 같을 때


 

 

보현을 무슨 말로 위로해야 했을까? 나는 순간 보현을 위로할 수 있는 어떤 언어도 나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소설 <감정의 물성> 中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소설집에서 공감되었던 한 문장이다. 소설 ‘감정의 물성’의 화자 정하는 소설 내내 우울에 젖어있는 애인 보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의 감정을 받아내는 것도 버거워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감정의 물성’처럼 나도 너무 분노하고 슬플 때, 상대에게 내 감정을 수치화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 보여주고 싶은 심정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우리는 분명 같은 지구에서 같은 땅을 딛고, 같은 공기로 숨 쉬고 있는데도 서로가 외계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소설 ‘스펙트럼’의 주인공 희진과 루이처럼 말이다. 희진은 루이의 언어를 배워보려고 하지만 노력해도 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불가능의 차원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난 이 답답한 감정을 동생들을 통해 느낀 적이 많았다. 물론 우리는 잘 맞을 땐 아주 잘 맞았지만, 어떨 때는 어떻게 같은 배 속에서 나왔지? 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말 타인(他人)인 적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소설집은 7편 소설을 통해 일관적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러지 못했을 때 이 드넓은 우주에서 지구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사랑이 뭐길래


 

사랑에 대해서는 이거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사랑은 타인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자기애, 나르시시즘이라 명명하지 그걸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내가 ‘사랑이 뭐길래’,라는 생각을 가장 강하게 해준 소설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였다.

 

지구 밖 ‘마을’에선 성년식이나 마찬가지인 순례길에 오른 순례자들이 절반 정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거에 의문을 품은 소설의 주인공 데이지는 순례길이 지구 탐사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지구에 대해 알게 되자, 예정된 날보다 일찍 지구로 떠나기로 한다. 떠나면서 데이지는 자신의 친구 소피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 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中

 

 

데이지는 지구에 가서 우리와는 완전히,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을 만날 것을 고대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사랑에 빠질 것을 확신하고, 자신이 살던 고향 행성을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내가 데이지의 선택을 놀랍게 여겼던 이유는 데이지가 살았던 고향 행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유토피아와 같아서였다. 데이지의 고향 행성은 얼굴에 큰 흉터가 있어도 아무도 그걸 흉이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개성으로 여길 수 있는 세상. 수많은 다양성이 인정되는 세상이다.

 

그런 천국과도 같은 곳을 떠나 데이지는 현재 불평등이 만연한 이 지구에 남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데이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 안에서 좀 더 설득력이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데이지는 이렇게 말했다.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 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中

 

 

한 사람이면 충분해서, 자신의 터전을 기꺼이 떠날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그렇다면 데이지는 지구와는 다른 행성에 온 존재니, 외계인이나 마찬가지인데, 지구인인 완벽한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그 사랑이란 건 현실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소설이라서 가능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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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받지 못한다는 건, 우리가 같은 지구에 있지만 대기를 못 나누고 있다는 것


 

그런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이제 다른 상상을 해보자.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지구인들로만 꽉 찬 지구를 말이다. 그런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혜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중략)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슬렌포니아라는 제 3행성에 가지 못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 100년 넘게 우주선을 기다리고 있는 안나의 이야기다. 슬렌포니아로 갈 수 있었던 우주 통로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경제성과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폐기되어 버린다. 그 때문에 안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100년을 넘게 기다려도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안나의 질문이 오래도록 나의 마음에 남았다.

 

기술의 발달로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정해도 효용성만을 따지면 항상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장애인이 그렇고, 성소수자가 그렇고, 이 사회가 정상적으로 규정한 가족을 만들 수 없는 자들이 그렇다. 이 소설은 이렇게 묻고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 한들 사랑의 자리에 효용성이 대체된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가 남게 되나. 남겨진 사람들에게 ‘같은 우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그저 공허할 뿐이다. 소수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진정 같은 지구를 살고 있나 싶어진다.

 

명절에 쉽게 집에 내려갈 수 있는 나와, 버스 하나 잡는데도 쩔쩔매야 하는 장애인. 남자친구와 결혼하길 바란다면 당장 혼인신고를 할 수 있는 나와, 그럴 수 없는 성소수자. 나라를 위해 투표하는 나와 그럴 수 없는 청소년들. 노키즈존 팻말이 달린 카페를 생각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나와 들어갈 수 없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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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앞에서 질문한 것에 대한 답을 해야겠다. 사랑이 없는 행성은 결국 어떤 것인가. 같은 지구에 살지만 같은 대기로 숨 쉬지 못하고 있는 행성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기 때문에, 저렇게 때문에... 여러 명분으로 함께 숨 쉬는 공기를 빼앗기다 보면 결국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별이 될 것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빛의 속도로 가는 것만큼 어려운 것. 그렇기에 시도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알바를 하다보면 많은 사람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과정에서 종종 내가 얼마나 쉽게 타인들을 내 멋대로 판단해버리고 그걸 토대로 대하는지 나 스스로 느낄 때마다 놀라게 된다. 그러면 늘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소설집에 담긴 여러 소설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으며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 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中

 

 

고향 행성을 떠나 지구로 간 데이지는 이상만을 믿는 순진한 주인공이 아니었다. 인용한 글귀처럼 그녀도 타인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이 자신에게 괴로울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보다 많이 행복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소통하기 위해 지구 밖 존재인 그녀는 기꺼이 지구로 와 우리와 함께 살 것을 결심했다. 그 순간 우리와 데이지는 타인이지만, 같은 공기를 마시고 숨을 쉬게 된다. 항상 그것이 시작점인 것 같다.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것 같고 외계인 같기도 한 타인과 소통하는 시작은 일단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 즉, 분리하는 게 아니라 일단 살을 부대끼며 함께 있는 것.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먼 곳의 별들은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서 작고 오래된 셔틀 하나만이 멈춘 공간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정말로 슬렌포니아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그게 가능하냐는 회의적인 질문들은 우리 속에서 떠나질 않을 것이다. 특히 내가 타인을 이해하고자 시도했음에도 계속해서 벽에 부딪힐 때마다 사실 그런 사랑, 소설이니까 가능한 것 아니냐는 질문이 목까지 찰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한 장면을 다시 펼쳐서 읽고 싶다.

 

안나는 결국 작고 오래된 셔틀을 직접 몰아, 가족이 있는 슬렌포니아 행성에 직접 가는 걸 택한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안나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비록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닐지라도, 안나처럼 가야 할 곳을 알고 결국 셔틀의 운전대를 지휘한다면 결국 우리는 닿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행성과도 같은 타인의 진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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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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